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95화 (95/101)

#95

“……날씨를 좀 보고 정할 걸 그랬군.”

쏴아아 비 내리는 소리에 서로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해진이 제안한 외출이 뭔지 깨닫고 나서야 라일은 성급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날 당장이라도 오고 싶었으나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아직은 찬바람에 쉬이 기침하는 해진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 날 호수 근처에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출발할 때는 그럭저럭 흐린 날씨였는데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매서운 비가 내렸다. 원래도 헤비레인은 날씨가 이 모양이었지만 라일은 속으로 욕을 삼켜내야 했다. 차라리 날이 화창할 때를 기다릴 것을.

“괜찮아요.”

그러나 해진이 그에게 살짝 붙어 앉으며 이리 말하자 마음이 단번에 사르르 풀렸다. 아마 빗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 그랬을 텐데도 가슴이 설렌다.

그는 묵묵히 가까워진 거리를 내색하지 않고 담요를 집어 들었다. 그걸 해진의 어깨에 둘러 주면서 혹시 비가 새는 곳은 없는지 꼼꼼히 천장을 살폈다.

호수 근처에 준비시킨 건 거대한 텐트였다. 텐트라고는 하나 안에 철골 구조물까지 넣어 만든 튼튼한 물건이었다. 해진이 가족과 왔다던 호수는 인적이 드물어서 통제하기가 쉬웠다. 덕분에 예전에 함께 갔던 호수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걱정할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해진이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뎠던 호수 반대편이 눈에 들어왔다.

붕 들떠 있던 마음이 다시 축축한 잔디밭에 처박혔다. 반사적으로 라일은 곁에 있는 해진의 손을 꽉 쥐고 말았다.

“…….”

손에 가해지는 압력이 퍽 거세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어도 말이다. 갑작스럽게 또 불안하게 동요하는 라일을 살피던 해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풍을 오는 내내 라일은 이상하게 들뜬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 이런 울렁이는 페로몬을 쏟아냈다. 그 변화가 유독 극심해서 해진은 곤란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라일이 아까부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같이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조금은 무신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얼마 전 딱 한 걸음을 아쉬워했던 그 자리를 해진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정확히 가족과 앉아 있던 자리였다. 그것까진 말한 적이 없었는데 놀랍게도 라일은 이곳에 이런 멋진 텐트를 준비해 두었다. 아버지가 봤다면 아주 눈독을 들였을 만한 장비들이다. 이 호수에서 가장 앉기 좋은 자리니까 벌어진 우연이겠지만 해진은 이 우연이 썩 마음에 들었다.

둘은 한참이나 텐트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침묵했다.

호수는 쉴 새 없이 파란을 일으키며 울렁였다. 바람이 없는 날이라 빗소리는 무척이나 규칙적으로 땅을 울렸다. 촉촉하게 젖은 잔디가 조금씩 푸르게 바뀔 조짐을 보였다. 비단 눈만 녹아내린 게 아니라 호수는 다시 푸르게 빛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거센 비를 맞으면서도.

“해진.”

“네.”

“왜 남아 있는 짐이 그리 적은지, 물어도 될까.”

그들의 묘한 침묵을 깬 건 라일이었다.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질문인 것처럼 해진의 트렁크 모양까지 정확히 묘사하면서 그 이유를 물었다.

덩달아 형이 물려준 그 트렁크의 앙증맞은 모습을 떠올리던 해진은 고민 끝에 부러 가벼운 말투로 해답을 주었다.

“도무지 짐을 정리할 정신이 없었어요, 그땐. 당장 돈은 필요하고 부모님 곁에서 떨어질 수는 없고.”

그도 막 퇴원한 몸이지만 도무지 그 차가운 병실에 부모님만 두고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나마 집을 파는 계약을 할 때는 부모님의 지인이 대신 병실을 지켜 주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부탁도 한두 번이지 마냥 그 온정에 기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의사들이 성의 없이 부모님을 버려둘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해진의 앳된 얼굴을 보며 가망이 없다고 말하던 그들이었으니까. 갑작스러운 비극에 내동댕이쳐진 해진은 몸만 다 자랐다 뿐이지 어른이 아니었으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창고 대여 같은 게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사실 그 집을 파는 것도 아는 분이 업체를 대신 섭외해 주신 거였거든요.”

무작정 짐까지 한 번에 처분해야 한다는 소리에 그들은 발로 뛰며 열심히 정보를 알아다 주었다. 그리고 사실 창고 대여를 알았다고 한들 사용하진 못했으리라. 짐을 정리하고 매달 대여료가 나가는 것도 감당하지 못했을 테니.

“보험사가 보상금에 이의가 있다면 소송을 제기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어차피 잃어버릴 짐들이었을 거예요. 그만큼 돈을 더 받았으니까, 할 수 없죠.”

“…….”

