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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20
성수는 빠르게 걸어가는 영숙이의 팔을 낚아 채며 그녀를 자리에 멈춰 세웠다.
“영숙아 그냥 가면 어떡해. 우리 얘기 좀 하자.”
“할 말 없으니까 이 손 놔.”
“영숙아.”
“놓으라는 말 안 들려?”
“영숙아, 진짜 미안해. 너 기분 나쁜 거 다 알아. 너 진짜 하기 싫은 거 알았는데, 나한테 너무 중요한 순간이라 망칠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해 응?”
영숙이는 팔짱을 낀 채 성수를 노려 보았다.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성수의 진심이 느껴졌지만 화가 풀리지가 않았다. 성수가 그녀의 진심을 몰라 주는 것이 야속했기 때문이었다.
“너 내가 그 새끼 앞에서 돌아 서서 몸 보여주고, 춤 추고 그게 기분 나빠서 그런 거 같애? 내가 그 것 땜에 화내는 거 같냐구.”
“아냐? 그럼 왜 그래.”
“이 새끼 진짜 모르는가보네. 야, 난 너한테 진짜 중요한 일이면 그런 새끼가 아니라 학교 운동장에서 옷 벗고 춤을 출 수도 있어. 근데 내가 왜 기분 나쁜지 알아? 너 고등학생이야. 공부 안 해? 가수 한다고 연습 하면 학교도 잘 못 나올 텐데 그러다 일 잘 못 되면 너 어떻게 살 건데? 넌 그런 중요한 일을 나하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하고 이런 식으로 통보 하냐? 말 해봐. 말 해 보라구 이 새꺄.”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도 아랑 곳 없이 영숙이는 악을 쓰며 성수에게 따져 물었고, 할 말을 마친 영숙이의 눈이 반짝 거렸다. 영숙이의 진심을 몰라 본 성수는 너무 미안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 때까지 붙잡고 있던 영숙이의 팔을 놓고 조용히 그녀를 끌어 안았다.
“놔, 뭐 하자는 거야. 빨리 놔.”
영숙이는 성수의 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성수는 그녀를 더욱 꼬옥 끌어 안았고, 시간이 지나 진정이 된 영숙이는 성수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성수는 영숙이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하였다.
“미안해, 니 마음 몰라줘서. 확정 되면 얘기 하려고 했어. 정말이야.”
성수는 영숙이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나 잘 할 수 있어. 미리 말 안 한 건 니가 걱정할까 봐서야.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나 믿어 주면 안 돼? 나 진짜 잘 할 거야. 자신 있어. 절대 너 실망 시키는 일 없을 거야.”
영숙이의 뺨을 감싸고 있는 성수의 손에 뜨거운 느낌이 번져 가고 있었다.
“실망 시켜도 괜찮아 멍청아. 그런다고 안 도망가니까.”
성수는 영숙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였다. 사귀고 처음 하는 키스였고, 두 사람 모두에게 이성과의 첫 키스였다. 영숙이는 성수의 기습적인 키스에 놀라 잠시 반항을 하였지만, 서서히 눈을 감으며 그를 받아 들였다.
“어이구 말세다 말세. 어린 것들이 교복 걸쳐 입고 길 한 복판에서 뭐 하는 짓이고?”
중년의 아줌마가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눈을 손으로 가리며 그들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입술을 마주한 채 그렇게 서 있었고, 이미 어두워진 거리에 홀로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무대 위의 조명처럼 그들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영숙이 집 근처의 커피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쇼파가 푹신푹신하니 편안하였고, 구석자리에 앉으면 주변에서 잘 보이지가 않아 두 사람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이 어린 커플들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그들의 전용석에 앉아 찰싹 붙어 앉은 채로 전에 없던 스킨십을 나누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첫 키스 이후로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다.
“배 고픈데 그냥 밥 먹지. 나갈까?”
“아냐 괜찮아. 안 그래도 나 다이어트 중이야.”
“니가 뺄 살이 어딨다고 그래? 어 있네? 워 대박.”
성수가 영숙이의 배를 쪼물락거리며 웃었다.
“이게, 죽을래?”
성수가 영숙이를 가볍게 끌어 안으며 볼에 뽀뽀를 하였다.
“아, 이렇게 있으니까 참 좋다.”
“야, 너 연습 시작하면 우리 이러는 것도 끝이야. 바빠서 만나지도 못 해요.”
“에이, 그래도 가끔 얼굴 볼 시간은 있겠지.”
“에휴 난 모르겠다. 그 힘든 걸 왜 할려고 하는지.”
“이제 화 좀 풀렸어?”
