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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21
“회장님 계시지?”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흠, 모를 일이군. 이렇게 급하게 찾으시다니. 김 비서 혹시 무슨 말씀 들은 건 없나?”
“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급하게 이 실장님을 찾으셨다는 것 외에는.”
전일 출장 차 중국으로 떠났던 이명훈 실장은 갑작스런 이 회장의 호출을 받고 급하게 아침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여 회사에 복귀를 한 참이었다. 이 실장은 회장실에 들어가기 전 넥타이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가볍게 노크하였다.
‘똑똑’
“들어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 회장의 낮게 깔린 음성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 출장을 간 자신을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불러들였다는 점과, 10년이 넘도록 이 회장을 최측근에서 보좌해 온 이 실장만이 감지할 수 있는 이 회장의 음성에서 전해져 오는 미세한 떨림,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분노의 감정, 이 실장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이명훈입니다.”
이 실장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이 회장에게 걸어가 허리 숙여 인사하였다. 불이 꺼진 회장실은 이 회장이 피우는 담배 연기로 자욱하였고,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빛만이 이 회장을 비추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과 어두운 이 회장의 뒷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불편한 그의 심기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불 켜지.”
“네 회장님.”
이 실장은 회장실의 불을 켜고 이 회장 앞에 마주 섰고, 이 회장은 천천히 의자를 돌려 이 실장을 바라 보았다.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게 됐군.”
“아닙니다 회장님.”
“이것 좀 보고 얘기하지.”
이 회장이 손에 들고 있던 사진들을 테이블 위로 던졌고, 이 실장은 그 사진들을 집어 들어 천천히 넘겨 보았다. 영숙이와 성수의 모습이 찍한 사진들이었다. 손 잡고 거리를 걷는 모습, 커피숖 쇼파에 앉아 영숙이가 성수의 품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모습, 둘이 키스 하는 모습 등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고스란히 사진 속에 담겨 있었고, 사진을 보고 나니 왜 이 회장이 자신을 급하게 호출했는지 대강 짐작이 가는 이 실장이었다. 그러나 사진 속의 내용들은 전부터 부하 직원에게 보고를 받고, 또 직접 현장에서 보아 이 실장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스킨십도 잦아진 것이 사실이었지만 요새 고등학생들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라고 판단하였기에, 좀 더 지켜보자고 생각한 이 실장은 눈 앞의 사진을 보고 적잖이 당황하였다. 그 이유는 영숙이를 담당하고 있는 자신도 모르게 찍힌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실장은 사진의 출처가 궁금하였지만 사실의 해명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회장님, 미리 보고 드리지 않은 점 죄송합니다. 좀 더 지켜 본 후에...”
“언제부터지?”
“네?”
“영숙이가 그 놈하고 언제부터 이렇게 지저분하게 놀기 시작했느냔 말이다.”
이 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실장은 이 회장의 얼굴을 보고 그가 지금 얼마만큼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상대가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 온, 최측근으로서 그 누구보다 신뢰해 왔던 이명훈 실장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것이다.
“영숙양이 이 친구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대략 반 년 쯤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지켜본 바로 두 사람은 여느 고등학생들보다 더 건전한 이성교제를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해 지면서 스킨십이 잦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회장님께서 우려하실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딱히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실장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이내 그의 등 뒤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이 회장이 던진 명패가 이 실장의 뒤편 벽에 있는 도자기를 박살 낸 것이었다.
“누가, 누가 자네한테 판단을 하라고 했나 앙?”
이 회장은 상당히 격앙 되어 있었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조차 더듬고 있었다.
“판, 판단은 내가 하는 거야? 알아? 넌, 넌 그냥, 넌 그냥 나한테 니 놈이 보고 들은 걸 개새끼가 접시를 물어오듯이 물어 오면 되는 거야 알겠나?”
이 실장은 고개를 떨군 채 이 회장의 질책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고, 이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탁자에 놓여 있는 재떨이를 집어 들어 이 실장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였으나 크게 한숨을 쉬고는 집었던 재떨이를 내려 놓았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한 편으로는 비통한 표정으로 이 실장을 쳐다 보며 말하였다.
“네 놈은 내가 처음 그룹에 발을 디딜 때부터 내 수족처럼 아끼고 부려왔던 놈이다. 내 누구보다 너를 믿었는데 그런 자네가 나를 실망시키다니.”
이 회장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면목 없습니다.”
이 회장은 고개 숙인 이 실장에게 등을 돌린 채로 긴 한숨을 내쉬며 커튼 사이 창 밖을 바라 보았다. 둘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고, 잠시 후 이 회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실장, 자숙하지.”
