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이 방은 뭐죠?”
“어머니의 취미 방으로 쓰던 곳이야. 지금은 그냥 보존만 하고 있어.”
최근 해진은 무료한 나머지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날씨가 슬슬 풀리고는 있었으나 아직 깁스 때문에 바깥 활동은 힘들었다. 그리고 그 깁스 핑계를 가장 많이 입에 담는 라일이 아직 오래 떨어질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제 상태를 숨기고 싶어 했으나 페로몬을 제어하지 않기로 한 뒤로는 속속들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게 저택 탐방이었다. 아직 외관 쪽은 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차라리 아직 구조도 잘 모르는 본관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걸음을 떼고 보니 베르무스 가족들의 너무 내밀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둘러보고 싶다는 소리에 마크도 라일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기에 가볍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사적인 공간이 계속 이어졌다.
“…….”
지금도 하얀 천으로 온 가구가 덮인 방에 들어서니 뜻밖의 정보가 들렸다. 차마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해진은 라일의 눈치를 살폈다. 오래도록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방의 공기는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하늘거리는 커튼이 달린 커다란 창이 있었고 그곳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부연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모처럼 저택을 둘러보겠다는 소리에 가장 의욕적인 건 라일이었다. 아예 투어 가이드를 자처하며 해진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다. 대체 왜 저리 들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묘하게 들썩이는 것 같은 그의 페로몬을 관찰하던 해진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 곁에서 책을 보곤 했지.”
“……어릴 때요?”
“그래.”
내밀한 공간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의 과거 이야기를 접할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과거형이다.
덕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걸 발견한 기분마저 들었다. 라일에게도 부모님이 있으리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이토록 생경하게 알게 될 줄이야.
“왜 그런 표정을 하지, 해진?”
“그냥요.”
찾아왔던 사람도 분명 삼촌이라고 했다. 풍기는 뉘앙스로 봐서는 부모님이 둘 다 돌아가신 모양이다. 아직 젊디젊은 라일의 나이를 생각하면 양친을 퍽 일찍 여읜 거겠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된 해진은 의기소침해졌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라일에게 과거를 더듬게 해야 하는 걸 알았다면 조금은 조심했을 터다.
그게 퍽 그리우면서도 아픈 일이라는 걸 해진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오늘은 이만 쉴까 봐요.”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라일이 조심스럽게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손이 이렇게 닿을 때마다 해진은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금방이라도 그 온기에 아양을 부리듯 기댈 것만 같아서.
어딘가 웃음기를 머금은 라일이 차분하게 제안했다.
“다음 방까지만 보고 가지 그래.”
“네, 뭐…….”
이 저택 투어에는 나름의 계획까지 있었나 보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서 오밀조밀하게 뭉치는 서로의 페로몬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한 모양이었다.
“이 방이야.”
“어……, 여긴……?”
바로 옆 방으로 향한 라일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주었다. 본관 이쪽 구역엔 같은 크기의 방이 늘어서 있었다. 각각의 방은 문을 열 때마다 그 용도에 따라 실내장식이 사뭇 달랐다.
이번에 연 방 안에도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안의 광경이 꼭 사진처럼 해진의 시야에 박혀 들었다.
방 곳곳에는 편히 앉을 수 있는 소파와 빈백이 늘어서 있었다. 음료를 가지러 멀리 갈 필요 없게 한쪽에는 전면이 투명한 유리로 된 냉장고가 들어서서 시원한 맥동을 냈다. 안에는 간단한 물과 음료수가 잔뜩 들어 있었다.
정면의 벽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몇 개나 설치되어 있었고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듯 빔프로젝터용 스크린도 돌돌 말린 채 천장에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해진이 익히 아는 기계도 세팅이 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거듭된 항의 끝에 제 발로 걷게 된 해진은 목발을 짚으며 홀린 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라일이 질문에 대답했다.
“네 취미 방이야. 해진.”
분명 필요 없다고 했으나 해진은 라일이 선물한 새로운 휴대폰을 아주 잘 가지고 놀았다. 녀석이 아닌 척하고 싶은 건 잘 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시간이 생기면 그는 어느새 새롭게 얻은 기계를 재밌게도 탐구하곤 했다.
마크 말에 의하면 예전에 선물했던 태블릿도 조심스럽지만 아주 잘 가지고 놀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해진은 이런 류의 물건에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어제는 녀석이 어떤 게임기 리뷰를 보고 있던 걸 발견했다. 침대 위에서 스르륵 잠든 녀석을 추스르다가 아직 켜져 있는 휴대폰 화면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저택이 갑갑하고 심심한 걸 라일은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굳이 나가겠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가 라일의 불안 때문이라는 것도.
