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99화 (99/101)

#99

“곧 히트가 오시겠군요. 당분간은 몸살 같은 기운이 계속될 테니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히트 사이클이 온다는 걸, 라일은 그를 만난 해진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알아차렸다. 무시무시하게 굳은 그 표정이 너무 딱딱한 긴장을 품고 있어서 병원에 가자는 말에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아……. 억제제 처방을…….”

그동안은 저택의 집사가 알아서 억제제를 건네주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던 해진은 아주 오랜만에 흠칫 몸을 굳혔다.

곁에 있던 라일의 얼굴이 덩달아 사색이 되는 꼴을 동시에 살피던 의사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라일의 페로몬계 주치의는 해진까지 제 진료를 받으러 오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눈앞의 열성 오메가가 라일의 각인 상대라는 건 오로지 의사만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측근들조차 일단은 페로몬 해소가 안 된 탓에 유난하게 아프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냥 둘 사이가 원만하다면 별문제가 없으리라. 다만 왜인지 제대로 된 해소법을 극도로 피하는 라일이었기에 진료 난이도가 한없이 올라간다.

“……잠깐 자리를 피해 주시죠. 개인적인 진료가 필요합니다만.”

특히 억제제를 달라는 해진에게 이 말을 전해야 하는 게 무척이나 어렵기만 하다. 다만 알파인 그를 경계하는지 라일은 쉽게 자리를 비키지 못했다. 그런 제 옆 사람을 빤히 보던 해진마저 의사의 기대를 배신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야.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라일은 다급하게도 의사에게 물었다. 해진에게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눈빛을 숨겼으나 의사에게 떨어지는 눈길은 형형하기만 했다.

딱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 된 의사는 자포자기한 채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번엔 억제제를 처방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요?”

“최근 몇 년간 계속 억제제를 처방받으셨군요.”

“……네.”

옆에서 흉흉한 페로몬을 양순한 척 꾸며내고 있는 라일을 잠깐 본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행여 말실수라도 하지 않도록.

“본래 열성이신 분은 히트 사이클도 불규칙하니까 가급적이면 억제제를 먹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매번 처방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말입니다.”

“아…….”

“…….”

그간 해진에게 억제제를 처방해서 전달한 건 당연히 의사였다. 그동안은 그냥 저택의 오메가에게 줄 것이라고만 이야기를 들었으나 라일 곁의 열성 오메가가 또 있을 리는 없었다.

그걸 전해야 하는 전 집사는 이걸 설명해 주지 않아서 해진은 몰랐다. 그리고 그걸 신경 쓰지 않았던 라일은 아주 오랜만에 머리를 총으로 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특히 호르몬 균형이 불안정합니다. 아무래도 옆에 우성 알파가 있는 탓에 영향을 받으신 듯합니다.”

“…….”

“수치가 이 정도면 임신 확률도 현저히 떨어집니다. 혹시 최근에 페로몬 해소를 같이하셨습니까?”

“……아니요.”

설마 했는데 아직도 둘은 제대로 된 페로몬 해소를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사정이 더 나았으리라. 차차 적응하면서 해진의 몸도 안정적으로 변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이렇게 서로에게 간섭만 끼치는 정도에서 끝나면 오히려 몸의 균형이 더 무너지는 법이었다.

라일에 이어 해진까지 페로몬계 문제가 생기는 꼴을 볼 수 없었던 의사는 단호하게 얼굴을 굳혔다.

“일반적인 알파가 페로몬 샘에 체증이 생기듯이 오메가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고작 머리가 멍해지는 것과는 다르게 오메가는 불임 등 더 심각한 문제로 번질 여지가 크지요.”

“네…….”

“그러니 이번엔 제대로 된 페로몬 해소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옆에 계신 분이 안 되면 다른 알파라도 알아보셔야 합니다.”

의사는 나름대로 라일의 거센 반항까지 감수하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둘은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선택지도 있었다는 걸 거하게 깨달은 얼굴들이었다.

덕분에 의사는 퍽 얼떨떨한 얼굴로 진료를 마무리했다.

***

무거운 침묵이 침실에 내려앉았다. 의사 말로는 앞으로 하루 이틀 사이에 히트 사이클이 시작될 것이라 했다.

무슨 정신으로 저택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기계적으로 씻고 나온 해진은 멍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침대 위에 늘어졌다.

“해진.”

마침 침실로 막 들어오던 라일이 그를 부른 것도 그때였다. 그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이상하게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이곳이 본래는 라일의 침실이라는 걸 생각해 낸 해진이 한껏 당황했다. 히트를 앞둔 것치곤 너무 경계심 없이 군 것 같아서.