어느 정도의 징계는 예상 했었지만, 그 수위는 이 실장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였다. 자숙하라는 뜻은 바로 좌천의 의미였다. 이 회장이 그룹의 대표 자리에 앉은 후로 자숙하라는 저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간부와 임원들이 직급을 박탈당하고 한직으로 밀려났는지를 곁에서 지켜 본 이 실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떠한 설명도 핑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이 실장은 우선 이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 실장은 이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조용히 회장실 밖으로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가려는 이 실장에게 김 비서가 말을 걸어 왔다.
“저, 이 실장님.”
“어, 무슨 일이야?”
“회장님께서 내일부터 안성에 있는 물류창고로 출근하시랍니다.”
김 비서는 미안한 표정으로 회장의 지시를 이 실장에게 전달하였고, 이를 들은 이 실장은 빙긋이 웃으며 김 비서에게 말하였다.
“그래, 고마워. 그럼 수고해.”
“수고하십시오. 실장님.”
김 비서의 인사를 뒤로 하고 이 실장은 회장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의 로비로 내려왔다. 그 곳에는 언제 와 있었는지 이 실장이 맡고 있던 10여 명의 비서 2팀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이 실장은 웃으며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었다.
“아니 이 친구들 언제 이렇게 와 있었어? 일 안 하고 자리 비워도 되는 거야? 허허허.”
“실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자네들 벌써 내 소식을 들은 거야? 하여간 이 친구들 빠르네 빨라.”
“안성 물류창고로 발령 받으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장님, 지금 문제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야 이 친구들, 아니 자네들 대장이 창고로 쫓겨 가는데 그거 말고 더 큰 문제가 또 있다는 거야? 이거 서운한 걸 허허허.”
“아닙니다 실장님. 오해 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구요. 모르셨습니까? 저희 비서 2팀이 해체 됐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인가?”
한 직원의 말에 이 실장은 충격을 받았다. 팀 해체라니, 자신만 징계를 받으면 됐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저희 모두 지방 지점이나 물류창고로 발령 받았습니다. 심지어 오 대리 이 친구는 제주도 지사에 대기 발령이란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실장님?”
직원들 모두의 표정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실장은 생각하였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영숙이의 근황을 제대로 보고 하지 않은 것 때문이란 말인가. 하루 아침에 영문도 모른 채 팀이 해체 되다니. 이 회장이 다혈질에 아랫 사람들을 파리 보듯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단지 그 것만으로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였다. 일단 자초지종을 파악한 후에 대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한 이 실장은 흥분한 부하 직원들을 다독여 집으로 돌려 보내고,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하였다.
운전을 하면서 이 실장은 지나간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사실 평소 이 회장의 행동에서 이상하다고 느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이 실장이 의문을 느낀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이 회장은 영숙이의 일거수 일투족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갖고 집착하는지, 또 한 가지는 이 회장에게 영숙이와 성수의 사진을 건넨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회장을 보좌하는 비서실은 1팀과 2팀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팀의 업무는 그룹 내 외부의 업무와 관련된 일을 관리하는 것이었고, 이 실장이 맡고 있는 2팀은 이 회장 일가의 안전과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그런데 이 실장이 평소에 이상하다고 느껴왔던 점은 이 회장이 영숙이에게 취하는 태도였다. 이 회장의 직계 가족은 부인과 영숙이, 영미 세 사람이었는데 그들 모두에게 각각 전담하는 비서가 따로 있었지만, 이 회장이 유독 영숙이의 근황을 직접 보고 받고 챙긴다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자면 본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영미를 더욱 챙기고 아끼는 것이 정상일 텐데(실제로 영미가 태어난 이후로 영숙이는 혼외자라는 이유로 친족들에게 찬밥 신세나 다름 없었고, 영미가 그룹의 제 1 후계자로서 그룹과 오너 일가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영숙이와 달리 영미의 근황에 대해서는 좀처럼 물어보는 일조차 없었다. 이 실장은 그 동안 다른 그룹 오너의 비서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얘기를 들어왔지만, 이 회장처럼 자식에게 집착하는 경우는, 특히 혼외자에게 집착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실장이 옆에서 보기에 이 회장이 미운오리 새끼마냥 외로웠던 영숙이에게 아버지로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또한 그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돌이켜보면 평소 이 회장이 영숙이와 관련하여 내려 온 지시들은 보호와 애정의 차원이라기 보다는 감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회장에게 건네어진 그 사진들, 분명 이 실장 모르게 영숙이를 지켜보는 다른 시선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