#89
러트 시기에 라일이 보여주었던 애정 어린 페로몬을 생각하니 귓가에 열이 몰렸다. 지금 당장 그게 근처에서 뿜어져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은 남 일이라 생각하며 그저 거북하게만 생각했는데 그 대상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못내 황망했다. 이상할 정도로 저자세였던 그의 다른 페로몬들과는 또 느낌이 다르다.
부끄럽고 또 어긋난 것 같은 기분. 이래도 되는 걸까.
가족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둥둥 울리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특히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붕 떠올랐던 감정이 다시 쑥 가라앉곤 했다.
“휴…….”
겨우 오늘의 후회를 갈무리한 해진이 아까부터 들고 있던 종이를 들어 올렸다. 각인에 대해 잘 정리하고 있는 서류는 그 내용 때문에 잘 읽히지가 않았다.
[각인 대상의 부정적인 페로몬 또한 심신에 영향을 미친다. 감정의 근원부터 상대에게 동조하고 마는 각인의 위험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페로몬의 이해, 65p>]
정리된 내용에는 하나하나 각주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각주에 있는 책은 전부 서재에 있다고, 라일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읽고 또 읽어도 어째 현실감이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이런 페로몬의 작용이 라일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건 실감하기 어려웠다. 줄곧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는 대체 언제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제게 품었을까.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품었을까.
해진이 서러움을 삼키는 내내 라일은 무심하기만 했다. 대체 어느 순간에 각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둘 사이의 관계가 어긋날 대로 어긋났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자신이 그리도 아팠으니까 말이다.
이 일방적인 행동을 생각하니 또 화가 치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해진의 의사는 결국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처럼만 보여서.
하필 그때 종이 울렸다.
“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더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나아간다. 꿀을 잔뜩 넣어 혀가 얼얼할 정도인 자몽차를 연거푸 마신 탓에 기침은 가라앉았다.
꿀 넣은 차는 그야말로 라일의 애정과 비슷했다. 당장 목이 아파서 마셔야 하는데 그 안에 섞인 달곰한 것마저 몸을 파고들지 않는가.
“해진. 기침은 좀 어때.”
“…….”
대답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날이 선 마음은 자꾸만 자신도 상대도 가리지 않고 잔뜩 베려 들었다. 온실에서 한번 화를 낸 뒤로 해진은 제법 이런 격한 감정을 잘 표출해내곤 했다. 라일 또한 한 번도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해진이 저도 모르게 페로몬까지 움직이면서 그에게 화를 내보낸 것은.
“신경 쓰지 마세요.”
“…….”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세요.”
“그래.”
평소와는 또 다른 분노였다. 물끄러미 해진의 얼굴에서 그늘을 가늠하던 라일은 매서운 눈과 마주친 뒤 얌전히 물러섰다. 목소리를 들으니 잔기침이 많이 가라앉은 듯해서 다행이었다. 오래도록 머무르는 기침은 폐렴이 되기 십상이라는 소리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얌전히 뒤로 물러난 그는 침실 문을 닫았다. 저곳이 본래 라일의 공간이라는 것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해진은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듯 굴었다.
아직 떨어지는 상황이 몹시 불안했으나 라일은 그 또한 존중하기로 했다. 그가 멋대로 한 각인이라는 건 그리도 무서운 맹목성을 띠고 있었으니까.
“윽…….”
그러나 다시금 통증이 일기 시작하는 심장은 이 상황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울컥 솟는 피가 막을 겨를도 없이 아래로 쏟아졌다.
그는 서둘러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이런 흔적을 남겨 해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보고서에는 이러한 상황들이 빠짐없이 기술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체감하는 것과는 또 다르리라.
“도련님……!”
마침 그가 왔다는 소식에 서둘러 걸음 했던 마크가 그 장면을 발견했다. 덩달아 근처를 지나던 사용인이 경악 서린 얼굴로 수건을 들고 달려온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그는 덤덤하게 주의를 시키면서 피를 닦아냈다. 신경은 온통 침실에 웅크리고 있는 해진을 향해 있다.
언제쯤 돌아가야 적당할까. 녀석이 너무 오래 침잠한 상태로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해가 될 물건은 다 치웠다고는 하나 아직은 불안하다. 상담을 받으며 점점 호전되는 것 같아도 해진이 제 입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왔다면 녀석의 기분이 나았을까. 줄곧 침실에만 있다는 소리에 오는 내내 초조함이 그를 잠식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가 이 이상 짜증 날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회사를 오가는 시간이 너무 피가 마른다.
“마크.”
“네, 도련님.”
