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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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19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고, 해가 바뀌어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고, 영숙이와 성수는 2학년이 되었다. 영숙이는 성수에게 불만이 많았다. 겨울 방학 때부터 바쁘다며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었다. 공부도 잘 하지 않는 놈이 맨날 뭐가 그리 바쁘다는 것인지, 학교 수업이 끝나고 놀자고 해도 어딘가로 혼자 사라져 버렸고, 이유를 물어봐도 통 속 시원히 대답을 안 해주는 성수에게 영숙이는 잔뜩 뿔이 나 있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한 달 쯤 지난 그 날, 영숙이는 툭하면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도망가는 성수의 뒤를 밟아 보기로 하였다. 마지막 수업 종이 울리고, 영숙이는 부리나케 교문 밖으로 뛰어 나가 학교 앞 문구점 건물 뒤편에 숨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이 지난 후, 성수가 교문에서 허겁지겁 빠져 나오고 있었다. 또 자율학습 땡땡이를 치는 것이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성수를 눈치 채지 못 하게 멀찌감치 쫓아간 영숙이는 성수가 버스를 타자 뒤이어 오는 택시를 잡아 타고 성수가 탄 버스를 미행해 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하였다. 버스는 성수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었다. 30분 가까이 달린 버스가 홍대에 도착하자 성수가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여기서 세워 주세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성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영숙이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건물과 건물 사이에 좁은 골목길로 성수가 걸어 들어갔고, 영숙이도 그 뒤를 쫓아 골목길에 들어 선 순간.

“야!”

“앗, 깜짝이야.”

영숙이는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 하였다. 성수였다. 

“하하하하하.”

성수가 깜짝 놀라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린 영숙이를 웃으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성수는 손을 내밀어 영숙이를 일으켜 세웠고, 자리에서 일어난 영숙이는 두 손으로 성수를 밀쳐내며 소리를 질렀다. 

“야, 깜짝 놀랬잖아.”

“뭘 그렇게 몰래 따라 오고 그래.”

“너 알고 있었어?”

“미행을 하려면 좀 잘 하든가. 뻔히 보이는데 뭘 그리 요기 숨었다 조기 숨었다 바쁘게 쫓아오고 그러냐?”

“니가 맨날 어디 가는지 말을 안 해 주니까 그렇지. 너 요새 됴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알고 싶어?”

성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너 진짜 죽을래? 빨리 말 안 해?”

“아, 나중에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우리 여자 친구가 성격이 너무 급하시네. 진짜 궁금해? 꼭 지금 알아야겠어?”

“이게 진짜.”

영숙이가 주먹으로 성수의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였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 같이 가자.”

“어디 가는데?”

“따라 와 보면 알아.”

성수는 영숙이의 손을 잡고 골목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분을 걸어 들어가자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오르막 길이 나타났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자 언덕빼기에 깔끔하게 지어진 4층 건물이 띄었다. 건물의 우측에는 4층에서 1층까지 큰 글씨로 ‘지앤비 기획’이란 이름이 벽면에 새겨져 있었다. 

“자, 들어가자.”

성수는 영숙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으면서 몇 사람과 마주쳤고, 성수는 그들에게 일일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성수 왔구나.”

인사를 받는 사람들도 성수에게 아는 척을 하였다. 영숙이는 어안이 벙벙하여 여기저기를 둘러 보았다. 밖에서 본 이름에서 느꼈듯이 이 건물은 연예기획사의 건물인 듯 하였다.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 보니 방음이 돼 있는 유리벽 너머로 어떤 방에서는 젊고 잘 생긴 남녀가 연주자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거나, 또 어떤 방에서는 단체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 왔다. 

“너 여기 어디야?”

“응, 기획사.”

“그건 알겠는데 니가 여기 웬 일이냐구.”

“응, 나 여기 연습생이야.”

“연습생? 인피니트 비스트 뭐 그런 거?”

“엉.”

영숙이는 이 시츄에이션이 참 황당했다. 가끔 노래방에 놀러 가서 성수가 노래 하는 것을 보면 끼가 있는 친구구나 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연습생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몇 번 얘기했었잖아. 나 꿈이 가수라구.”

“야, 그건 그냥 하는 얘기인 줄 알았지.”

“어, 성수 왔구나.”

두 사람이 말 하는 중에 30대 초반의 잘 생긴 남자가 다가 와 성수를 아는 척 하였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성수가 그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였다. 

“옆에는 누구니?”

“아 네, 같은 학교 친구에요. 인사해 실장님이셔.”

“아, 안녕하세요.”

영숙이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였고, 실장이라 불린 남자는 그런 영숙이를 유심히 쳐다 보았다. 

“자, 일단 들어가자.”

실장은 두 사람을 복도 끝에 있는 사무실로 안내 하였고, 두 사람은 사무실에 들어가 쇼파에 앉았다. 

“뭐 좀 마실래?”

“아뇨. 전 괜찮아요. 영숙이 너 뭐 마실래?”

“아냐. 나도 괜찮아.”

실장은 커피를 타서 한 모금 마시며 두 사람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래, 성수 전에 내가 말한 거 생각해 봤니?”

