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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부-열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스타트. (40/47)

24부-열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스타트.

손을 더듬어 담배를 찾았다.

윤민희가 눈치빠르게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하얗게 질렸던 머리속에 담배연기마져 들어가자 아득한 느낌마져 들었다.

"어떻게 할건가요.민희씨는."

윤민희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려 아름다운 나체를 가렸다.

"뭘 말인가요.난 아기를 처음가져봐요.당연히 낳을겁니다."

그녀의 표정에서 굳은 의지가 보이자 나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이대로 화인선과 예린등은 모두 포기해야 하는걸까?'

생각에 잠긴 내 모습을 윤민희는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참의 정적속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어찌되도 상관없어요.어차피 민혁씨와 난 나이차이도 있고...게다가 민혁씨가 날 선택한다면...우린 둘다 소중한 직업을 잃게 되겠죠."

"후우.."

내가 뿜은 담배연기가 허공을 하얗게 탈색시킨다.

"전 터무니없는걸 쫒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에요.난 민혁씨 사랑으로 족해요."

"그럴순없어요.그건 너무.....못할짓이에요."

윤민희가 말한것은 그저 사랑만 달라는 것이었다.

결혼따위의 일체의 허례허식은 필요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로썬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표시해서는 안될 문제였다.

"못할짓은 민혁씨가 날 선택하는거죠.서로 구속하지 말아요.그냥 이렇게 때때로 옆에만 있어줘요."

"그럼..장례식장 앞에서 보인 눈물의 의미는 뭐죠?"

"잠깐의 실망이었죠.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요.내가 민혁씨에게 부담은 주지 않고 그저 사랑만 받을수 있다는거,.,지금은 그점이 너무나 좋아요,"

"민희씨..."

그녀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나보다 연상이었지만 아기같은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했다.

나와 다녀도 동연배로 생각할 만큼 이쁜 그녀.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그녀의 황금같은 미소가 내 눈에 비춰졌다.

이제 '차장님'에서 '민희씨'로 호칭이 변경된 나의 그녀가 싱긋 웃으며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어서 가봐야죠..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요?"

출상마저 끝난 장례식장은 언제 그랬냐는듯 너무도 조용했다.

이제 소녀의 몸으로 억대재산의 오너가 된 예린이 예전의 세련된 옷차림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리 당찬 예린이지만 그래봐야 10대 소녀일 뿐이었다.

의지할곳은 나밖에 없다는 듯,예린은 내 손을 꼭 쥔채로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제 바쁘게 움직이셔야 합니다.회장님 유언대로 두분 결혼식 올리시고....민혁씨는 NS쪽 경영과 주식쪽에 바로 투입되셔야 합니다."

예린집안의 변호사가 멍하니 있는 우리둘을 보며 재촉하듯이 말했다.

"나...미국으로 갈거에요.오빠랑같이."

"예린아.."

"안됩니다 예린씨.그렇게 되면 회사를 맡을 사람이 아예 없어집니다."

"그런건 그냥 밑에 사람들이 하게 두면 되잖아요!난 오빠없이 아무것도 할수 없단 말이야.."

예린은 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삼일 사이에 살짝 볼살이 있던 예린은 부쩍 야위어 있었다.

"예린아. 넌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아빠가 물려준 소중한 재산.니가 지켜야해."

내 말에 예린이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와 약속대로 미국에서 대학을 마쳐.결혼식은 그때 올리자.응?"

"나..나는...나는..."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훌쩍이는 소리에 내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자리를 좀...비켜주시겠어요?"

내 부탁에 변호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예린을 품안에 안아주자마자 그녀의 훌쩍거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나 다알아....오빠 여자 또 있는거...다 알아...그래서 오빠여기에 두고싶지 않아.."

나는 묵묵히 예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치만...난 첫번째가 되고싶어.오빠를 다 갖지 못한다면...내가 그 첫번째가 되고싶단 말이야."

예린의 큰 눈이 너무나 귀여웠다.

아니..어쩌면 그녀가 뱉은말 자체가 너무도 고마워서 일지도 모른다.

조용히 토닥여 주는 내 손길에 예린은 내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나...우선 오빠랑 약혼식부터 할거야..."

"그래...알았어."

졸지에 수십억대 재산 상속녀의 낭군이 되어버린 나는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내 상황이 참 저주스럽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예린은 너무도 귀엽고 이쁜 여자였다.

배경에는 엄청난 재산이 있으며,수영영재로써 장래의 길도 촉망받는 아이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녀석에게 주어지는 행운치고는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윤민희와 화인선을 버릴수 없었다.

일편단심인 지혜도 그냥 무시하는건 너무 못된 처사였다.

