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97화 (97/101)

#97

며칠이 쏜살같이 흘렀다. 마치 봄을 빨리 보고 싶어서 시간을 빠르게 감는 기분도 들었다. 어쩌면 납골당에 다녀온 이후 조금은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더 그리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게임기를 손에 쥐고도 멍하니 아무것도 안 하는 꼴을 몇 번이나 본 마크가 산책을 권했다.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서 해진은 선뜻 그러겠다고 길을 나섰다. 온실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돌아올 작정이었다.

가는 길에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외관의 한쪽 건물은 아예 대공사에 들어간다고 했다. 잠깐 그쪽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는 사이 또 다른 공사 현장이 시야를 차지했다.

“저기는 아직 공사 중이네요?”

“네. 아마 조만간 끝나지 싶군요.”

저택의 높다란 담장 너머에는 푸른 초원이 있다. 도시와 저택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너른 초원이었다. 지금은 아직 파릇함이 채 살아나지 않았으나 여름이 되면 탁 트인 경관이 볼 만했다.

얼마 전부터 그 초원 한편에는 높은 천이 빙 둘렸다. 무언가를 짓고 있는 것 같은데 꼼꼼하게 감싸인 공사용 천 때문에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서 마크에게 물었을 때는 필요한 건물이 생겨서 공사에 들어갔다고만 했다.

“점심 식사는 온실에서 드시겠습니까?”

이제는 조금 더울 정도로 느껴지는 온실의 공기였다. 새삼 날씨가 많이 풀렸다는 걸 체감한 해진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크가 말동무를 해 주려고 같이 와 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서 그랬나 보다.

“음…….”

아직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아서 미처 시간을 보지 못했다. 가만히 제 배 상태를 보던 해진이 점심은 간단히 넘어가기로 한다.

“점심은 그냥, 주스 한 잔이면 될 것 같아요. 아침을 너무 많이 먹어서요.”

“으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보셨잖아요. 저 진짜 많이 먹은 거.”

오늘따라 아침으로 나온 핫케이크가 이상하게 맛이 좋았다. 새로 바꿨다는 시럽 덕분인지 배가 불렀는데도 해진은 남아 있는 핫케이크 한 장이 아쉬워서 조금 욕심을 부렸더랬다. 덕분에 더부룩한 속이 한참 갔다.

그걸 아는 마크도 설핏 미소를 짓더니 대신 우유를 넣은 주스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그 자상한 미소에 덩달아 기분이 나아진 해진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하나 들고 의자에 자리 잡았다. 안쪽의 푸른 아치형 장식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라일은 이곳에 푹신한 소파를 하나 놔 주었다.

“참, 라일에게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금 오묘한 표정을 한 마크가 일단 그렇게 전하긴 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난한 라일의 상태를 저택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만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스프링클러 돌아가는 소리가 시원하게도 땅을 적셨다.

***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도 덧붙이셨다고 합니다.”

“……그런가.”

비서의 보고에 잠깐 멈칫했던 라일은 마저 손을 움직였다. 들고 있던 서류에 유려한 필체의 사인이 검은 궤적을 그렸다.

매일 점심이 되면 비서는 저택에서 온 연락을 보고한다. 당연히 전부 해진에 관한 보고가 주를 이루었다. 하필 오늘은 해진이 점심을 걸렀다는 보고를 받은 터라 비서도 퍽 심란한 얼굴을 했다. 최근 불안정했던 라일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보고를 받은 라일은 묵묵히 책상 위의 서류를 처리해 나갔다. 괜찮은 건가 싶어서 비서가 자리를 뜨려고 들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는 찰나였다.

마지막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덮은 라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

“오늘 남은 일정은 정리해.”

그러면 그렇지. 비서는 당장 저택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라일의 뒤에서 속으로 한숨을 삼켜냈다. 옥상의 헬기장에 얼른 연락을 넣는 것도 잊지 않으며.

***

서재 소파에 길게 누워서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던 해진은 다급하게 돌아온 라일을 곤혹스럽게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릴 때부터 역시 실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척추가 다 흐늘흐늘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가끔은 이렇게 서재를 찾곤 했다. 여기 와서도 결국 책은 안 보고 태블릿만 잡고 놀지만, 어쨌든 이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몰래 길게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해진은 조금 당황스러운 낯으로 라일과 마주해야 했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인데 이리도 서둘러 돌아오다니.

“해진.”