늘 그랬듯 해진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라일은 귀를 기울였다. 그 집중이 못내 마음의 위안이 된다. 덕분에 그는 추억에 잠긴 채, 그래도 집에서 챙겨 나올걸 하고 후회했던 물건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얼마 전에 라일이 선물해 준 것과 같은 기종의 낡은 게임기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게 추억을 퍼 올리다 못해 더는 끌어 올릴 게 없을 때까지 해진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 이야기가 잦아들 무렵, 묵묵히 듣던 라일은 그 끝에서야 조용히 물었다.

“혹시 물건을 되찾고 싶진 않나?”

“할 수만 있다면 당연하죠.”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해진은 바로 대답했다. 불가능할 걸 알지만 가능하다면 해진은 그 집을 모두 되찾고 싶었다. 팔아 버린 뒤로는 일부러 그쪽 동네는 피해 다녔다. 혹시 새로운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다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그렇군.”

이렇게 길게 말하는 내내 라일은 줄곧 한 손으로는 해진을 붙잡고 있었다. 여전히 못내 두렵다는 듯이. 이제야 의식되는 바람에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다시 라일의 감정이 요동쳤다. 덩달아 요동치는 제 속을 가만히 가늠하던 해진이 툭 한 마디를 흘렸다.

“추워요.”

“응.”

당연하다는 듯 라일은 담요를 하나 더 해진에게 둘러 주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해진의 안색을 살핀다.

춥다는 소리를 좀처럼 하지 않는 해진이라 덜컥 걱정되었다. 혹시 싫어하진 않을지 노심초사하면서 그는 해진을 달랑 들어 제 품 안으로 넣었다. 이렇게 온몸으로 녀석을 부여잡고 싶은 욕심도 조금 곁들인 자세이기도 했다.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는 대신 해진은 익숙하게 그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 순순한 몸짓에 라일은 어쩐지 눈물이 났다.

“사실, 이 근처를 전부 사들였어. ……네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고해성사라도 하는 말투로 그는 귓가에 속삭였다. 춥다는 건 핑계였는데 막상 품에 안기니 이리도 포근한 감정이 들었다.

뒷말이 생략되어 있었으나 라일이 무슨 심정으로 이곳을 샀는지 해진은 문득 이해할 수 있었다.

“이대로 보존했으면 좋겠어요.”

“응.”

“그 예쁜 호수처럼 만들지 말아 주세요.”

“응. 그럴게. 이대로 있을 수 있도록 할게.”

뜬금없는 소리에도 라일은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연거푸 다짐해 주었다.

다시 빗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세게 호수를 범람시킬 듯 퍼붓던 비가 조금씩 잦아든다.

“여기.”

춥단 소리가 계속 신경 쓰이는지 라일은 손 닿는 곳에 있던 간이 카트를 끌어왔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코코아 같은 것들이 보온 팩에 담겨 있었다.

손에 들어온 코코아 잔을 해진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냄새부터 달곰함을 풍기는 진한 코코아에는 토끼 모양의 마시멜로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침몰하는 토끼의 얼굴을 보던 해진은 얼른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몇 번을 그렇게 단맛을 만끽하니 마시멜로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저택에서 코코아를 먹을 땐 언제부터인가 당연하게도 마시멜로가 늘 띄워져 있었다. 그간 그걸 마시면서 해진은 단 한 번도 마시멜로가 아쉬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사라지는 그것들이 퍽 아쉽게 느껴졌다.

그런 해진을 줄곧 응시하던 라일이 조심스럽게 코코아 잔에 톡톡 마시멜로를 넣어 주었다.

“더 줄까?”

“…….”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꼭 그가 내려놓은 마시멜로가 코코아가 아니라 심장 위에 톡톡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울적함만 곱씹을 거라 여겼던 비 오는 날의 소풍이 이상하게 따듯하게만 느껴졌다.

떨어지는 빗방울만큼 셀 수 없이 많은 라일의 애정이 텐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언제고 저 무거운 비처럼 해진에게 애정을 퍼붓겠다는 것처럼.

호수처럼 거대한 충동이 해진을 집어삼켰다.

“키스해 주세요.”

이번에는 대답도 없이 라일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한 손으로는 해진의 턱을 살짝 쥔 채 고개를 틀었다. 손에 있던 코코아 잔이 어느새 라일에게 옮겨 갔다.

입술이 마주치는 순간, 잔이 테이블에 탁 놓이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

형의 기일이 다가온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해진은 몸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해진.”

촉, 하고 볼에 옅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게 못내 부끄럽지만 해진은 그냥 슬쩍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호숫가에서 충동적으로 군 이후로 라일의 애정 표현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아니, 사실 그걸 받아들이는 해진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걱정된다는 듯 그를 안아 주는 라일의 가슴에 무심코 얼굴을 푹 파묻고 말았으니까.

“괜찮아?”

꼭 해진이 왜 갑자기 우울해졌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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