불행중 다행인것은, 민희와 예린이 나의 여자관계를 인정해 준다는 점이었다.

어찌보면.... 나는 천운을 타고난 놈일지도 모르지.....

"약혼식은 우리끼리 조촐하게 할꺼야.주말에 호텔에서 알았지?"

악혼식이라....

애초에 나는 이렇게 될 내 상황을 알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일까?

나는 그저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 앞에 이 많은 복덩이들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못할거 없지...일부다처제 말이야.'

내 마음속엔 어쩌면 악마 한놈이 살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회사로 일단 가셔야 할거 같습니다.업무도 파악하셔야 하구요."

밖으로 나가자마자 예린의 변호사가 정중하게 말을 건냈다.

"나도 같이 갈래!"

"안돼.너는 미국갈 준비랑 수속 밟아야지."

딱 잘라 거절하는 나의 말에 예린의 입이 또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휴우...아직 애라니까 정말...'

"맞습니다.비자도 그렇고, 여러가지 서류나 그런것들도 하셔야 하니...지금부터 준비하시는게 좋습니다."

"알았어요.오빠!전화해야해...알았지?"

변호사마져 내 말을 거들고 나서자 예린은 할 수 없다는듯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운전 괜찮으시겠습니까?피곤하실텐데..."

"아니요.제가 직접할게요.예린이쪽을 신경좀 써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린대신 운전석에 올라탔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뤄진 장례식이었기에, 회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요새들어 본이 아니게 운행을 많이 뛰게 되는(?) 내차가 묵직하게 출발했다.

내 반대편으로 예린의 차가 멀어지는것이 보였다. 그녀의 호텔은 반대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룸밀러 밑으로 걸려있는 지혜가 십자수로 장식해준 악세사리가 보였다.

지혜라는 숙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회사 사장이 변을 당해서 장례식장으로 간다는 내말에 지혜는 밤새면 피곤할텐데 하며 걱정해 주기까지 했었다.

그런 순수한 그녀의 눈을 보면서....나는 너와 계속 함께 할수 없다는 말을 할수 있을까?

여러가지 상념속에 내 차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회사건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어서와!"

평소에도 동네아저씨처럼 대해주는 경비아저씨가 유쾌하게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소문은 안난모양이군....'

내가 회사 오너가 됐다는건 아직 회사내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문제인 모양이다.

로비에 들어서자 휴식을 취하던 모든 사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걔중에 몇명은 나를보고 수근수근 대는 것도 보였다.

만약 소문이 퍼졌다면 이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생각만해도 그런대우는 딱 질색이야.'

내가 엘레베이터를 타자마자 안에 있던 좌중이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대화를 계속 나눴다.

"아...이거.무슨. 문상 다녀오자마자 바로 업무 투입이니 이거 회사다니겠나 참.."

"아!과장님.그 이야기 들었어요?이번에 돌아가신 사장님 예비사위가 오너로 부임한데요."

왠지모르게 뒤통수가 따끔거렸지만 휙 하고 돌아볼 용기가 서지 않았다.

나는 아주 소심하게도 기획실의 층수버튼을 눌렀다.

엘레베이터 내에서 별로 동요가 없는거 보니,나를 그냥 기획실 직원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크으...어떤놈인지 몰라도 땡잡았네. 그냥 NS를 먹어버린거아냐?"

"저기 근데..지금이라도 찾아가서 눈도장 찍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두 사내의 대화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게말이야...다음달에 승진도 해야하는데..지금이라도 로비질좀 해?"

"에이~일이나 해야죠 뭐. 혹시 압니까?열심히 하고 있으면 새로운 사장이 보고 승진시켜줄지?"

"어이구~퍽이나."

"하하하"

올라가는 내내 나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내리자마자 나는 얼른 닫힘버튼을 연타했다.

띵동.

마음속으로 몇번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가장 최상위층에 도착할수 있었다.

"아..안녕하십니까."

문이 열리지마자 내가 간다는 연락을 미리 받았는지,기획실장과 직원들이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사람들도...밑에직원이었던 사람에게 갑자기 공손히 하려니 엄청 뻘쭘하기야 하겠지.

"아네...문상다녀오셔서 바로 업무보시느라 수고 많으시네요.."

"아닙니다.일단 사장실로 들어가시지요."

고 차유성 사장의 방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일단 임시로 유희씨를 비서로 두시겠습니까? 예전에 사장님은 비서를 따로 두지 않으셔서.."

권력이란게 무서운것인가 보다.

기획실장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존칭을 사용하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정작 지목받은 이유희는 내 눈도 못마주친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내가 말한대로 헤어스타일도 바꿨네.'