“네.”

“그래 니 생각은 어때?”

“저야 기회만 주시면 열심히 하죠.”

“그렇구나. 부모님하고는 상의 해 봤니?”

“네, 하고 싶으면 한 번 열심히 해 보라시던데요.”

“그럼 잘 됐네. 전에도 말했듯이 회사에서 이번 연말 전에 데뷔 목표로 남자 다섯 아이돌 준비하고 있거든. 넌 거기에 끼게 될거야. 준영이랑 민규 알지?”

“네. 그 형들 잘 알죠.”

“걔네 둘은 확정이고, 최종으로 몇 명 남은 중에서 내가 너 추천했거든. 아마 조만간 대표님이 보자고 하실거야. 잘 하고 컨펌 되면 계약서 쓸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감사합니다 실장님.”

성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허리 숙여 넙죽넙죽 인사를 하였다.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야, 아직 확정 된 거 아니니까 긴장 늦추지 말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추천한 거니까 큰 이변이 없는 한 될 거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알았지?”

“네.”

“그래, 한 번 잘 해보자.”

말을 마친 실장은 영숙이 쪽을 유심히 쳐다 봤다. 낯선 남자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영숙이는 괜히 기분이 나빴다. 한참을 쳐다 본 후 실장은 영숙이에게 뜻밖의 질문을 하였다. 

“너 가수 관심 없니?”

“네?”

“이미지가 괜찮은데 가수 해 볼 생각 없냐구.”

“아뇨, 전 그런 거 관심 없는데요.”

“잠깐만 일어서 볼래?”

가수 하기 싫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나 싶은 영숙이는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런 낌새를 챈 성수가 영숙이에게 곁눈질로 일어서라는 싸인을 계속 보내 왔다. 평소 같으면 그냥 방문 닫고 나와 버릴 영숙이었지만, 성수를 생각해서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돌아 봐.”

‘이 새끼가 점점.’

영숙이는 속으로 참을 인자 만 번을 새겨가며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아 보였다. 키는 160이 될까 말까한 아담한 싸이즈였지만, 깜찍한 얼굴에 팔 다리가 길고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한 비율이 좋은 영숙이의 몸매는, 전형적인 베이글녀의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동시에 남자의 야릇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 많은 연예인 지망생을 접해 온 실장은 영숙이의 그러한 매력을 놓치지 않았고, 가수로서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음, 너 춤 한 번 춰 볼래?”

“저 진짜 가수 관심 없는데요?”

“어, 알어 알어. 그냥 한 번 보는 건데 뭘. 음악 틀어줄까?”

실장의 무리한 부탁에 영숙이는 점점 얼굴이 뻘개지고 있었다. 그런 영숙이를 성수는 진땀을 흘리며 지켜 보고 있었다.

‘영숙아 제발.’

성수는 실장 모르게 탁자 밑으로 두 손을 싹싹 비벼 보였고, 그런 성수를 보며 영숙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엉덩이 뒤로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면서.

‘넌 나가서 뒤졌어.’

실장은 친숙한 걸그룹의 노래를 틀어 주었고, 영숙이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영숙이는 특별히 춤 연습을 한 적은 없었지만, 혼자 심심할 때마다 텔레비전을 보며 걸그룹의 커버댄스를 따라한 덕분에 웬만큼 유행하는 춤들은 모두 알고 있었고, 타고난 리듬감과 긴 팔다리로 표현 되어지는 세련된 그녀의 춤동작은 마지 못해 즉흥적으로 추는 춤임에도 실장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는 충분하였다. 영숙이의 춤을 지켜 본 실장은 음악을 끄고 박수를 쳤다. 

“이야, 잘 하네 이 친구. 보물이 여기 있었네. 노래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

“실장님, 얘 노래도 잘 해요 하하하.”

영숙이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직감한 성수가 눈치 빠르게 나섰다. 실장도 더는 영숙이에게 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 

“학생 진짜 관심 없어? 연습 좀 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아뇨. 전 관심 없어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실장은 명함첩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영숙이에게 건네었다. 

“이건 내 명함이고. 혹시 생각 바뀌면 전화 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알겠지?”

영숙이는 명함을 대충 훑어 보고는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자, 그럼 성수는 오늘 들어가 보고 사장님하고 일정 잡히면 다시 미팅 하자. 이번 주는 쉬어.”

“네, 알겠습니다.”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연습 하게 되면 아마 상당히 바쁠거야. 학교 문제는 그 때 가서 얘기하고.”

“네.”

“그럼 가 봐.”

“네. 안녕히 계세요.”

성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고, 영숙이도 따라서 인사를 하였다. 

“응 그래, 친구도 또 보자.”

앞장 서서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 영숙이는 뒤이어 걸어 나오는 성수를 째려 보았다. 영숙이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성수는 영숙이를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영숙아, 일단 화 풀고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천천히 설명할게. 그래 맞다. 우리 떡볶이 먹으면서 얘기하자. 배 고프지?”

성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숙이는 휑하니 돌아서서 왔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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