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18 / 0093 (18/93)

0018 / 0093 ----------------------------------------------

[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18

“야, 넌 집이 어디냐? 

“....”

“버스에서 여러 번 본 거 같은데? 난 이태원 근처에서 내리는데 넌 어디야?”

영숙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성수를 쳐다 봤다. 쳐다 보는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야, 뭘 그렇게 무섭게 쳐다 보고 그러냐?”

“니가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만 관심 좀 꺼줄래? 내가 좀 귀찮거든.”

영숙이의 말투는 듣기에 따라서는 참 싸가지가 없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성수는 그런 영숙이에게 시종일관 웃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냥 아는 척 하고 지내자는 건데 뭐 그리 까칠하게 그러냐? 너 친구 없지? 야, 너 하는 걸로 봐선 분명히 친구 없을 거야. 내 말이 맞지?”

차갑고 도도하던 영숙이의 표정이 순간 흔들리는가 싶더니,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웬만한 상처에는 단련이 되어 있는 영숙이었지만, 자신의 가장 아픈 곳, 안타까운 부분을 건드리자 순간 감정이 격해지고 만 것이었다. 영숙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갑자기 눈물이 맺히자 성수도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야, 야, 갑자기 왜 울고 그래. 미안해. 농담이야. 농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감정을 꾹 누르던 영숙이는 성수가 애써 달래려 하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영숙이는 꺼이 꺼이 소리를 내어 울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고, 성수는 그런 영숙의 뒤를 죄인처럼 말 없이 졸졸 쫓아갔다. 버스 장류장에 도착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몇 번을 보낸 후에야 진정이 된 영숙이는 성수를 노려 보았고, 자기를 보는 영숙이의 시선에서 살기를 느낀 성수는 먼 산을 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잠시 후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여 영숙이가 차에 올라타자, 성수도 냉큼 버스에 올라탔다. 학교에서 영숙이의 집까지는 버스로 20여분 거리였는데, 버스는 만원까지는 아니었지만, 빈 자리 없이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영숙이는 버스의 앞 부분에서 손잡이를 잡고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버스 뒤 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영숙아, 이영숙.”

성수였다. 창피해서 모른 척 곁눈질로 슬쩍 들여다 보니 빈 자리를 맡아 놓고 성수가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주둥이가 댓빨은 나와 있는 아줌마가 성수를 째려 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줌마, 저 친구가 몸이 불편해서요. 영숙아 빨리 와.”

성수는 손짓까지 하며 영숙이를 부르고 있었고, 영숙이는 애써 모른 척 외면하였다. 그러나 성수가 계속 시끄럽게 영숙이를 불러대자 점차 사람들이 수근 대기 시작하였다. 

“아 거 참, 영숙이가 도대체 누구야?”

“하여간 요새 애들은 참.”

“누군지 빨리 좀 앉아라. 시끄러워 죽겄네 그 참.”

자신을 바라 보는 따가운 눈초리들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영숙이는 마지 못해 성수가 맡아 놓은 자리에 가 앉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인 영숙이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성수를 곁눈질로 쳐다 봤다. 성수는 영숙이의 속도 모른 채 헤벌쭉 웃고 있었다. 

‘아유 이 새끼가 정말.’

이태원 근처가 집이라던 성수는 버스가 집 근처를 지나치는데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영숙이의 집까지 따라갈 모양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영숙이가 한남동에서 내리자 성수도 따라 내렸다. 영숙이는 자신을 따라 내리는 성수를 돌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아이 깜짝이야.”

예상치 못한 영숙이의 사자후에 성수는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칫 하였다. 

“너 왜 자꾸 날 귀찮게 하는데?”

“친해지고 싶어서.”

영숙이는 성수의 돌직구의 당황 하여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이 없는 영숙이에게 성수가 물었다. 

“너 남자가 잘 모르는 여자한테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둘 중에 하나야. 뭔지 알아?”

“그게 뭔데?”

“길 물어 볼 때하고 관심 있을 때.”

영숙이는 말 없이 성수를 빤히 쳐다 보았다. 얘가 지금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가? 처음 겪어 보는 상황이 혼란스러운 영숙이는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망부석처럼 서 있었고, 성수는 그런 영숙이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깔깔 대며 웃기 시작하였다. 그런 성수를 보자 영숙이는 자기를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하였다. 

“야! 기분 나쁘게 왜 웃는데?”