예전에 내가 지나가는 말로 생머리가 어울릴것 같다는 말을 한적이 있었다.

기획실의 스마일걸인 이유희는 예전의 파마머리에서 단정한 생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아 네.유희씨로 할게요.어차피 계속 기획실 업무도 유희씨에게 배워왔으니까....구태여 바꿀 필요 없겠죠."

"알겠습니다. 일단 업무쪽에 필요하신 서류는 책상위에 정리해뒀습니다."

"네.수고하세요."

"네..그럼.."

기획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꾸벅 인사를 하더니 기획실로 돌아갔다.

어린 나를 오너로 모셔야 하는 기획실장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

'이래서 사회를 엿같다고 하는거로군.'

상념에 젖어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장실에는 나와 이유희 단 둘뿐이었다.

그녀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말을 걸지도 못하는 뻘쭘한 자세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여기 앉아요."

"네..네..사...사장님. 커피라도...드릴까요?"

"아니요.괜찮으니까 편하게 대하고.일단 앉아요."

유희는 내 말에 쭈뼛쭈뼛 걸어와 쇼파에 앉았다.

회색의 클래식 정장을 입은 그녀의 다리는 이쁘게 뻗어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지금의 긴장한 표정탓에 평소의 매력포인트인 미소짓는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는점?

"조금..황당하죠? 지금 이상황이."

"아..아닙니다.어차피 기획실에 오셨을때부터..예상한 일인걸요."

"머리를 피니까 더욱 이쁘네요."

"가..감사합니다."

연신 웃음을 띄는 내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빨개져 있었다.

"앞으로 유희씨가 많이 도와줘야 할거 같아요.말만 사장이지...그냥 떠맡은거나 다름없으니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

"네..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내 눈을 못마주치는 유희가 귀엽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떨거에요?내가 무슨 왕도 아니구 하하."

"아....불편하시다면,...얼른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이유희의 두손을 잡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어찌할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해 했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계속 일해야 하는데 저도 불편하잖아요.기획실에서의 서민혁처럼..편하게 대해요."

"아..네..네...다..다른거 지시하실 것은?"

하도 불편해 하는 그녀때문에 나는 손을 놓아주어야 했다.

'역시 여자손은...참 부드럽구나.'

최근 몇개월 사이에 수많은 여자의 손과 몸을 만져온 내 손이지만, 역시 여자마다 느낌은 다 다른거 같다.

"음....첫날부터 지시하는 사항치곤 웃기지만..."

내가 입을 열자 그녀가 재빨리 수첩과 팬을 꺼내 들었다.

"우선, 기술부 윤민희 차장을 실장으로 승진시켜주세요."

"네?"

"어차피 그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요."

NS의 지휘체계상 실장이 차장보다 높은 위치였다.

"그렇게 되면....기술지원부 책임자가 공석이 됩니다만.."

이유희가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아.후임자선택은 윤실장님 본인에게 맡기도록 하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내 말 하나하나를 바쁘게 적어가는 유희의 사무적인 모습이 사뭇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두번째.고객지원실 강하루씨를 기획실 리셉션데스크로 올려주세요."

"네?"

하나하나 내 지시가 상식밖을 벗어난 탓인지 유희는 계속 되묻기만 할뿐이었다.

"유희씨가 지금 제 비서로 올거니까...리셉션에 있는 유희씨 자리가 공석이 되잖아요. 거기에 강하루씨를 올리세요."

"하지만...업무 자체가 많이 달라서....상담업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 역시 경영쪽은 전공한 적도 없습니다.성실하고 예쁜 사람이니, 유희씨 대신 기획실의 얼굴이 되어줄거에요."

"네....전달하겠습니다."

내 말에 더이상 유희는 반대의 뜻을 표명하지 않고 수첩에 받아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사원들에게 아직 제 신상을 공개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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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업로드 입니다.

글실력이 형편없어 꾸준한 업로드 하나밖에 내새울게 없었는데...늦어서 죄송하군요.

전편의 리플중에(지금은 지워졌지만)따끔한 질책 해주신분 감사합니다.

한가지 핑계를 대자면...

제가 글을 쓰는 방식 자체가 진행이 빠른데다가 구도 자체가 주인공 시점입니다.

게다가 에피소드가 묶여 있는 형식의 작가 1인 옴니버스 형식이다 보니까...복선이나 개연성이 부족한건 사실입니다.

워낙 어릴때 와꾸를 잡아둔 글이라 많이 허술한게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변명도 해봅니다.

하숙집이 끝나고 나서는 전혀 다른 문체의 소설을 연재할 생각입니다.

그때는 더욱더 성숙하고 헛점이 덜 있는 글을 쓸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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