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90화 (90/101)

#90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해진이 저도 모르게 떠올렸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근원적인 부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라일은 왜 각인 사실을 숨기려고 했을까. 자신이 이 저택 밖으로 나가는 건 그리도 두려워하면서, 망가진 다리는 왜 제가 다 아프다는 듯 매만질까.

그가 호수로 뛰어가지 않았다면 계속 각인을 숨겼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 소리 내 묻지 않았는데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지난 며칠간 해진은 억지로 억지로 피하고만 싶었다. 이렇게 도망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의 자상함도 온기도 마냥 거부해야 한다고 의무적으로 생각했다.

가족들을 떠올리면 응당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알고는 있었다. 해진이 이렇게 바보 같은 짓으로 자학하는 걸 그 누구보다 가족들이 싫어하리라는 걸. 전부 자기 위안에 불과한 짓이었다. 그저, 미안해서.

서글픈 생각을 하니 저절로 숲을 닮은 페로몬이 생각났다.

더는 외면하지 못한 해진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목발을 짚을 생각도 하지 않고 깁스로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둔탁하게 바닥을 끄는 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응접실로 나가 라일이 누워 있는 침실로 다가갈수록 그의 페로몬이 진하게 느껴진다. 제어할 겨를도 없이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예전에 이곳으로 기어 왔던 것과는 다르게 해진은 비틀거리지만 꿋꿋하게 두 발로 걸었다. 그리곤 종도 울리지 않고 벌컥 그의 침실 문을 열었다. 훅 끼쳐 오는 페로몬이 어느새 너무 익숙했다.

“……해진.”

“…….”

“누가 너를 여기로 보냈지.”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누워 있던 라일이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다가오는 해진을 똑똑히 느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수면제를 조금 더 있다가 투여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정신을 잃는다면 또 해진을 향해 몸뚱이가 움직일까 봐.

페로몬 해소제가 만든 고통이 바늘처럼 온 혈관을 찔러대지만 버텨 낼 작정이었다. 이대로 스스로를 고통에 지칠 대로 지치도록 한 후에나 잠들 생각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해진이 보기에도 잔뜩 찡그려진 미간에서는 고통이 느껴졌다. 러트를 맞은 알파답게 허공을 맴도는 그의 페로몬은 퍽 거칠었다. 그런데도 해진의 피부에 닿을 즈음엔 모든 기운이 사뭇 부드러워졌다. 간지러울 정도의 감촉이었다.

그래서 그 순간, 해진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제 발로 왔어요.”

얼굴을 가린 채 고통을 견디던 라일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생경하다. 어두운 와중에도 은은한 빛을 내는 그 금발을 해진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딱 라일에게서 두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한참 뒤에나 라일은 되물었다. 아까보다도 더 잠긴 목소리가 흉흉할 정도였다.

“……왜?”

“페로몬 해소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한 걸음 더 그가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 비틀거리는 걸음에 움찔 놀란 라일이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더욱 격한 감정을 담았다.

“……해진, 후회하지 말고 나가. 또 내가 돌아다니는 게 불편하다면 몸을 묶어 놓으라 할 테니.”

“…….”

해진은 말없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이제 발끝이 침대에 닿을 정도였다. 상체를 뒤로 빼며 물러난 라일이 급기야 두려움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자신이 거대한 불덩이라도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혼란스럽게 해진을 바라보던 라일이 돌연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흉흉한 기운이 채 갈무리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다.

“혹시 누가, 널 여기로 억지로 보낸 건가? 제 발로 왔다고 말하라면서?”

말을 꺼내고 보니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기어코 또 그의 주변 인물이 해진을 핍박하기라도 한 건 아닐까. 녀석이 서러운 오해를 또 삼키는 꼴을 보느니 머리에 총을 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해진을 밖으로 내보내면 녀석의 신변이 위험해질까 봐.

그러나 이 방에 있어도 해진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다름 아닌 자신 때문에. 복잡해지는 상황에 라일은 암담하게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억측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해진은 툭 내뱉었을 뿐이다.

“제 마음이 불편해서요.”

“……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쓰죠?”

자괴감에 라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 녀석의 앞에서 쓰러진 건 실책이었다. 이걸 어찌 수습해야 하는지 무거운 머리로 고민하지만, 지금은 못내 힘겨웠다.

눈앞의 녀석에게 손을 뻗지 않는 게 최선이었으니까.

“해진, 일단, 지금은…….”

“이렇게 라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서둘러 해진을 내보내려고 하니 단호한 말이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저 매서운 반응에 또 피라도 토할 것 같아서 라일은 몸을 굳혔다. 그런 꼴을 보이면 더더욱 해진의 신경만 거스를 텐데.

