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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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17

이 회장의 태도에 화가 난 영숙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제서야 신문을 탁자에 내려놓은 이 회장은 영숙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하였다. 

“그 놈이 사라진 거랑 아빠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그 놈 얘긴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구나. 앞으로 내 앞에서 그 놈 얘긴 꺼내지도 말아라.”

이 회장의 대답은 단호하였지만, 영숙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아빠를 몰라요? 아빠가 그 동안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 주변 사람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성수 어디로 보낸 거냐구요. 아빠는 알잖아요.”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아빠는 모르는 일이야. 다시는 그 얘기는 꺼내지 말거라. 그리고 너 요새 그 놈 찾아다니는 거 같던데, 단념하고 공부나 열심히 해. 나타날 놈이면 진즉에 나타났겠지.”

“내가 성수 찾아다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지. 아빠는 날 항상 감시하니까. 항상 내 주변에 사람을 붙여두니까. 이번엔 누구에요? 김 실장? 이 실장? 제발 좀 그만 하세요. 날 좀 내버려 두시라구요 제발.”

짜증 섞인 영숙의 목소리는 점점 울먹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영숙을 바라보는 이 회장의 표정은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아빠, 부탁이니까 성수 어딨는지 가르쳐 주세요. 네? 걔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 부탁이에요요. 그냥 잘 있는지 얼굴만이라도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이 회장은 내려 놓았던 신문을 다시 펼쳐 들며 말하였다.  

“밥 다 먹었으면 가거라.”

자신의 애가 타는 부탁에도 이 회장의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고, 그런 이 회장의 태도에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낀 영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주먹을 꼭 쥐며 이 회장에게 소리쳤다. 

“다시는, 다시는 이 집 안에 오지 않을 거에요. 다시는 나 찾지 마세요.”

영숙이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집을 나가려는데 등 뒤로 이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얼굴이라도 보자. 차 보낼 테니까 오도록 해.”

영숙은 참았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현관을 뛰쳐 나갔다. 정원에는 언제 나왔는지 차 집사가 서 있었고, 차 집사를 발견한 영숙이는 그의 품에 뛰어들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아저씨 흑흑.”

울고 있는 영숙이를 차 집사는 말 없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영숙이 좀 진정 되자, 차 집사는 바깥에 대기 시켜 놓은 차로 영숙을 안내 하였다. 

“아가씨, 그만 울어요. 회장님도 다 아가씨가 걱정이 되셔서 그런 겁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혹시 성수 어딨는지 알지 않아요? 아시면 말씀해 주세요. 아빠한테는 비밀로 할테니까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회장님께서 모르신다고 하면 모르시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가씨.”

“아저씨도 아빠 편이군요. 정말 섭섭해요.”

“그럴리가요. 제가 알면 가르쳐 드리죠. 그리고 회장님도 분명 모르시는 일이니까 말씀을 안 하시는 걸테구요.”

차에 다다르자 차 집사는 문을 열어 영숙이를 차에 태웠다.

“자 아가씨, 이걸로 눈물 닦으세요. 화장 다 번지겠네요.”

차 집사는 손수건을 영숙에게 건넸다. 

“아가씨, 우리 한 달에 꼭 한 번씩은 보자구요. 아셨죠? 아저씨는 집에서 아가씨 기다릴게요.”

“몰라요. 이제 안 올 거에요.”

“아가씨가 안 오시면 제가 찾아가죠 뭐. 자 이제 그만 우시고, 조심히 가세요. 김대리? 출발하지.”

차가 서서히 하숙집으로 출발하였고, 영숙이는 눈물을 닦으며 창밖을 바라 보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성수가 보고 싶은 영숙이었다. 

