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92화 (92/101)

#92

“…….”

허공에서 페로몬이 요란하게 얽혔다. 환희와 잔잔한 두려움을 담은 그것들이 소리 없이 아웅다웅 합을 맞추어 간다.

차마 라일을 잡을 수 없어서 품에 있는 장미만 으스러지도록 쥔 해진은 고요하게 숨을 헐떡였다. 울컥 쏟아져 들어오는 이 온기를 이제 마냥 거부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거센 깨달음과 함께.

라일은 끝내 해진을 따라잡았다.

***

“해진.”

“…….”

사방에 빛을 뿌리는 것 같은 얼굴로 라일이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그의 눈매를 바라보던 해진이 이내 머쓱함에 팩 고개를 돌렸다.

그 외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일은 다가왔다. 그리고 해진의 정수리에 미미하게 입술을 부볐다.

“하하. 사이가 좋아지셨군요.”

“이만 돌아가.”

그제야 아직 의사가 방에 남아 있다는 걸 깨달은 해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꼭 그 시선을 차단하고 싶다는 듯 라일이 그 사이를 막아섰다. 뭐라 할 겨를도 없이 몸이 불쑥 허공으로 떴다.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알아.”

오늘의 상담이 끝나자 어김없이 돌아온 라일이었다. 매번 호출기는 빠짐없이 손에 쥐고 있는데도 뭐가 그리 걱정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번엔 라일의 입술이 그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황한 해진이 어색할 정도로 고개를 꺾어 그를 외면했다.

“이런, 이런 거 하지 마세요.”

“무엇을?”

“…….”

분명 일부러 이러는 것 같은데 뭐라 말하기가 참 애매했다.

응접실을 가득 채울 만큼의 많은 꽃을 받은 날부터 라일이 이상해졌다. 원래도 썩 정상은 아니었으나 남은 러트 기간 내내 잠들었다 깨어난 뒤로 더욱 이상해졌다. 이따금 그는 이렇게 꼭 참기 힘들다는 듯 굴었다.

아직도 해진이 두 발로 걷지 못하게 안고 다니는 건 여전했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치밀어 오른다는 듯 그의 정수리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차라리 대놓고 무언가를 했다면 바로 제지했을 텐데 꼭 그가 방심한 순간에 스치듯 지나가는 입맞춤이었다.

그 달달한 행동의 뒤엔 꼭 이런 달달한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으로 해진은 허덕였다. 라일이 페로몬을 빠르게 갈무리하곤 해서 다행이었다.

체념이라도 한 듯 그의 품에 안겨 방으로 돌아가자 계절에 맞춰 침구가 바뀐 침대가 그들을 반겼다.

겨울의 끄트머리에 호수에 다녀온 뒤로 날씨는 차근히 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두꺼운 이불이 조금은 산뜻한 무게감으로 바뀌었다.

어색하게 그의 옆에서 잠드는 것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꼭 라일의 품에서 깨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무서워서 떨어지지 못하겠다는 라일 때문에 같은 침대를 이용하긴 했으나 무언가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날 받은 장미꽃으로 인해 너무 많은 게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응접실을 가득 메웠던 꽃다발들은 이제 화분에 꽂혀 저택 곳곳에 장식되었다. 해진이 어디로 움직여도 그 꽃들을 볼 수가 있었다. 꼭 이 저택에만 이른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오늘 상담은 어땠지?”

“……비슷했어요.”

꼬박꼬박 그의 상태를 물어 오는 라일이었다. 어르듯 그를 올려다보는 눈짓에 해진은 다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개의치 않는 듯 라일은 해진이 편하도록 깁스한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려주더니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회사에 다녀온 모양인데 오늘도 귀가가 너무 빨랐다. 저택 뒤에서는 이따금 헬기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지?”

머쓱함을 느끼면서도 해진은 벼르고 있던 말을 꺼냈다. 상담하던 의사가 그의 상태를 보더니 조언을 하나 해 주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있었던 아픈 일이 어찌 해결되었는지 한번 들어 보라는 조언이었다. 그제서야 저를 핍박하던 과거의 사용인들을 라일이 고발 조치하겠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그때 고소한다던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요.”

“……괜찮겠어?”

“네.”