“미안 미안, 안 웃을게. 그런데 너 계속 서 있을 거야? 빨리 집에 가자. 근처까지 데려다 줄게.”

“됐어. 나 혼자 갈 테니까 넌 너네 집에나 가.”

“야, 여기까지 왔는데 뭘 그러냐? 같이 가자.”

“됐거든. 빨리 버스 타고 집에 가라. 화 내기 전에.”

“아, 진짜 까칠하다 너. 그냥 데려다 주면 안 돼?”

“안 돼.”

영숙이는 성수가 떠날 때까지 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영숙이의 단호한 태도에 성수는 집에 데려다 주는 것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냥 갈게. 대신에 다음엔 꼭 데려다 줄게 안녕.”

성수는 영숙이에게 손을 흔들며 반대편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갔고, 영숙이는 그런 성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반대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성수는 그 때까지 자신을 지켜보던 영숙이를 보자 다시 손을 흔들었고, 창피한 영숙이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학교에서 영숙이는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하루 종일 엎드려 뻗쳐 있는 성수를 봐야만 했다. 채플 시간에 도망친 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성수는 틈만 나면 영숙이를 쫓아 다녔고, 처음에는 거리감을 두었던 영숙이도 차츰 성수의 진심을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지나 가을이 완연해질 무렵 두 친구는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봐 이 실장.”

“네 회장님.”

“요새 영숙이가 과외도 빼먹고 귀가가 자주 늦는다는데 어떻게 된 건가?”

이 회장은 영숙이가 최근에 집에 늦게 돌아온다는 가정부의 얘기를 듣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영숙이의 보호를 담당하고 있는 이명훈 실장에게 영숙이의 근황에 대하여 보고를 받고 있었다. 

“네, 직원에게 보고 받기로 아가씨가 최근에 동급생 남자 친구를 사귀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 친구와 어울리느라 귀가가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자네는 그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보고를 안 했나?”

의자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이 회장은 천천히 의자를 돌려 파이프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 실장을 바라 보았다. 바라 보는 눈빛에 불쾌감이 가득하였다. 

“직원의 보고를 받고 그 친구에 대해 알아본 바로 전혀 문제가 없는 친구였습니다. 또한 현장을 몇 번 밟아 봤는데 또래의 건전한 이성 교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좀 더 상황을 지켜 본 후에 회장님께 보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언짢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 실장은 고개 숙여 이 회장에게 사과를 하였고, 이 회장은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들인 후 허공으로 연기를 내뱉으며 말하였다. 

“떼어 놔.”

그 한마디를 던지고 이 회장은 다시 의자를 돌렸다. 

“한참 예민할 때야. 남자 친구는 대학 가서 만나도 늦지 않아. 떼어 놓도록 하게.”

“회장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가씨는 이 날 이때껏 변변한 친구 한명 사귀지를 못 했습니다. 항상 외로우셨죠. 그런 아가씨가 처음 친구를 사귀었는데 강제로 떼어 놓게 된다면 아가씨는 정말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 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가씨 모르게 철저하게 관리 감독할 테니 좀 더 상황을 지켜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재고해 주십시오 회장님.”

영숙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부터 영숙이를 지켜봐 온 이 실장은 영숙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외로움의 깊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항상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살았던 영숙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지고 표정은 어두워져갔고, 그런 영숙이를 멀리서 지켜볼 뿐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던 이 실장은 이 날까지 가슴 한 켠에 무거운 빚을 안고 살아가는 심정이었다. 그런 영숙이가 최근에 성수를 만난 후  한층 밝아진 것을 보고 이 실장은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벗을 수가 있었고, 그런 영숙이가 성수와 헤어지게 되면 그 상심이 얼마나 클지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 회장의 지시에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 것이었다. 이 회장 역시 비서실 말단 직원 시절부터 10년이 넘게 자신을 가까이에서 보좌해 온 이 실장이 자신의 지시에 처음으로 반박하는 것을 보고 눈을 감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달라진 영숙이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항상 식탁에서 조용히 밥을 먹고 제 방으로 들어가던 아이가 자기에게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이나, 시무룩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표정의 아이가 깔깔 대며 소리 내어 웃는다거나, 이 모든 변화가 그 새로 사귀기 시작했다는 남자아이 때문이란 말인가. 한참을 아무런 말이 없던 이 회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 실장에게 말하였다.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이 실장의 굳은 얼굴에 옅은 미소꽃이 피어 올랐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지속적으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