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마침 틀어 둔 뉴스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베르무스 기업이 친족 경영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오늘 라일 베르무스 회장은 이와 같은 기자회견을 하며 소회를 밝혔는데요. 지금까지 지속해 오던 시대착오적인 경영 방식을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같이 보였습니다. 한편 일각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보이자 퍽 기이한 기분이었다. 덤덤하게 준비한 자료를 읽는 라일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해진도 천천히 같이 눈을 깜빡이며 화면에 빠져들었다.
웅성거리는 기자들의 소음을 묻어 버릴 정도로 큰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어…….”
“흐음. 드디어 속이 다 시원해지겠군요.”
곁에서 같이 뉴스를 보던 마크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늘 인자한 그의 모습만 보던 해진은 조금 놀라서 습관적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좋은 일인가요?”
“그럼요.”
눈치를 살피는 그를 알아차렸는지 마크가 다시 눈가의 주름을 보이며 웃었다. 최근 들어 가장 그에게 많이 보이는 웃음이었다. 라일과 마크 그리고 모든 사용인까지 해진을 보면 일단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그가 아직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이.
“브라이트 씨. 부디 앞으로도 집처럼 이곳에 편히 있어 주세요. 모두가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정말이라는 듯 마크는 조용조용한 말씨로 몇 번이나 해진에게 당부했다. 꼭 이렇게 눈치부터 볼 필요 없다는 듯이 말이다.
까만 두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해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요새 들어 귓바퀴가 간질간질해지는 일이 너무 잦은 것 같았다.
***
드디어 깁스를 푸는 날이 다가왔다. 이번 깁스는 저번보다 더 버거웠던 나머지 풀어내는 순간이 유독 개운했다. 이걸 핑계로 라일이 걷지도 못 하게 하는 데다가 씻을 때는 유난을 부렸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욕실에서까지 제 수발을 드는 라일을 떠올리던 해진은 몰래 귓가를 붉혔다. 분명 바싹 마른 건초처럼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얼마 전이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브라이트 씨. 회장님이 본래 마중을 오시려고 했는데 긴급한 사안이 생겨 조금 늦으실 거라고 말씀 남기셨습니다.”
“아……, 네.”
진료를 받고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다가왔다. 깁스 없이 디디는 걸음이 퍽 낯설게 느껴진다. 발목이 아프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가벼운 기분마저 들었다.
“잠깐만 이곳에 계시면 금방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혹 병원이 불편하시다면 먼저 저택에 돌아가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애초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할 라일이었다. 그간 해진을 이리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게 더 힘든 일이었으리라.
그런데 이상하게 그 빈자리가 눈에 밟혔다. 그간 너무 붙어 다녀서 쓸데없이 익숙해져 버린 게 분명하다. 하필이면 해진이 다시 저택을 나가기 직전 그를 피하곤 했던 라일의 모습도 생각났다. 자신의 거부 때문에 몸이 무너져서 그랬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꼭 그때처럼 이 빈자리 때문에 울렁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가만히 고민에 빠져 있던 해진은 충동적으로 비서에게 묻고 말았다.
“저, 혹시……. 회사에 가서 기다려도 되나요?”
비서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네.”
소파에 얌전히 앉으며 해진은 곧 후회했다. 그의 집무실까지 들어오고 나니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라일의 회사에 찾아오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변덕처럼 나온 말은 요즈음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때문에 자연스럽게도 튀어나왔다. 분명 라일은 이제 계약 따위 없이도 곁에 있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그의 사적 공간인 본관을 침범한 것처럼 회사에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기다릴 거라면 불편한 병원보다는 이곳이 나을 거라는 그럴싸한 핑계도 있었다. 먼저 저택에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애써 외면했다.
다만 막상 오고 나니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꼭 라일이 대체 어디까지 받아 주나 시험이라도 하는 듯 구는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해진.”
집무실에 들어선 라일은 한껏 놀란 표정이었다. 한 번도 그가 이런 표정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해진도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마주했다.
문을 연 것과 거의 동시라고 할 정도로 라일은 다급하게 해진을 향해 걸어왔다. 멍하니 있는 사이 너른 품에 갇히고 말았다.
“왜 진작 연락하지 않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곳에 오면서 비서에게 자신이 왔다는 걸 바로 알리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안 그래도 바쁜 라일이 하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당장 달려올까 봐 우려된 탓이다.
과연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을 하니 라일의 페로몬이 대번 불안하게 흔들렸다.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요.”