영숙이는 어렸을 때부터 재벌가의 자제들과 연예인, 사회 지도층의 자식들이 많이 다니는 어린이집을 거쳐 외국인 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려서부터 은연 중에 데려 온 자식, 친엄마가 버리고 간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영숙이는 평소 말수가 적어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하였고, 어떻게 알고 소문이 돌았는지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영숙이는 공공연히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회장은 일반 중학교로 영숙이를 진학 시켰으나, 그 곳에서도 영숙이의 학교 생활은 순탄치가 않았다. 고급 외제 승용차로 등하교를 시키고, 학교 밖을 나설 때면 어김 없이 비서가 따라 붙는 영숙이는 학교에서 튀는 아이일 수 밖에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를 먹으러 다닐 나이에 친구들은 영숙이에게 다가가기 어려웠고, 안 그래도 내성적이었던 영숙이도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이 회장의 과보호 속에서 영숙이는 점점 고립 되어 갔고, 자신 만의 세계에 점점 스스로를 가두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영숙이는 남녀공학인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는데, 입학 하고 얼마 후에 학교의 3학년생 남녀 일진 십 여명이 모두 삭발을 한 채 등교를 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영숙이는 스스로가 달라지겠노라 다짐을 하였고, 이 회장에게 혼자 등하교를 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이 회장도 자신의 과보호 때문에 영숙이 외롭게 학교생활을 한다고 판단하여 큰 마음을 먹고 영숙의 부탁을 받아 들였다. 문제는 영숙이가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학년생 일진 패거리에게 돈을 뜯기면서 시작 되었다. 평소 명품옷과 가방, 신발 등 누가 봐도 있는 집 자손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녔던 영숙이는 금새 학교 일진들의 표적이 되었고, 수차례 학교 뒤편으로 불려나가 돈을 빼앗기고 말았다. 영숙이는 그 사실을 집에 알리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회장이 노파심에 몰래 지켜보라고 붙여 둔 비서실 직원에게 영숙이가 일진들에게 돈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그 즉시 이 일을 보고 받은 이 회장은 격노하였다. 다음 날로 비서실 직원들은 학교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돈을 뺏은 일진들을 학교 뒷 산으로 끌고 갔고, 패거리들에게 전화를 하게 하여 영숙이를 괴롭힌 십 여명을 모두 불러 모아 꿇어 앉히고 폭행을 가했다. 수 십분 동안 온 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은 일진들은 살려 달라고 싹싹 빌었고, 남녀 할 것 없이 머리를 빡빡 밀리고서야 겨우 풀려 날 수 있었다. 풀려난 일진들은 비서들의 협박에 학교와 집에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입도 뻥긋 하지 않았고, 어찌 어찌 알게 된 부모들도 이 회장의 돈과 권력 앞에 조용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릴 뻔 한 사건이었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학교 모두의 귀에 들어갔고, 영숙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영숙이는 무서운 아이, 가까이 하면 다치는 아이로 인식이 되어 갔다. 바뀐 환경에서도 여전히 영숙이는 외톨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힘든 시기에 만난 친구가 성수였다. 박성수, 영숙이의 동갑내기 첫사랑. 둘의 운명적인 만남은 학교 매점에서 시작 되었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매점에서 빵과 라면을 먹을 시간에, 영숙이는 쓸쓸하게 매점 내 식탁에 홀로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 때 웬 남자 아이가 영숙이가 앉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하였다. 남자 아이는 라면을 후후 불며 영숙이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영숙이는 남자 아이의 뜬금 없는 인사에 주변을 슬쩍 둘러 본 후, 별 다른 말 없이 계속 해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남자 아이는 라면 한 젓가락을 후루룩 삼키며 다시 영숙이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인사 했는데 대꾸도 안 하냐? 안녕.”

이번에는 영숙이에게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하였고, 영숙이는 그런 남자 아이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너 나 알아?”

“알지 왜 몰라? 너 1학년 8반 이영숙이잖아. 난 2반 박성수야. 아는 척 하고 지내자.”

“그런 거 말고. 너 내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 아, 너 엄청 잘 산다며?”

영숙이는 멍하니 성수를 쳐다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면 맛있게 먹어라. 아는 척은 하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영숙이를 보며 성수는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며칠 후 수요일 하교길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영숙이가 다닌 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는데, 전 학년이 의무적으로 야간 자율학습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학원과 과외 수업 등의 이유로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은 학생들만 자율학습이 면제가 되었는데, 그마저도 수요일 저녁에 있는 채플수업은 의무적으로 듣고 가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숙이는 특별히 이 회장이 학교에 과외수업을 한다고 부탁하여, 수요일에도 정규 수업이 끝나고 바로 귀가하였다. 여느 수요일과 다름 없이 수업이 끝나고 학교 정문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 쳤고, 놀라서 쳐다 본 자리에는 며칠 전에 본 그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야, 반갑다. 너도 집에 가냐?”

자신 외에 이 시간에 집에 가는 친구를 본 적이 없었던 영숙이는 의아했다.

“너 뭐야? 집에 가는 거야?”

“그럼 집에 가지 어디 가? 너도 도망 가는 중이냐?”

어처구니가 없는 영숙이는 발걸음을 돌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고, 성수는 그런 영숙이 옆에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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