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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7
“창식아 일어나라.”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뜬 창식. 창식을 깨운 사람은 원경이었다.
‘엇!’
창식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원경이 웃으며 말하였다.
“아, 아니에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난 잘 잤지. 어서 일어나 밥 먹자.”
“네”
두 사람은 방 밖으로 나와 먼저 일어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하였다. 계단을 내려가며 창식은 원경의 뒷모습을 보았다. 마침 뒤돌아본 원경과 눈이 마주친 창식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원경 역시 어색하게 웃었다. 원경은 자신의 정사를 창식이 봤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일까?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또 생겨 버리고 만 창식이었다.
아침을 먹은 창식은 같은 방 친구1, 2와 백사장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낯을 가리는 편인 창식이었으나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논 친구들이라 더 이상 어색하지가 않았다. 2월 말의 바닷바람은 꽤 쌀쌀하였지만, 파아란 수평선 위로 떠 있는 하얀 구름을 바라보고 있자니 밤새 술에 찌든 몸과 마음을 절로 상쾌해짐을 느꼈다. 창식이네 외에도 꽤 여러 사람들이 백사장에서 바다 구경을 하고 있었다. 창식이와 두 친구는 여자 얘기가 한창이었다. 섹스를 해 봤네 안 해 봤네, 신입생 중에 누가 괜찮느니, 선배 누가 이쁘느니, 침 발라 놨으니 건들지 말라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무살짜리 사내놈 셋이 모였으니 대화 수준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한참 얘기를 하던 중에 영숙이의 얘기가 튀어 나왔다.
“아 어제 그 귀여운 애 왜 안 왔냐?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러게. 기지배 온대더니 바람만 넣어놨네. 나 새벽 3시까지 기다렸는데.”
친구 1, 2가 아쉬운 표정으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었고, 창식이는 그런 두 놈이 좀 한심해 보였다 .
“야,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지 무슨 또 기대씩이나 하고 그래?”
친구 1이 진지한 눈으로 창식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난 진심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나도!”
친구 2가 앉아 있는 창식의 무릎에 손을 얹으며 거들었다. 친구 1이 창식을 슬슬 졸라대기 시작하였다.
“창식아, 그러지 말고 이따가 걔 불러서 3:3으로 놀자 응?”
“그래 친구, 우리 이따 밤에 3:3으로 술 먹자. 걔한테 전화 해서 얘기해 봐. 밤에 같이 놀자고.”
“야, OT 와서 자기네 과 사람들끼리 놀아야지 왜 우리랑 놀아? 그냥 한말이니까 신경 끄라고 좀.”
“그러는 거 아니네 친구. 넌 여자 친구 있으니까 그러지, 얘랑 나는 없잖아. 그러지 말고 좋은 일 한 번 해라 친구. 응?”
“야 그냥 불러만 내라니까?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두 놈이 성화를 부리는 통에 창식이는 점점 지쳐 갔다. 이래서는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좀 그렇고 개강 하면 내가 미팅 한 번 시켜 줄게.”
“진짜? 진짜지? 너 약속했다.”
“알았다니까.”
“야 약속해.”
친구 2가 새끼 손가락을 창식에게 내밀었다.
“아 좀! 알았다니까 그러네. 개강 하고 꼭 해줄게.”
“야, 난 미팅보다 소개팅으로.”
“내 조건은 문자로 보낸다. 참고해 주게 친구.”
세 놈이 설레발을 치는 동안 단과대 별 체육대회를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고, 좁은 백사장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체육 대회는 달리기와 발야구, 피구, 깃발 뺏기의 네 종목이었는데, 사회과학대가 5개 과인지라 추첨을 통해 부전승을 뽑고 오전에 예선, 오후에 준결승, 결승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각 종목의 우승 상품으로는 양주와 맥주 소주 등이 걸려 있었는데, 그 날 밤의 일용할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게임은 제법 치열하게 전개 되어 갔다. 그 중 여자 피구와 바닷속 깃발 뺏기가 특히 인기가 있었는데, 게임을 위해 면티 차림으로 바닷가에 뛰어든 열혈 여학생들은 본의 아니게 물에 젖은 알몸의 실루엣을 드러냄으로써 보는 남성팬들을 흡족하게 하였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체육대회는 끝이 났고, 신입생들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사회대와 인문대 재학생들은 저녁에 있을 대동제를 준비하기 위해 백사장에 캠프파이어와 무대 및 각종 소품들을 설치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창식은 방 안에서 쉬다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1층 로비로 향하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복도 창가에 기대어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영숙이를 보았다. 그냥 지나치려 하였으나, 그래도 자기를 보면 반갑게 인사해 주는 친구인데 매번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매너가 아니다 싶어 아는 척을 하기로 하였다. 영숙이는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보는지 창식이가 등 뒤편까지 다가가도 인기척을 전혀 못 느끼는 눈치였다. 창식은 영숙의 옆에 다다랐으나 바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 보는 영숙이의 표정과 눈빛, 비록 며칠 못 본 사이였으나 전과는 다른 어둡고 차분한 표정은 평소의 활달하고 시끄러운 영숙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야 뭐 하냐?”