자연스럽게 다가온 그는 해진이 누운 소파 앞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급하게 일어나서 소파에 앉히려고 했으나 그가 만류했다.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아침이 아직 소화가 안 돼서 그래요.”

“알아.”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돌아왔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 페로몬을 마주하니 더 확연해진다.

라일은 짧게 대답하고는 그의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살가운 표현에 갑자기 손등에서 간지러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해진은 그걸 차마 빼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몸만 일으켰다.

정말 식욕이 없어서 굶은 건 아닌데 라일은 아직도 못내 걱정인가 보다. 뻣뻣하게 손을 내민 자세로 굳어 버린 해진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저녁은 잘 먹을 거예요.”

“고마워.”

물론 라일도 알고 있었다. 오늘은 해진이 딱히 식욕이 없어서 식사를 거절한 게 아니라는 것을. 다만 그가 신경 쓰는 건 요 며칠 계속 옅은 우울함을 가지고 있는 해진이었다.

납골당에 다녀온 이후로도 해진은 잘 먹고 취미생활도 잘하고 이따금 산책도 곧잘 했다. 매번 침실에만 처박혀 있지 않고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도 익혔다.

그런데도 이 희미하게 우울한 기운은 줄곧 녀석의 근처에 머물렀다. 형의 기일로 다시금 아픈 기억을 많이 떠올렸으리라.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얇은 천처럼 드리운 이 우울이 녀석에게 습관처럼 자리 잡을까 봐 그게 못내 걱정이었다.

“하나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사실, 좀 더 준비가 완벽해지면 말하고 싶었는데…….”

기분을 풀 만한 계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서 라일은 조금 섣부르게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정도는 미리 알려주어도 좋을 듯하다.

“지금 복지 재단을 하나 설립하려고 하고 있어.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봉사도 하고, 후원도 하는 그런 재단인데.”

“네.”

뜬금없는 소리에 해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라일을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해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는 그의 자세가 꼭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덕분에 그의 금발이 눈앞에서 살랑인다. 서재의 찬란한 샹들리에 빛을 받은 금발은 오늘따라 무척 눈부셨다. 아침이면 완벽하게 뒤로 넘기는 금발이지만 지금은 헬리콥터의 거센 바람에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뚫어져라 그 머리칼을 바라보던 해진이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생각보다도 더 부드러운 금발이 손가락에 감겨 온다.

“……재단 이름을 브라이트 복지 재단으로 하고 싶어서. 어떻게 생각해?”

“…….”

머리칼 사이를 노닐던 해진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그 손이 멈춘 게 라일은 못내 아쉬웠다. 한번 멈춰 버린 그 손은 꼼짝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자그마한 손이 계속 머리 위에 남아 있음에 안도한다. 차마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근처에는 복잡한 해진의 심사가 페로몬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사실 시간이 더 지나면 재단 이사장 자리를 해진에게 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맡기는 것도 좋겠으나 어떻게 받아들일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아마 라일이 주는 막대한 부를 지금까지도 제 것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해진의 성정을 봤을 때 그런 직함을 버거워할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니 일단 이름부터 이렇게 못 박아 둘 작정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을 기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왜요?”

한참 만에야 해진은 이렇게 물었다. 말끝이 살짝 젖어 있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라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색하게 머리에서 떠나지 못하던 손이 자연스럽게 어깨로 떨어진다.

“브라이트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계속 기억하도록 말이야.”

그냥, 네가 그걸 바랄 것 같아서.

해진은 한참이나 흔들리는 눈으로 라일을 바라보았다. 그 새까만 눈동자가 조금씩 물기를 머금는다. 그게 꼭 호숫가의 반질반질한 돌멩이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녀석이 작게 속삭였다.

동시에 입가에 사르르 내려앉은 그 옅은 미소에 라일은 속수무책으로 영혼을 빼앗겼다.

“고마워요.”

제게 닿는 그 순수한 애정에 해진은 가슴이 뻐근한 걸 실감했다. 파스스 흩어져 있던 마음이 이제는 염치도 없게 한껏 반짝이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

***

“지시하신 곳이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안쪽의 배치도 끝나서 오늘 바로 공개 가능할 정도입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준비가 끝났다. 집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던 라일은 무심코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아까 짤막하게 온 답장 외에는 해진에게는 새로운 연락이 없었다.

최근엔 일부러 시시콜콜한 문자를 보내면 한참 뒤에 어색한 답장이 오곤 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라일은 계속 잡다한 문자를 보냈다. 답장을 위해 한참이나 고민해 줄 해진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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