“……라일.”

실제로 라일은 줄곧 해진에게 손도 대지 못한 채 있었다. 조금씩 새어 나오는 녀석의 히트 페로몬이 미친 듯이 달큼해서 자꾸만 목울대가 일렁였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갈망에 찬물을 한껏 뒤집어쓰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씻고 나온 해진의 피부에서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착각마저 느껴졌다.

분명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억제제를 먹은 해진의 근처에서 잠깐 피해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 때문에 도무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억제제가 몸에 안 좋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의 라일은 해진에게 그저 무심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알파라니.

그걸 듣는 순간 라일은 한없는 무저갱에 처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멍청하게 왜 이제야 깨달았단 말인가. 그에겐 이제 해진 말고 다른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다르다. 언제든 그를 두고 다른 알파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가슴에 생긴 시커먼 구멍이 점점 자리를 넓혀 갔다.

“……그…….”

그때 그를 보며 머뭇거리던 해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자신의 태도가 한없이 불편할 걸 알면서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당장이라도 라일에게 자리를 비키라며, 다른 알파를 불러오라고 말할까 봐.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해진.”

치밀어 오르는 갈급함으로 라일은 조심스럽게 해진에게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거센 갈등이 그를 치고 지나간다. 그래도 끝내 그 발치로 다가간 그는 조심스럽게 해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정쩡하게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해진의 눈길이 대번 아래를 향한다. 그 시선에 경멸이 서릴까 봐 두렵다. 그러나 해진이 사라지는 건 더 두려웠다.

“제발…….”

“……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이 이상 애절할 수가 없다. 뜬금없는 애원에 해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금빛 속눈썹이 흔들리는 걸 관찰했다.

“제발, ……다른 곳으로 가지 말아 줘.”

“…….”

“내게, 내게 이런 말 할 자격 따위, 없는 거 알아. ……그래도…….”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라일이 천천히 해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일렁이는 그의 페로몬은 아까부터 퍽 어수선하게 좌절을 품은 채 흔들린다.

그의 오해와는 다르게 해진은 다른 알파를 찾을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썩 기껍게 여긴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진이 지금 당장 다른 이를 만나고 오겠다고 한들 라일이 감내할 걸 안다. 또 바닥으로 처참하게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직 그는 페로몬 체증으로 고생일 터다. 그러나 정작 해진의 히트가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그 사실을 먼저 내색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기회를 달라는 소리를 차마 내뱉지 못하고 이렇게 애원만 하지 않는가.

히트 사이클의 열기가 조금씩 피부 밖으로 배어 나왔다. 잘 익은 과일처럼 한껏 촉촉한 기운이 조금만 있으면 밖으로 잔뜩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꼽 아래가 조금씩 간지럽다. 빙글빙글 도는 그 기운이 조금씩 크기를 늘려 가며 그의 몸통을 잡아먹었다.

“라일.”

“……응.”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라일은 고개를 들었다. 그 애처로운 파란 눈에는 미미한 습기가 어려 있었다. 꼭 눈이 잔뜩 내리던 그날처럼.

당장이라도 그를 가둘 힘이 있으면서도, 라일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진은 충동에 저를 맡기기로 했다.

“저를 도와주세요. ……페로몬 해소가 필요해서요.”

혹시 다른 도움이라고 오해할까 봐 일부러 명확하게 말했다. 그러나 고개를 든 라일은 석상이 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표현이 아직도 조금 부족했나 싶어서 해진은 머쓱하게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손바닥에도 이제 확연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느껴졌다.

그런데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더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지 이런 쪽으로는 영 면역이 없는 탓이다. 곤란함에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라일이 다가와 하얗게 깨물고 있는 입술을 핥았다.

“정말?”

“……네.”

갑작스러운 행동에 해진은 잠깐 멍하니 있었다. 그리곤 곧 지나간 감촉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라일이 다시 슬쩍 입술을 붙여 온다. 찌릿한 감각이 입술을 타고 번졌다. 그곳에 슬쩍 묻어 있는 라일의 페로몬이 이상하게 야했다.

“…….”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라일은 연신 해답을 구했다. 슬쩍 다가온 큰 손이 해진의 팔목을 더듬었다. 그곳에 있는 흉터가 못내 아프다는 듯, 툭 불거진 뼈가 신경 쓰인다는 듯.

“흐읏.”

라일의 엄지가 손목 선을 따라 덧그리며 위로 올라왔다. 긴장으로 호흡이 가빠진다. 그럴수록 페로몬이 더 많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제야 해진은 본격적으로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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