잠깐 시선을 내린 채 고민하던 라일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곤 못내 걱정된다는 시선을 보내기에 해진은 짤막하게 의사의 권유라는 말을 덧붙여야 했다.

“일단 전부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머뭇거리던 라일이 그제야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하나둘 드러나는 진실에 해진은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특히 일부러 소송을 질질 끌고 있다는 소리엔 저도 모르게 팔을 쓸어내려야 했다.

“추워?”

그걸 뭐라고 이해했는지 그가 놀라서 담요를 들고 왔다. 슬슬 따듯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날씨인데도 라일은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저를 감싸는 파란 담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해진은 결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을 알면서도 소리 내 물어야 한다고 느꼈다.

“……각인은 왜 숨기려고 했어요?”

담요를 둘러 주던 손길이 잠깐 멈칫한다. 그러나 이내 자연스럽게 목 근처를 꽁꽁 여며 주며 라일은 대답했다. 가리는 것 하나 없는 진심이라는 듯.

“네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해진은 의심을 자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쉽지는 않았다. 그가 보기에 최근 자신은 묘한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이미 온기에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린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어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제가 파란색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수많은 담요 중에 하필 파란색을 콕 집어 들고 온 라일에게 따지듯 물었다. 선물 받았던 목도리도 기억에서 떠다닌다. 그러나 퍽 의뭉스럽게 입매를 비틀었던 그는 그걸 다 이해한다는 듯 슬쩍 한쪽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그냥,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

“…….”

그러나 속으로는 못내 불안한지 슬쩍 페로몬이 새어 나왔다.

“이런, 미안.”

허공에 나오는 그것들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해진이 시선을 옮기자 나지막한 사과가 돌아온다. 빠르게 몸 안으로 갈무리되는 그 페로몬의 궤적이 오늘따라 눈에 밟혔다.

“그거 하지 마세요.”

분명 아까 라일이 페로몬을 빠르게 갈무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놓고, 어처구니없는 충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거?”

눈을 슬쩍 내리깔며 고민하던 라일이 고심 끝에 되물었다. 혹여 해진을 챙기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닐지 불안한 얼굴이었다.

“페로몬 갈무리하는 거, 하지 마세요. ……적어도 제 앞에서는.”

다만 한번 말을 내뱉고 나니 이게 옳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해진은 감정에 호응하듯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제 페로몬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열성이라도 노력을 거듭하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너무 늦게 발현한 탓인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라일은 각인까지 했으면서 저리 흘러나오곤 하는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었다. 분명 읽은 서류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건 공평하지 않았다. 라일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해진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페로몬을 숨길 수 있으리라. 얼마 전까지는 그의 페로몬이 무슨 내음인지도 잊고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면 매번 자신만 감정을 들켜 버리지 않는가.

“괜찮겠어?”

“네.”

다짐하듯 해진은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런 그를 묘하게 내려다보는 라일의 눈길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미 제 주변에는 이 복잡미묘한 심정이 퍼져 나가고 있을 텐데, 역시 불공평하다.

“알았어.”

그 순간 익숙한 숲이 침대 위를 침범했다.

“……불편하면, 말하고.”

이번에는 미처 대답하지 못한 해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뻗어 오는 애정에 갑자기 귓가가 홧홧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위치한 곳 바로 밑부분이 이상하게 뜨겁다.

가늠하듯 해진의 안색을 살피던 라일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집어 해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편하게 쓰도록 해.”

상자를 보자마자 무언지 알 수 있었다. 일전에 라일이 쓰러지던 날 그에게 주려고 했던 물건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가늠하던 해진이 이번엔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를 열었다. 본 적 없는 최신 기종의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낡아서 답답한 제 휴대폰을 그새 또 보고 마음에 걸려 했던가.

“……필요 없다니까요.”

다시 툴툴거리듯 말이 튀어 나갔다. 이 복잡한 심경을 대체 어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그러나 그때처럼 라일이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괜히 고개를 들기 어려워서 휴대폰을 꺼내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어라 더 말할 법도 한데 라일은 같이 침묵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 신경이 그쪽에 집중되는 바람에 사락사락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을 한참이나 헤집던 손가락이 조금씩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엔 뒷덜미를 한번 진득하게 쓸어내리다가 이윽고 슬쩍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필요 없다며 거부하던 해진이 새로운 휴대폰을 온종일 매만지게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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