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다시 습관적으로 연락을 하려던 라일은 이내 휴대폰을 갈무리했다. 너무 많이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기 때문이다.
페로몬을 녀석의 앞에서는 숨기지 않기로 했으나 이 집착과 갈망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건 역시 힘든 일이다. 이런 제 마음이 무거워서 해진이 금방이라도 또 훌훌 뒤로 던져 버린 채 도망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살짝 쓸어내린 라일이 의자에 깊게 기댔다.
“내일 보러 가겠다고 해. 가장 해가 밝을 때.”
“알겠습니다.”
본래라면 브라이트 재단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말하려고 준비했던 곳이다. 시기가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해진이 기뻐해 준다면 몇 번이고 더 일정을 조율할 수 있었다.
녀석이 어여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 주었던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뜨는 기분을 애써 다독여 본다. 민감할 수 있는 문제니 만에 하나를 준비하는 건 언제나 부족하지 않다.
그래도 이번에도 부디 좋아해 주었으면.
***
“어디 가요?”
“저택 앞 초원에 공사 중이던 곳, 기억나?”
“아…….”
높다란 천막이 둘러싸고 있던 곳이 단번에 머리에 떠오른다. 어김없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한 그는 오늘따라 출근은 하지 않고 해진의 곁에 머물렀다. 어색하게 제 옆에 앉은 그를 의식하느라 게임을 몇 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플레이를 유심히 보는 라일 때문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그러다가 해가 가장 높게 뜰 무렵 라일이 그의 어깨를 감싸곤 속삭였다. 어딜 같이 좀 가자고. 그 목소리가 얼마나 간질간질하던지 해진은 무심코 그 숨결이 닿았던 귓가를 문질러야 했다.
괜히 볼이 홧홧했는데 밖으로 나간다는 소리에 조금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은밀하게 말할 일인가 싶어서 말이다. 생각해 보면 라일은 스킨십이 잦아지긴 했어도 먼저 과하게 뭘 요구하는 법은 없었는데도.
그러고 보니 페로몬 해소는 괜찮은 걸까. 때늦은 의문은 초원에 닿는 순간 호기심에 밀려 사라졌다.
“……무슨 건물이에요?”
저택이 어째 한산하다 싶었는데 사용인들이 전부 구경을 나와 있었다. 몇몇은 마치 거대한 행사라도 준비하는 양 바쁘게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기다란 밧줄이 있었고 그걸 잡아당기면 천막이 일시에 전부 아래로 내려가는 듯했다.
생각보다 거창한 상황에 해진이 묘한 긴장을 끌어 올리며 물었지만 라일은 의뭉스러운 표정만을 지었을 뿐이다. 그의 페로몬은 긴장과 설렘을 너무 빠르게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머리가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보고 너무 놀라진 말고.”
“…….”
놀라지 말라는 소리에 긴장만 한층 올라갔다. 그때 라일이 한쪽에 신호를 보내자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줄을 힘차게 당겼다. 그 순간 천 자락이 펄럭이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곤 아담한 주택 하나가 초원 위에 생겨났다.
“……아…….”
그 익숙한 모습에 해진은 무심코 탄성을 자아냈다. 가족들과 살던 집이 고스란히 이곳에 옮겨 와 있었다. 바짝 굳어 버린 해진의 뒤에 선 라일이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지탱해 주었다.
“원래 집을 다시 매수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아예 헐려 버렸더군.”
“…….”
그랬구나. 애써 그쪽 동네를 외면하는 사이 그의 추억은 이미 말끔하게 증발한 채였나 보다.
복잡한 심경이 된 해진은 곤란하게 코끝을 찡그렸다. 곁에서 라일이 이리도 설레는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오묘한 심정이었다.
주택은 분명 해진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곳에 있을 가족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그러나 이곳은 그의 빛바랜 추억을 담아내기엔 너무 새로운 곳이었다. 형이 자전거를 박아 움푹 파여 있던 창고 문도 없었고 해진의 키를 재곤 하던 문틀도 새로 칠한 페인트로 멀끔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해진은 자신이 되찾고 싶었던 건 이런 껍데기가 아니라는 걸 실감하고 말았다. 원하던 건 그저 과거의 시간이다. 이런 식으로는 되찾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제게 무언가를 주려는 라일의 정성이 따스했다.
차마 아무 말도 못 한 해진이 우물쭈물하고만 있자 라일이 다시 어깨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안에 들어가 봐.”
그런 해진의 심정이 뭔지 잘 안다는 듯.
그 목소리에 서린 기운이 퍽 묘해서 해진은 홀린 듯 안으로 들어섰다.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 새 계단을 올라가니 위화감이 진해진다.