“저는……, 제가…….”

그러나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이번엔 몸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어느새 저를 향해 가득 밀려온 해진의 페로몬을 홀린 듯이 탐색한다.

파르르 떨리는 해진의 말끝이 조금 젖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제게 무거운 걸 얹어 주려고 하지 마세요.”

중간이 생략된 모호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해진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것들을 감히 짐작했다.

페로몬에서 여실히 걱정이 느껴졌으니까.

라일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해진은 크게 숨을 들썩였다. 그는 이제야 각인이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자신이 몇 번 더 거부하는 걸로 라일은 진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었다.

또 누군가가 자신 때문에 죽는 건 싫었다. 우그러지는 차 안에서 저를 품에 껴안은 채 죽어 버린 형 생각이 나서 끔찍하다. 만약 라일이 끝내 자신 때문에 죽기라도 한다면 가족들이 기다리는 천국에는 영영 올라갈 수 없으리라.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울 테니.

“해진, 나는…….”

고통스러운 듯 라일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살짝 내리깐 시야로 그런 라일을 바라보던 해진은 그냥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몸이 풀썩 앞으로 당겨졌다.

“……안 돼, 해진. 이렇게는…….”

자신도 모르게 해진을 끌어당겨 품에 넣은 라일이 두렵게 입을 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제 몸에 해진을 올려 둔 두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또 그날처럼, 그간 해진이 겪어 온 나날처럼 녀석을 상처입힐 게 두려웠다.

“해요.”

자비 없이 떨어지는 허락에 라일은 크게 목울대를 울렸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에서 점점 이지가 사라진다. 코앞으로 다가온 해진의 숨결이 달콤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두 손바닥에 닿은 몸이 옷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이리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나를, 날 묶어.”

“……네?”

“손을 묶어. 제발. 이대로 널, ……또 막 다루게 하지 마. 제발.”

온몸이 덜덜 떨리는 라일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밑바닥까지 다 내보이는 감각이 섬뜩하게 목덜미를 훑는다.

아까보다 피부에 조금씩 더 들러붙는 라일의 페로몬을 느끼면서 해진은 무표정하게 어깨에 고개를 묻은 그를 내려보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목덜미를 쥐고 당겼다.

힘이 하나도 없는 듯 끌어당겨진 라일이 두렵게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릎으로 선 해진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목으로 손을 옮겼다. 부드러운 넥타이의 감촉이 손끝에 닿는다.

넥타이를 끌어 내리는 게 퍽 기분이 미묘했다.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걸 다 풀어내자 라일이 제 두 손을 끌어와 앞으로 내밀었다. 이 익숙한 상황에 해진은 곤혹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다. 지난 5년간 당해 왔던 일을 반대로 제가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퍽 복잡한 심경으로 그는 서투르지만 열심히 라일의 손을 묶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하얀 줄이 옅게 남은 제 손목이 생각났다. 머지않아 퍽 단단한 매듭이 지어졌다.

그 순간 라일의 팔이 휙 움직였다. 묶인 손을 용케도 해진의 머리 위로 움직인 그가 끌어안듯 몸을 당긴 것이다.

속눈썹이 서로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파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려움만 흘리던 페로몬이 어느새 끈적한 정염을 품은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열이 오르는 감각이 들었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 새파란 눈에는 아주 무거운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걸 홀린 듯이 바라보고만 있으니 숨결이 은구슬처럼 피부 위를 데구루루 굴러간다.

“입만, 맞출게.”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다는 듯 거센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 라일은 자제심을 쥐어짰다.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이대로 버티겠다는 의지가 형형하다.

사락사락 그의 금빛 속눈썹이 움직이는 걸 보던 해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입술이 맞닿았다.

“으음…….”

무척 뜨거운 감촉에 해진은 깜짝 놀랐다. 불쑥 입안을 침범하는 혀의 감촉도 생경하다. 그간 그토록 라일과 몸을 섞었는데도 입맞춤이 처음이라는 자각이 이제야 들었다.

허리를 두르고 있던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계속해서 당기는 힘 때문에 해진은 무릎으로 지탱하던 자세를 무너트리고 말았다. 엉덩이가 풀썩 라일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라일은 고개를 틀며 한층 해진의 안을 파고들었다. 파들파들 눈을 깜빡이던 해진의 시야로 살짝 찡그려진 그의 수려한 이마가 보였다. 진지하게 감고 있는 그의 예쁜 눈도.

무심코 파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 아쉽다고 생각한 순간 라일이 반짝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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