창식은 영숙에게 말했다.
“어? 변태!”
영숙이 창식이를 반가운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이게 진짜? 너 자꾸 변태라고 부를래?”
창식이 발끈하며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자 영숙이 창식의 팔을 붙잡으며 말하였다.
“하하 알았어, 알았어. 안 그럴게.”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아니 그냥, 바다가 참 이뻐서 구경하고 있었지.”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좀 무겁다?”
창식을 보고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왜인지 모를 쓸쓸한 표정과 힘 없는 그녀의 말투는 창식을 내심 걱정하게 만들었다. 새벽에 황당한 일을 겪고 나니, 술 마시면 정신을 못 차리는 영숙이 간밤에 몹쓸 짓을 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창식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영숙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잠시 후 뜬금 없는 질문을 하였다.
“너 여자 친구 있다고 했지?”
“어, 갑자기 그건 왜 묻냐?”
“잘해 줘.”
“뭐야 뜬금 없게? 나 엄청 잘하거든? 근데 너 진짜 무슨 일 있냐? 왜 그래?”
“아냐 아무 것도. 그냥 너 여자친구랑 멀리 떨어져 있다고 들은 거 같아서. 안 보고 싶어?”
“별걸 다 신경 쓰네. 내가 알아서 할거거든요? 너 오늘따라 컨셉 이상하게 잡는다? 평소대로 하시죠 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야. 자주 못 보면 괜한 오해만 쌓이는 거구. 자주 자주 연락하고 신경 써라. 맨날 따 먹을 생각만 하지 말구.”
으이구 니가 그럼 그렇지. 영숙의 말을 듣자 마자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 창식. 쓸데 없는 걱정을 했다 싶었다.
“하여간 이게 꼬박꼬박 변태 취급이야. 너 한 번만 사람들 앞에서 변태라고 해봐. 아주 죽을 줄 알어. 나 간다.”
돌아서는 창식에게 영숙이 말하였다.
“야, 나 이따가 대동제 때 노래 한다.”
창식은 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물었다.
“재학생들만 공연한다는 거 같던데 니가 왜 하냐?”
“나야 인문대의 여신이니까 재학생 신입생 그런 구분이 무의미 한거지.”
“여신 좋아하네. 인문대 애들이 들으면 너 바다에 던지고 갈지도 몰라. 조심해.”
“이게! 죽을래?”
“하여간 이따가 보자.”
창식은 영숙이를 남겨 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창식의 뒤로 영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써 줘서 고맙다.”
대동제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저녁 식사를 하고 OT에 참여한 모든 학생이 백사장으로 모였다. 대동제는 사회대와 인문대 두 학생회장의 인사말로 시작 되었고, 각 과별 재학생들과 연합 동아리들의 공연, 그리고 초대가수의 공연 순으로 진행 되었다. 신입생들은 첫 대학생으로서의 행사에 들떠 뜨거운 박수와 환호로 신나게 공연을 즐겼고, 어두워진 백사장을 환하게 밝힌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대동제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초대 가수와 연합 동아리 댄스팀의 공연이 끝나고 MC를 맡은 인문대 학생회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12학번 새내기 여러분 즐거우세요?”
“네”
수백명의 신입생들이 크게 대답하였다.
“자! 즐거우면 크게 소리 질러!”
MC의 멘트에 날아다니던 갈매기가 떨어질 듯 커다란 함성이 백사장을 가득 메웠다.