“저택 뒤편에 헬기장을 설치해야겠습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도 마크는 예전처럼 부산스럽게 움직이진 않았다. 그저 그를 조금 부축하면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뿐. 이 몸 상태의 원인이 무언지 마크에게는 소상히 알려주었던 탓이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뜬금없는 소리에도 마크는 그저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부디 둘의 관계가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마크의 바람에도 둘 사이에는 묘한 공간이 생겨나기만 했다. 적당한 시기 라일이 가까스로 거리를 좁히면 해진이 또 훌쩍 다른 곳으로 마음을 돌렸다. 마치 기이한 강박감이 해진을 자꾸만 도망치라고 종용하는 듯 보였다.
갈급함을 산소 대신 들이마시며 라일은 끊임없이 해진을 쫓아갔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아예 쫓을 수 없는 곳으로 갈까 봐.
그러나 몸의 한계는 착실하게 찾아왔다. 하필이면 곧 그의 러트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해진. 잠시만 문을 열어 줘. 주고 싶은 게 있어.”
종을 아무리 울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늘도 열심히 각인에 관련한 서류를 보고 있다고 했는데 무언가 심기를 건드리는 내용이 있었으리라.
그래도 라일은 꿋꿋하게 종을 울렸다. 손에는 작은 상자를 하나 든 채로.
녀석을 두고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라일은 직접 연락을 넣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엔 해진이 쓰는 낡은 휴대폰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벼르고 벼르다가 적당한 시점이라 생각해서 들고 온 참이었다.
이런 기계 종류에 줄곧 관심을 보이곤 했으니 효과가 있으리라 믿었다. 각인 서류에 함몰되어 있는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아서 적당히 주의를 돌려 주고 싶기도 했고.
한참이나 방문 앞에서 서성인 끝에야 작은 발소리가 들린다. 불안정해서 금방이라도 다가가 손을 내밀고 싶은 발소리였다.
휙 문이 열리는 동시에 매서운 말이 날아왔다.
“필요 없어요.”
최근 들어 라일은 해진의 저 흔들리는 눈빛에 무언가 다른 게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꼭 누군가가 억지로 녀석을 붙잡고 끌어내기라도 하는 듯 위태로워 보이는 눈이었다. 불안한 나머지 라일이 한층 더 자상하게 녀석에게 손을 뻗으면 흔들림은 심해지기만 했다.
오랜 목마름이 이 순간 라일의 폐부를 쥐어짰다.
“……일단 보고 필요 없으면 버려두어도 괜찮아.”
가까스로 녀석의 손에 작은 상자를 쥐여 주었다. 분홍빛 돌던 손톱 끝이 하얗게 변하도록 해진은 그 상자를 세게 쥐었다.
무언가 불안하다는 예감을 받을 무렵 예상치 못하게 강한 거부의 페로몬이 그를 덮쳤다.
“자꾸 이렇게, ……자상하게 굴지 마세요.”
“…….”
벼르고 별렀다는 듯 꾹꾹 감정을 담은 말이었다. 그래서 이 순간 그간 느껴 오던 해진의 거부감이 비단 라일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의 순간은 조금 늦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이 해진의 부정적인 페로몬에 사정없이 흔들렸다.
“라일……?”
녀석의 앞에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탁해지는 시야로 라일은 마지막까지 해진의 얼굴을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동그랗게 떠진 그 눈이 마치 저를 향한 걱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이 순간에도 심장이 뛰었다.
“……네 탓이 아니야…….”
이 와중에도 녀석이 행여 제 탓을 할까, 그게 못내 걱정되었다.
***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원래 침실은 싸늘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일의 페로몬 흔적이 없다. 저도 모르게 그 페로몬에 감싸여 있었다는 걸 이렇게 깨닫는다.
“…….”
어두운 방에서 웅크린 해진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마크가 더 먼 방으로 바꿔 준다고 했는데 싫다고 해 버렸다. 충동적인 결정이다. 쓰러진 라일이 러트 기간이라는 걸 들었는데도.
그리고 라일이 한동안 자신을 피했던 이유를 이제야 전해 들었다.
‘……네 탓이 아니야…….’
쓰러지는 순간의 라일도, 전전긍긍하면서 그를 챙기던 마크도 해진의 탓이 아니라고 했다. 사용인들도 어쩔 줄 몰라 하며 해진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해진은 안다. 그가 쓰러진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부정적인 제 페로몬이 라일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서류에서 몇 번이나 읽었다. 다만 간과한 건 그 영향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 줄 몰랐다는 점이다. 덕분에 해진은 아무도 탓하지 않는데도 혼자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침대 위에 웅크려야 했다.
텍스트로만 읽던 각인의 무서움이 이렇게 눈에 보이니 덜컥 무게감이 느껴졌다.
언제나 단단하기만 할 것 같은 라일이 쓰러지는 장면은 이상하게 충격적이었다. 왜 이러는 건지, 병원에는 왜 안 가고 침실에 옮겨 두기만 했는지 묻자 마크의 얼굴이 무척 심각했다. 한참이나 고뇌하던 마크는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