그러나 안쪽에 들어선 순간 해진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자료를 찾기 힘들어서 안쪽 구조는 정확하지 않을지도 몰라.”
“…….”
“너무 거슬린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시간 날 때 차근히 고쳐 나가자.”
라일은 바짝 굳은 해진을 슬며시 끌어당겨 안쪽에 있는 소파로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그 손길에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낯익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시선은 한없이 떨리며 익숙한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에 가 못 박혔다.
형의 이니셜과 해진의 이니셜이 같이 새겨진 낡은 야구 글러브가 있었다.
“이걸, 이걸 다……, ……어떻게 구했어요?”
집 안은 자신 있게 내보인 것치곤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산처럼 쌓인 잡동사니 상자가 거실에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진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그곳에 놓인 잡동사니는 해진이 그토록 아쉬워하던 가족들의 추억 어린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브라이트 가의 집을 사들인 회사가 도산했어. 그래서 그쪽이 쓰던 창고도 압류된 채 오래 방치되어 있더군.”
“…….”
“좀 더 빨리 말해 주고는 싶었는데, 안쪽에 물건이 남아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아서.”
괜한 희망을 심어 주었다가 또 실망하게 할까 봐 라일은 그간 말을 아꼈다. 원래는 이렇게 무턱대고 비슷한 집을 지어 줄 생각도 아니었다. 다만 얼마 전에 창고 안쪽에 오래도록 박혀 있던 물건들을 기적적으로 되찾아서 계획을 조금 바꾸었다.
물론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은 전부 빠진 채였다. 그러나 라일은 이런 사소한 물건들이 해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희망을 품었다. 이것들을 어디에 넣어서 전해 줘야 할지 고민은 길었다. 그러다가 예전 집까지 생각이 미쳤고, 그곳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차선책을 선택했다.
설령 이 집이 낯설다 한들, 안에 담긴 걸 보면 녀석이 기운을 내 줄 거라 믿었다.
“……흐윽…….”
멍하니 주저앉아 낡은 글러브를 쓰다듬던 해진이 돌연 북받쳐 오른 소리를 내었다. 반사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런 해진의 안색을 살피는 라일이었다.
“이건, 이렇게……, 흡…….”
“이리 와.”
글러브를 들고 있는 손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마냥 슬퍼서 이러는 게 아닌 걸 알지만 눈물을 삼켜내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켜는 모습을 보니 못내 가슴이 아팠다. 허리를 곧게 편 라일은 그대로 해진을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더는 울음을 참지 않았으면.
제 얼굴에 따스한 라일의 품이 닿자마자 해진은 기어코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처럼 서러운 울음소리가 한참이나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이 집을 울렸다. 목이 쉴 때까지 불분명한 이름들을 부르며 남아 있던 서러움을 전부 뱉어낸 해진 때문에 라일의 품은 온통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흐, 윽……. 흡, 흐윽…….”
“쉬……. 괜찮아.”
저번처럼 해진은 소리 내 고맙다고 말하진 못했다. 그런데도 라일은 제 허리를 부여잡은 그 두 손이, 고맙다는 말을 전한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
“아……. 이것도 있네. 다행이다.”
한동안 해진은 이 집에 올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울기를 반복했다. 남아 있는 마지막 서러움까지 전부 몸 밖으로 내보내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반쯤 실신한 채 라일의 품에 안겨 저택으로 돌아가길 몇 번,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두 발로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조금씩 짐들을 정리했다. 라일은 이 공간을 해진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가족들의 추억을 더듬을 겸 예전 모습을 복원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은 건물이니 안쪽 구조까지는 굳이 건드리지 않을 예정이다.
상자에 있는 수많은 물건은 고맙게도 전부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분명 오래도록 창고 안에 박혀 방치된 채라고 들었는데 거미줄 하나 없이 멀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형과 나란히 앉아 다투곤 했던 낡은 게임기를 들어 올린 해진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다시 팔 가치도 없는 낡은 기종이라 용케 남아 있던 듯했다.
아무래도 컴퓨터나 TV 같은 것들은 이미 처분된 상태였다. 그는 이제 없어진 것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아직 아프지만, 그럭저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잔잔히 지나가는 생각 덕에 다시 미미한 웃음이 흘렀다. 이게 작동될까 의아해하며 게임기를 전원에 연결할 때였다. 문득 몸 상태가 조금 이상함을 알아차린 건.
“어…….”
멍한 소리까지 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뜨끈한 피부에는 조금씩 식은땀마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아프면 안색이 꺼멓게 변하는 라일 때문에 해진은 긴장하며 계속 제 볼이나 목덜미 근처를 매만졌다.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퍽 묘했다.
그 순간 해진은 이게 히트 사이클의 전조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