아직도 품에 갇힌 채라서 해진은 웅얼웅얼 대답했다. 제 숨이 라일의 빳빳한 양복 천에 닿아 누그러지는 감각에 심장이 뛴다. 얼마든지 뒤로 물러날 수 있는데도 해진은 그냥 꼿꼿하게 이 자리에서 버티는 걸 선택했다. 언제부터인가 습관처럼 이리 버틸 줄 아는 두 다리였다.
“흠…….”
진짜로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데 라일은 계속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아마 이 가까운 거리 때문에 해진의 페로몬도 썩 안정적인 느낌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해진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세세히 표정을 살피려 했다. 볼에 닿는 시선이 집요해질수록 해진의 마음은 한층 요동쳤으니 썩 효과 있는 추궁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해서……. 방해되었나요?”
“아니. 전혀.”
방해가 아니라는 말은 사실인지 라일의 눈매가 살포시 접혔다. 금빛으로 빛나는 그 윤곽을 해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게 분명한 라일이 더 사르르 웃으며 해진의 볼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다리는 어때.”
“가뿐해요.”
“잘됐군. 기념으로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예전에도 깁스를 푼 해진에게 라일은 같은 걸 물었다. 딱히 외출을 생각하고 나온 건 아니었기에 해진은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비슷한 상황 때문인지 함께 갔던 호수가 문득 머리를 스친다.
이제 눈이 다 녹았겠지. 어렴풋한 예감으로 해진은 모처럼의 외출 장소를 결정했다.
“호수에 가고 싶어요.”
그러나 그 순간 라일의 페로몬이 급격하게 어두운 기색을 띠었다.
“……어…….”
“…….”
당황해서 얼빠진 소리를 흘리는 해진을 보고 라일은 습관적으로 페로몬을 갈무리하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이내 형언할 수 없이 불안하게 요동치는 것들을 여과 없이 내보내기 시작했다.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해진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삽시간에 말랑하던 분위기가 살얼음처럼 깨어져 나간다.
“그게…….”
먼저 물어봤으니 외출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건 아닐 텐데, 왜 그러는 걸까. 얼핏 호수가 문제인가 싶어서 해진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라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곤 한참 만에야 나오는 말끝이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시간이, ……시간이 조금 필요해.”
“시간이요?”
“응. 너무 오래는 아니고, 3개월 정도. ……진행 중인 일이 많아서 그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
이제는 그의 페로몬이 까만 절망을 머금고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차분히 모든 걸 정리라도 하는 듯한 그의 말도 이상했다. 이제 보니 저를 슬며시 끌어안고 있던 두 팔도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해진이 못내 두렵다는 듯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해진이 그의 옷깃을 잡고 되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호수에 가고 싶다며. ……이번엔 혼자 못 보내.”
한숨처럼 파리하게 말하는 라일은 눈가를 잔뜩 찡그린 채 해진을 내려다보았다. 그 떨림이 오늘따라 퍽 따갑게 피부에 닿는 것 같았다. 서둘러 지금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내뱉을 정도로.
“그냥 호수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절망에 빠진 소리가 해진을 휘청이게 했다. 이대로 해진이 어딘가로 사라질까 봐 라일이 단단한 두 팔로 붙잡고 있는데도 그랬다.
괜히 목이 메는 심정이 된 해진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같이 소풍이 가고 싶어서…….”
“소풍?”
“네.”
소풍이라는 낯부끄러운 소리까지 입에 담고 나서야 날뛰던 그의 페로몬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표정으로 라일은 몇 번이나 되묻는다.
“정말 그냥, 소풍?”
“네. 그냥, 피크닉 매트를 펴고, 샌드위치 먹고 그런 소풍이요.”
“…….”
“눈도 다 녹았을 거고……, 그래서…….”
그냥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입 밖으로 내보내려는 찰나였다. 라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고요한 검은 눈동자가 한순간도 저를 떠나지 않는 걸 보고 나서야 라일은 진정할 수 있었다.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여전히 해진의 마음이 호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줄 알았다.
모처럼 해진이 그의 공간을 궁금하게 여긴 날이라 절망이 더 거세게 그를 덮쳤다. 마음이 평소보다 붕 떠오른 만큼 바닥으로 처박히는 높이는 깊었다.
괜히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고 라일은 두 손으로 잡고 있던 해진을 끌어당겨 품에 넣었다. 반사적으로 이런 불안함을 숨기려는 몸을 반대로 제어해 솔직히 드러나게 했다.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그 탓인지 해진은 순순히 이런 그를 내버려 두었다.
한참이나 녀석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켠 뒤에야 라일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금 해진이 처음으로 뭔가를 같이 하자고 했다는 사실을.
바닥을 딛고 일어선 두근거림이 다시 허공을 부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