본래라면 능숙하게 그런 기색을 감춘 뒤 녀석이 외출이라도 하게 두고 싶었으나, 더는 페로몬을 숨기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여의치가 않았다. 이 불안함만큼은 라일의 의지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한번 준비해 보았다. 해진에게 조금이라도 취미라는 걸 만들어 주고 싶어서.
다행스럽게도 해진은 생각 이상으로 그의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멍하니 게임기 앞에 주저앉아서 그것들을 매만지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보니 꽤 앳돼 보이는 그 옆선을 보면서 라일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녀석에게 다가갔다.
“마음에 드나?”
“…….”
저도 모르게 손바닥만 한 게임기를 쥐고 이리저리 눌러 보던 해진의 손이 멈칫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있었으나 그 동그란 눈이 이리저리 난처하게 굴러다니는 걸 라일은 알고 있었다. 치미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는 모니터 근처의 벽을 옆으로 열었다. 벽으로 보이게 설치한 수납장이었다.
안에는 게임기에 호환되는 각각의 게임 카트리지들이 말 그대로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들어 있었다.
“게임 취향까지는 아직 알 수 없어서, 그냥 다 준비해 봤어.”
“…….”
흔들리는 해진의 눈동자에 묘한 열기가 엿보인다. 그 솔직한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면서 라일은 조심스럽게 해진에게 다가갔다. 어린아이처럼 한번 쥔 게임기를 놓지도 못한 채 해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라일이 천천히 그를 품에 끌어안을 때까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왠지 지금이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에게 장미를 선물했던 그날처럼. 그래서 라일은 제 품에 폭 들어와 안긴 해진의 귀에 속삭이듯 물었다.
“마음에 들어?”
“……네.”
부끄러운지 해진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그날처럼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만큼은 라일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
“밥은 먹고 하셔야 한다고 도련님이 단단히 일러두고 나가셨습니다. 아시겠죠, 브라이트 씨.”
“……네. 주의할게요.”
옆에 과일을 갈아 만든 주스를 놓아 주며 마크가 짐짓 엄하게 말했다. 덕분에 게임에 열중하던 해진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취미 방을 선물 받은 지 고작 며칠 만에, 이곳은 해진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휴대폰으로 열심히 정보를 찾아보고 있던 걸 들킨 모양이었다. 사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심심해서 이리저리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저도 모르게 눌러 본 게시글이었다.
매일같이 붙어 있는 데다가 해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는 라일이니 아는 것도 당연했다. 심지어 그걸 보던 것이 선물 받은 휴대폰이라 조금 민망했다. 필요 없다고 말한 것치곤 너무 잘 활용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주 오랜만에 가슴에서 불씨가 살아났다. 라일이 준비해 준 게임기는 조금이라도 게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색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해진은 굳이 말하자면 게임에 관심이 지대했던 사람이다.
거기에 벽면 가득 채운 게임 카트리지라니. 죽은 줄 알았던 의욕이 대뜸 고개를 쳐드는 건 거의 불가항력이었다.
“…….”
형과 함께 이 게임기의 구형 모델을 가지고 아웅다웅했던 기억을 떠올리던 해진은 마크가 가져다준 생과일주스를 조심스럽게 입에 머금었다. 향긋한 딸기향이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상담을 계속 이어 가면서 해진은 슬픔도 이렇게 의연하게 머금는 법을 알아 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의욕적으로 취미 활동을 즐기는 걸 며칠 지켜보던 라일은 조금씩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시간을 늘려 갔다. 아무래도 그간 버려둔 일이 너무 많다는 모양이었다.
“참. 도련님이 이곳에서 TV 방송도 볼 수 있다던데 연결하는 법을 모르겠더군요. 브라이트 씨는 아십니까?”
모든 물건이 잘 작동하는지 관리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마크는 정중하게 설명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해진은 얼른 들고 있던 주스를 내려놓고는 엉금엉금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몇 가지 연결선을 바꾸고 리모컨으로 이런저런 설정을 매만졌다. 순식간에 캐릭터가 통통 튀고 있던 화면이 뉴스로 바뀐다.
“이렇게 하면 돼요.”
“……나중에 좀 적어 놔 주시겠습니까?”
“네.”
“기계 다루는 게 아주 능숙하시군요.”
“……아니에요.”
안경을 고쳐 쓴 마크가 해진이 들고 있던 리모컨을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희끗희끗한 그의 눈썹이 곤란하게 찡그려지기도 했다. 온종일 이곳에서 너무 야무지게 시간 보내는 걸 들킨 것 같아서 해진은 모르는 척 음료에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