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강한 눈빛이 해진을 사로잡았다. 허리가 움찔 떨렸다. 저도 모르게 두 팔로 라일의 어깨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라일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점점 더 시야가 뒤로 넘어간다. 목으로는 계속 라일의 페로몬이 울컥울컥 쏟아져 들어왔다.
“흐…….”
절로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페로몬이었다. 어느새 화려한 음각 무늬가 있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잡아먹을 듯 해진에게 입 맞추던 라일과 함께 몸이 완전히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고 나니 자세가 퍽 미묘하다. 아까부터 단단하게 그를 찌르던 라일의 성기가 허벅지를 강하게 눌렀다. 입에서는 어느새 질척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분명 그와의 행위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명치에서 열이 솟았다.
“아흐, 숨이…….”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라일 때문에 금방 숨이 찼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밀어내자 그가 슬쩍 떨어진다. 코끝이 스치는 감각에 다시 움찔 허리가 떨렸다. 그런 그를 열기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라일이 입술을 촉촉 두어 번 내리누르며 말했다.
“조금만 더. 응?”
말할 때마다 절박하기까지 한 라일의 페로몬이 툭툭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어느새 멍하니 풀어진 그의 눈동자가 해진을 담는다. 호수에 뛰어든 것 같은 제 얼굴을 보고 당황한 해진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성급하게 입술이 닿는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강하게 파고드는 입술이었다. 혀가 입천장을 훑고 앞니 뒤의 단단한 부분을 희롱했다.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페로몬이 울컥 목구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한 번도 이렇게 페로몬을 교환해 본 적이 없어서 못내 당황스러웠다. 입안이 간지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다시 숨이 차서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미안해.”
“으, 하…….”
“미안, 조금만, 응? 미안해.”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라일은 이제 반쯤 미친 사람처럼 해진에게 애원을 시작했다. 코끝으로 부드러운 그의 뺨을 누르다가 아예 제 뺨을 그곳에 문지른다. 귓가에는 계속해서 달콤한 내음을 풍기는 페로몬을 쏟아냈다.
그 와중에도 해진의 등 뒤로 넘어가 있는 손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다. 마치 딱 여기까지만 허락되어 있다는 듯이.
라일의 힘이라면 사실 넥타이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낼 수 있을 텐데.
“해진. 좋아해.”
그때 귓가로 꿀처럼 뚝뚝 떨어지던 페로몬 속에 애처로운 고백이 섞여들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혈안이던 해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한참을 그렇게 해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던 라일이 다시 매섭게 입술을 탐하며 들이쳤다. 혀가 맞닿는 감촉이 소름 끼칠 만큼 뜨거웠다. 결국 눈을 감아 버린 해진은 곤혹스럽게 미간을 찡그려야 했다.
그저 무섭기만 하던 이 행위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끼어들고 말았다.
***
다음 날 멍한 얼굴로 일어난 해진은 한참이나 그렇게 침대 위를 떠나지 못했다. 밖은 이상하게 부산스러웠는데 차마 내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제는 한참이나 그렇게 라일과 입을 맞췄다. 그의 페로몬이 몸통을 다 채울 것처럼 길게. 그러다가 아래에서 무언가 울컥 솟는 기분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도망쳤다. 진심으로 빠져나가고 싶어 밀어내자 라일은 순순히 몸을 비켜 주었다.
라일이 자제해 페로몬을 운용한다고 한들 그는 우성이었다. 열성인 해진이 휩쓸리지 않고 그렇게나 버틴 게 용한 일이었다. 해진까지 라일에게 각인을 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이 가정도 사뭇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신이 과연 휩쓸리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직도 아래를 축축하게 전율시키던 그 감각이 소름 끼쳤다. 그렇게나 많이 그와 몸을 섞었는데 처음 겪는 갈망이었다.
그래서 잠은커녕 거의 새우듯 밤을 보내야 했다.
곤란하다. 막연히 도망치는 걸 그만두었다고 해서 이 뜨거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단번에 납득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귓가에는 아직도 애절하게 애원을 쏟아붓는 라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애정을 품고 있는 그 페로몬이 가까스로 도망친 지금도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새벽을 보낸 해진에게 종소리가 파고들었다.
“…….”
침묵하자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어제와 비슷한 음색으로 갈라지는 라일의 목소리도.
“해진.”
죄책감까지 뒤얽힌 그 목소리에 해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 침실 문을 열러 다가가는 걸음이 오늘따라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벌컥 문을 여는 순간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 커다란 꽃다발이 해진을 반겼다.
“어…….”
왜 이렇게 다급하게 문을 열었지, 의아함을 채 곱씹을 겨를도 없었다. 오늘도 완벽한 라일의 차림과 해진의 몸보다도 거대한 붉은 장미꽃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선물.”
