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이맘때에는 늘 그랬듯이 무거운 비가 연일 내렸다. 봄을 알리는 비가 이 도시에는 퍽 유난하게도 내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해진은 사고가 난 이래로 매년 이 시기를 아프게 보내야 했다. 비가 와서 통증을 자아내는 발목과 가슴 때문에.
조금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고가 났던 밤을 생각하니 자꾸만 기운이 빠졌다. 저택에 들어온 뒤로 해진은 늘 외롭게 이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어쩌다가 이 시기에 라일의 러트라도 겹친다면 더더욱 고통스러웠고.
그러나 매번 해진을 더 아득하게 만들곤 하던 라일은, 이제 그를 따듯하게 안아 주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해진은 덥석 그런 라일의 허리를 두르며 마주 안았다. 움찔거리는 그의 몸이 피부 아래로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자상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불쑥 솟았다.
이제 다시는 그 어두운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곧 형의 기일이에요.”
“……알아.”
망설이던 라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번도 마주 안아 오는 일이 없던 해진이 이러는 걸 보니 못내 힘든 모양이라 짐작하면서.
“납골당에 같이 가 주세요.”
“그래.”
있는 힘껏 해진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녀석이 어디로 침잠하듯 반드시 건져 올리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오랜만에 우울하게 가라앉은 해진의 기분 때문에 라일 또한 덩달아 비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
***
“이쪽이야.”
밤새 악몽에 시달리는 듯하던 해진은 기운 없는 얼굴로 라일의 인도를 따랐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밖엔 할 수 없어서 라일은 전전긍긍해야 했다. 악몽에 식은땀을 흘리는 해진을 발견했을 땐 치미는 두려움에 질식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할 정도였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납골당의 위치가 바뀐 덕에 해진이 익숙한 서러움을 곱씹을 필요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여기예요?”
“응.”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해진의 얼굴엔 희미하지만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간 가족을 혼자 찾아가며 얼마나 서러웠을지 짐작하다 보면 라일에겐 자연스럽게 자괴감이 치솟았다.
혼자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해진의 자취를 쫓다 보니 자연스럽게 녀석이 가족들의 유해를 따로 안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컸으리라.
그래서 미리 가족들을 함께 안치할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고 허락을 구했다. 녀석은 아주 오랜만에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복잡함이 묻어나는 페로몬이 맴돌긴 했으나 해진은 끝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적한 공원에는 작은 건물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각 건물이 한 가족을 담을 수 있도록 설계된 추모 공원이었다. 그중 가장 정갈한 곳을 고른 라일은 이곳에 해진의 가족을 옮겨 두었다.
형의 기일에 함께 가자는 해진의 말이 너무나도 애처로워서 라일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막상 당일이 되자 덜컥 겁이 들었다. 과연 제게 해진의 가족을 보러 갈 자격이 있는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 앞에서 녀석이 다시 그날의 우울을 곱씹으면 어찌하지.
그러나 그 또한 라일이 지고 가야 할 업이었다. 차마 변명할 수도 없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선고를 받는 죄수의 심정으로 해진과 함께 이곳에 왔다.
“…….”
납골당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 해진에게 차마 어떤지 감상조차 묻지 못했다. 브라이트 가의 유골함이 모여 있는 쪽으로는 시선조차 들어 올리기 힘들었다. 날것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페로몬이 너무 새어 나오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예쁘네요.”
“……그래.”
은은한 빛이 감도는 납골당 내부는 아주 정갈한 모양이었다. 장례식장에 홀로 도착했던 쓸데없이 화려한 화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그래서 해진은 라일이 정말 많은 신경을 기울여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천히 해진은 이 새로운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족들의 유골함을 보니 멍든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 온다.
그가 움직이는데도 라일은 입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고민 끝에 뒤를 돌아본 해진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와 주기로 했잖아요.”
“…….”
그제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 라일이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무어라 소개를 할까 하던 해진은 그냥 뒷덜미를 한번 쓸어내리며 말을 아꼈다. 사실 입을 열면 툭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떼기 힘든 것도 있었다.
조심스럽게 형의 유골함 곁에 놓인 두 번째 가족사진을 손끝으로 쓰다듬던 해진은 그대로 한참이나 속으로 그들의 평안을 빌었다.
형도 부모님도 전부 비가 거세게 오는 날 화장을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거운 빗물 때문에 그 연기가 하늘로 제대로 닿지 못했을까 봐. 그러나 괜찮으리라. 그들은 전부 이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었으니 반드시 하늘로 가는 길을 가볍게 찾아냈으리라.