“몰라. 말 안 할 거야.”
“이래도 말 안 할 거야? 응? 안 할 거야?”
성수가 영숙이를 간질이자 웃음을 찾지 못한 영숙이가 꺄르르 웃었다.
“하지 마. 간지럽단 말야. 하지 말라니깐.”
한참을 장난 치며 깔깔 대고 웃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진지한 분위기로 접어 들었다. 영숙이는 얼굴을 성수의 품에 기댄 채 아무 말 없이 캄캄한 창밖을 바라 보았고, 성수는 그런 영숙이의 머릿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
성수가 영숙이에게 물었다.
“그냥 옛날 생각.”
“옛날 무슨 생각?”
“그 때 널 안 만났으면 지금쯤 내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
“어떻게 됐을 거 같은데?”
“아마 죽었을거야.”
예상치 못한 영숙의 대답에 성수는 깜짝 놀랐고, 성수의 미세한 심장 박동의 변화에 영숙이는 자리에 눕다시피 고개를 돌려 성수를 쳐다 보았다.
“야, 무슨 그런 말이 있어. 니가 죽긴 왜 죽어?”
“난 아마 외로워서 죽었을 거야. 정말이야.”
성수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 보는 영숙이를 내려다보며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녀를 바라 보는 성수의 시선에,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 진한 외로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나 어렸을 때부터 외로웠어. 나 엄마가 없거든.”
“어, 그래?”
영숙이에게서 부모님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가 없다는 얘기에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성수는 조용히 영숙이의 얘기를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아빠하고 엄마는 정식 부부가 아니었어. 바람 피워서 날 낳은거래. 그런데 엄마는 날 낳자마자 날 놔두고 먼 곳으로 떠나 버렸대.”
“그랬구나.”
“난 어려서부터 혼자였어. 아빠는 항상 바쁘고 무뚝뚝해. 어쩌다 같이 있어도 별로 말씀이 없으셔. 그래서 나 어렸을 땐 엄청 많이 울었다. 그래서 큰 엄마한테 맨날 혼났지. 맞다. 나 아빠 본처를 큰 엄마라고 부르거든. 큰 엄마는 바람 핀 여자 딸래미인 나를 엄청 싫어해서 내가 눈 앞에서 없어져 줬으면 하고 항상 바랬지. 말 안 해도 난 느낄 수 있거든.”
“엄마 어디 계신지 안 궁금해?”
“궁금했지.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찾아 보기도 했고.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어.”
성수를 바라보던 영숙이는 몸을 일으켜 세워 성수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초점 없는 그녀의 시선은 어두컴컴한 창밖을 향하였고, 성수는 팔을 벌려 영숙이의 좁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난 항상 외톨이였어. 친구들은 내가 첩자식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 했고, 나는 무서워서 친구들한테 다가갈 수가 없었어. 용기를 내서 다가가 보려고 해도 잘 안 되더라.”
영숙이의 말을 듣던 성수는 찻잔을 들어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뭐라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자신이 참 한심하고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성수였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진짜 잘 해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안 되더라. 그 때 나 많이 지쳤었어. 내가 너무 한심하기도 하고, 난 정말 태어나면 안 되는 아이였구나 하는 그런 생각? 정말 갑갑하더라. 이렇게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면서 하루, 이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럴 때 니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영숙이가 성수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 턱을 괴고 성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성수가 영숙이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의 코가 마주닿았다.
“처음엔 무서웠어. 너처럼 나한테 먼저 다가와 준 친구는 거의 없었거든. 그리고 그런 친구들하고는 거의 끝이 안 좋았고. 그래서 망설였어. 혹시나 또 잘못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영숙이게 성수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다.
“내가 처음에 많이 못 되게 굴었는데, 그래도 포기 안 해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영숙이가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성수가 영숙이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영숙이가 성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나한테 다가온거니? 나 소문 별로 안 좋게 났을텐데.”
“저번에 내가 말했잖아.”
“응? 뭐가?”
“남자가 모르는 여자한테 말 걸 때는 거의 둘 중에 하나라고. 길 물어 볼 때 아니면 관심 있을 때.”
“내가 그렇게 이뻤어?”
“아니, 그 때 라면 먹고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 물어보려고 했지.”
“으이그, 니가 그럼 그렇지.”
영숙이가 성수의 코를 비틀었다.
“아야 아야, 농담이야 농담 하하하.”
성수가 웃으며 영숙이를 끌어 안았고, 영숙이도 웃으며 성수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한 시간이 넘도록 서로를 끌어 안은 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커피숖 밖에 세워진 차 안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로부터 며칠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