“와, 우리 신입생들 정말 놀 줄 아는 사람들만 왔나 보네요. 여러 선배들이 부족하지만 준비를 많이 했는데, 우리 여러분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제 대동제도 대단원의 막을 내릴 시간이 됐는데요.”
“아”
곳곳에서 아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MC가 웃으며 멘트를 이어 갔다.
“하하 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자 이제 대동제 마지막 순서 캠프 파이어가 남았는데요. 그 전에 인문대에 새내기가 깜짝 축하 공연을 준비 했다고 합니다. 우리 한 번 볼까요?”
“네!”
‘뭐야? 영숙이 진짜 노래 부르는건가?’
창식이는 목을 자라처럼 길게 빼서 출연자가 등장하는 무대 오른편을 살펴 보았다.
“준비 됐습니까?”
“네”
“자 소개하겠습니다. 인문대 12학번 오! 영! 숙!”
MC의 소개가 끝나자 무대 위의 핀조명이 일제히 무대 중앙을 환하게 비추었고, 아이유의 좋은 날의 전주와 함께 무대 중앙으로 영숙이가 손을 흔들며 뛰어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12학번 새내기 오영숙입니다. 반갑습니다.”
면티 위에 하얀 후드 티, 체크 무늬의 짧은 치마를 입은 영숙은 마치 아이돌 같았다.
“야, 걔다 걔!”
창식이와 같이 앉아 있던 친구 1, 2호가 영숙이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전주가 끝나자 영숙이는 가벼운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건지”
“우유 빛깔 오영숙!”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
“섹시하다 오영숙!”
영숙이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사이사이에 인문대 선배들이 영숙이를 연호하였다. 특히 남자 선배들이 아주 신이 난 것이 영숙이 말마따나 인문대에선 제법 먹어주는 클라스인 모양이었다. 평소엔 몰랐는데 노래 부르는 것을 보니 아이유와 목소리도 비슷한 것이 제법 잘 부르는게 아닌가. 율동도 곧잘 하는 것이 꽤 귀여웠다. 영숙이가 새삼 달리 보이는 창식이었다. 영숙이의 노래에 학생들 모두 박수를 치며 따라 불렀고, 노래는 막바지에 이르러 어느새 노래의 하이라이트인 3단 고음만이 남았다. 모두가 기대하는 그 순간!
“아임 인 마이 드리~”
‘오! 깔끔하다. 성공적인걸?’
“이~”
‘응?’
“이~임”
‘엥?’
뭐야, 절대음감인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음이 똑같았다. 그녀의 3단 고음은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산 입구 파전 집에 머무르고 만 것이었다. 그녀의 3단 고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박장대소를 하였으나, 영숙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깔끔하게 노래를 마무리 하였다.
“이렇게 좋은 날~”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그녀에게 보냈다. 실수에도 당황하지 않고 멋지게 무대를 끝마친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숙이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대동제의 공연은 모두 끝났고, 곧이어 대동제의 하이라이트인 캠프 파이어가 시작되었다. 백사장 한 가운데에 높게 쌓아올린 장작더미에, 길게 매달아 놓은 와이어를 타고 불씨가 내려와 닿자,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캠프 파이어는 조명을 꺼서 어두워진 백사장을 강렬한 붉은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신입생들은 앞으로 펼쳐질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 일제히 환호하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차놀이 하듯 앞 사람의 허리를 잡고 여러 개의 길다란 줄을 이뤄 캠프 파이어 주변을 뱅뱅 돌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대학생활의 첫 대동제를 마음껏 즐긴 신입생들은 캠프 파이어의 불꽃이 사그라 들면서 삼삼오오 모여 숙소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친구들과 함께 방으로 걸어가던 창식이 앞에 역시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로비를 지나가는 영숙이가 멀찌감치 눈에 들어왔다.
“야 오영숙!”
창식이의 부름에 영숙이가 뒤를 돌아봤다.
“노래 잘 들었다. 너 잘 하더라!”
“땡큐! 이따 같이 술 마시자. 전화 할게.”
영숙이는 웃으며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친구들과 계단을 올라갔다. 그 말을 듣고는 창식이의 친구 1, 2는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기 바빴다. 잠시 뒤 모두가 숙소에 자리를 잡은 후, 어제처럼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