혼자 찾아왔을 때보다 곁에 같이 숨 쉬어 주는 이가 있으니 조금 위안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라일도 부모님을 보러 갈 때 같이 가 드릴게요. ……필요하다면요.”
지금까지 애써 모른 척하던 주제지만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이 서럽고 무서운 길을 같이 걸어 준 게 그저 고마워서. 가족들이 다시 모일 수 있게 도와준 게 고마워서.
다만 라일은 조금 곤혹스럽게 해진의 표정을 살피며 뜻밖의 말을 했다.
“……난 부모님 기일은 따로 챙기진 않아. 하필 내가 태어난 날이라 얼굴을 비춰야 할 곳이 많아서.”
“아…….”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해진이 라일을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의 생일날 양친을 동시에 여의었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날을 내 생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덧붙인 말은 조금 차갑게도 느껴지는 말이었다. 괜한 아픔을 또 건드리고 말았다. 스스로의 경솔함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의기소침해진 해진은 라일의 구두 끝을 바라보며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괜찮아.”
먼지 하나 없는 그의 구두에 납골당 내부의 은은한 빛이 번져 있었다. 곤란하게 눈을 내리깐 해진은 한참이나 서툰 위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라일도 생일이 없는 사람이구나.
“저도 진짜 태어난 날은 언제인지 몰라요.”
“…….”
“그래서 가족을 만난 날을 제 생일로 정했어요.”
“잘했네.”
괜한 말을 해서 해진이 어두운 낯빛을 하게 만들었다.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며 라일은 녀석의 숙인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정말 그는 괜찮았다. 그 사실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친 건 더 어릴 때뿐이었으니까. 지금 그의 생일은 귀찮은 파티가 벌어지는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이 마음을 다한 녀석의 위로가 그저 고마웠다. 마치 있는지도 몰랐던 상처가 보듬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라일도 새 생일을 정해요. 없이 지나가면 너무 쓸쓸하니까.”
“그럴까.”
그저 뻣뻣하게 긴장하던 몸이 조금 나른하게 풀린다. 손바닥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자꾸 욕심이 생긴다. 라일은 해진의 뒤통수를 덮은 머리칼에 손가락을 욕심껏 밀어 넣었다가 엄지로 슬쩍 하얀 볼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런데 몽롱한 기분으로 그 따스한 감촉을 만끽하는 와중, 해진이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아……. 그런데 다른 가족들이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뭔가 주제넘은 조언을 했다는 티가 팍팍 나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퍽 이상한 말까지 하는 바람에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다른 가족? 나의?”
“……삼촌이 있잖아요.”
빌어먹을. 욕설이 대번 속을 맴돌았다. 그따위 놈도 가족이라고 생각했으니 해진이 그리도 상처를 받은 거구나, 한참 늦은 깨달음도 얻으면서.
지금까지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다니엘에 대한 분노가 다시 파르르 솟아오른다. 괜히 또 오해할까 라일은 이 기회에 분명하게 밝혀 두었다.
“이제 없어. 앞으로도 내 가족이나 친지라며 찾아오는 놈들이 있으면 무시하도록 해. 물론 다시는 네 앞에 그런 놈들이 나타나게도 하지 않을 테지만.”
길게 말했는데도 해진은 퍽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조심스럽게 이 심정을 정리한 그는 녀석도 익히 알고 있을 사실을 꼬집어 주었다.
“피만 섞였다고 다 가족이 아니지.”
“……맞아요.”
곰곰이 라일의 말을 곱씹던 해진은 조심스럽게 긍정을 흘렸다. 왜냐하면 그 말이 꼭 가족에는 핏줄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진의 가족이 더 특별한 것이라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잠깐 거둬졌던 라일의 큰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이제 자신은 조용히 있겠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다시 가만히 형이 영면에 든 작은 장소에 시선을 던진다. 정중한 장식들이 조금 놓여 있긴 해도 그 외에는 가족사진 하나뿐이라 여전히 휑해 보인다. 부모님이 있는 곳에는 더 넣을 수 있는 물건도 없었기에 텅 비어 있었다.
저곳을 더 채워 넣을 수 있는 걸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해진은 다시 속으로 형에게 인사를 고했다.
그 과정에서 애써 라일의 이야기는 에둘러 하고 말았다. 아직은 이 애매한 관계를 무어라 설명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에게 말을 붙이는 내내 신경은 온통 옆으로만 향해서 큰일이었다.
마음속에는 계속 무언가 희미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