얼결에 무겁게 느껴지는 그 꽃다발을 받아 든 해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딘가 불안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라일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도망치듯 시선을 돌린 건 소용이 없었다. 그의 등 뒤로 응접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꽃들을 보고 더 놀란 탓이다.
“……왜요?”
한참이나 침묵한 끝에야 해진은 가까스로 물어볼 수 있었다. 밖이 부산스럽길래 의사라도 온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수많은 꽃을 옮기고 있었나 보다.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가 해진을 고무줄처럼 이리저리 늘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해진은 해답을 구하듯 겨우 라일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나온다.
“네 첫 키스니까.”
“…….”
뜬금없는 상황처럼 뜬금없는 이유였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아연하게 살짝 벌린 해진이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소용없는 짓이다. 탐스러운 붉은 장미들만 제 존재를 한껏 뽐냈다.
“좋은 기억이 아닐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나쁜 기억으로만 남기고 싶지는 않아서.”
“……그…….”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조심스럽게 전한 진심에도 해진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어제 해진을 그렇게 보낸 뒤 라일은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넥타이는 허무하게 풀어졌으나 행여 녀석을 쫓아갈까 봐 무서워 침대 기둥에 한쪽 손을 묶어야 했다.
다시 일어났을 땐 다행스럽게도 제 침대 위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뿐했다. 분명 아직 러트 시기일 텐데도 머리가 상쾌했다. 겨우 키스 정도에 이리도 몸이 행복에 겨워 날뛰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떠올리는 순간 그는 아픔도 잊고 벌떡 일어나야 했다.
제일 먼저 걱정을 품고 제게 들어오던 해진의 페로몬이 생각났다. 죄책감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제 발로 이곳에 와 준 해진의 행동도 기억해 냈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이 아프면서도 감히 희망으로 보였다.
이러니 더욱더 제가 한 짓 때문에 불안하고 또 초조했다. 사과만 입에 담으면 될 것을 저도 모르게 가슴을 터트릴 듯 맴돌고 있는 감정까지 던지고 말았다. 분명 무거운 걸 주지 말라고 경고했던 해진이었는데.
그래서 다급하게 꽃을 준비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기엔 해진이 응당 겪어야 할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살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특히나 첫 키스가 아직이라며 어색한 반응을 보이던 녀석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만 라일은 이렇게 준비하면서도 해진이 그건 키스가 아니었다고 다시 말한들 감수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제처럼 뭐라도 매섭게 내뱉을 줄 알았던 해진은 계속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말도 못 할 정도로 화가 난 건 아닐지 걱정하느라 초조하게 녀석의 온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녀석의 볼이 묘하게 붉은 게 눈에 들어왔다. 꼭 장미가 흰 피부에 드리운 양.
“해진?”
해진은 심장 박동에 따라 온몸이 들썩여서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뜬금없는 이유를 듣고 나서야 해진은 그에게 쓸데없는 얘기까지 나불거렸던 그날을 상기했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사소한 소리였을 터다. 오히려 그를 놀리곤 했던 형처럼 한 번 웃고 넘어가도 상관없었으리라.
그러나 라일은 못내 미안하다는 듯 그에게 좋은 기억으로 어젯밤을 남겨 주려고 애썼다. 자신의 책임회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해진을 위해서. 아직도 러트의 여파로 고통스러울 텐데도 제일 먼저 해진을 배려하려고 애썼다.
그래. 당신의 자상함은 이런 거였지.
들고 있는 꽃다발이 너무 무거웠다. 분명 이렇게 무거운 걸 제게 주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는데도 라일은 끝내 해진에게 이걸 건네주었다.
아니, 사실 받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라일은 그래, 한마디로 꽃다발을 거둬 갔으리라.
괜히 받아 들었다. 그런데, 꽃다발을 받아서 품에 가득 안고 있는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큰일이었다.
정말 큰일 났다.
“…….”
볼에서 시작한 해진의 홍조가 목덜미로 번졌다. 그 분홍빛 기운이 어여쁜 그의 흰 목선을 따라 내려가며 자취를 남기는 장면을 라일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끝내 녀석의 귓가가 터질 듯이 붉어지는 순간 라일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고 말았다. 둘 사이에 갇혀 버린 장미꽃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장미 향을 사방으로 뿌려 댔다.
“혹시 내가, ……감히 큰 착각을 하는 거라면 날 때려.”
동굴처럼 낮게 울리는 라일의 목소리에 해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라일이 고개를 숙였다. 녀석의 몸을 잡았다간 큰일이라도 날까 봐 양손은 문틀에 버티듯 지탱한 채였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잔뜩 뭉개진 장미꽃이 아래로 사락사락 흘러내렸다.
해진은 그냥 두 눈만 꾹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