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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22
사실 이 실장은 비서 2팀 외에 영숙이를 관리하는 다른 라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영숙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있었던 일진 사건 외에도, 정도는 덜 했지만 전에 그와 유사한 일들이 몇 번 있었는데, 그에 대한 일처리는 대부분 이 실장이 모르는 새 마무리 지어져 왔다. 그것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고 난폭한 방법으로. 그로 인해 이 실장은 비서 2팀 외에 영숙이를 관리하는 다른 라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일로 인해 그의 이러한 의문은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 회장의 영숙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의 이면에 단순한 부녀지간 외에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이 실장은, 자신과 2팀이 사는 길은 그 사연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현명하게 대처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 우선 비서 2팀 외에 영숙이를 관리하는 라인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 실장은 골똘히 생각한 끝에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김 과장, 허허 응 그렇게 됐네. 하여간 소문 참 빠르구만. 응 뭐 지시에 따라야지 별 수 있나. 그래. 말이라도 고마워. 아 참, 자네 내 부탁 좀 들어 줄 수 있나? 다른 게 아니고 말야, 자네 인사부 강 부장님하고 친하지? 어, 어, 아 대학 선배야? 아 거 참 잘 됐네. 그래서 말인데....”
그 날 저녁 성수는 학교를 마치고 집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의 일을 돕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11시가 넘어 손님들이 모두 나가고 문 닫을 준비를 할 시간이었고, 성수는 행주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엄마, 나 이제 식당 도울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울 엄마 힘들어서 어떡해?”
“얘, 누가 너더러 식당 일 도우라고 했니? 넌 공부 열심히 하는 게 엄마 아빠 도와주는 거야.”
“에이 또 공부 얘기는. 난 공부에 소질 없다니까. 엄마도 허락 했잖아. 가수 하라고.”
“난 모르겠다. 니 아빠가 그러라고 해서 별 말은 안 했는데, 정말 잘 돼가고 있긴 한 거니?”
“걱정 말아요 엄마. 나 자신 있다니깐. 기획사 사장님이 며칠 있다가 보쟤. 계약 하자고.”
“아니 그럼 성수가 진짜 가수가 되는겨? 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그릇의 물기를 닦던 장씨 아줌마가 성수에게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올 겨울에 데뷔한다고 했으니까 두고 보세요.”
“이야 우리 사모님 좋겠네. 아들이 유명한 가수도 되고. 호호호”
“좋긴 뭐가 좋아 에휴. 괜히 헛바람만 들고 잘 못 돼는 건 아닌지 원.”
“거 참, 애한테 힘내라고 말은 못할망정 뭘 그렇게 걱정을 늘어놓고 그래.”
주방 정리를 마친 성수의 아버지가 손을 수건으로 닦으며 홀로 걸어 나왔다.
“아들, 너 자신 있지?”
“그럼요 아버지, 걱정 마세요. 이 아들이 두 분 해외 여행 보내드릴 테니까.”
“오케이 좋았어. 기왕 하기로 맘 먹은 거 열심히 해 봐. 나중에 후회 없게. 아빠는 우리 아들 믿는다.”
“넵!”
아버지와 성수가 크게 웃었고, 성수의 어머니도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자정이 되어 식당은 문을 닫았지만, 일가족의 웃음 소리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다음 날, 평소처럼 연습실로 가기 위해 성수는 학교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부리나케 교문 밖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였다. 교문 앞에 세워진 고급 외제차의 뒤쪽 창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안에서 어떤 남자가 성수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 성수 학생? 박성수 맞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어가던 성수는 자기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제 이름을 아세요?”
“어, 아저씨는 이상한 사람 아냐. 학생이 박성수 맞지?”
“네, 그런데요?”
“이영숙이가 학생 여자 친구?”
“네 그런데요. 그걸 어떻게”
“훗, 난 영숙이 아버지께서 보낸 사람이야. 우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영숙이 아버지요?”
“그래.”
영숙이 아버지가 무슨 일로. 성수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였다.
“뭐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잠깐 얘기 좀 하지. 아, 가는 데까지 태워다 주면 되겠구나. 가면서 얘기 하자구. 자, 어서 타.”
말 없이 서 있는 성수에게 남자가 차에 탈 것을 재차 권하였고, 성수가 어쩔 수 없이 자동차에 올라타자 남자는 성수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성수 군은 어디로 가는 길이지?”
“네? 저 홍대요.”
“아 홍대? 김 대리, 출발하지.”
남자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에게 지시를 하였고, 차는 천천히 홍대로 출발하였다. 성수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위아래 검은색 양복을 차려 입은 40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머리도 짧고 인상도 살벌한 것이 꼭 조폭처럼 보였다. 남자가 성수에게 물었다.
“성수 군은 영숙이 아버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나?”
“자세한 건 잘. 그냥 대단하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는데요.”
“그래? 뭐 맞는 말이지. 우리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시는 분이니까. 성수 군은 내가 왜 갑자기 찾아 왔나 궁금하지?”
“네.”
“뭐 어른이 돼갖고 꼬맹이들 연애 놀음에 끼어든 거 같아서 좀 쪽팔리긴 한데, 서로 바쁘니까 단도직입적으로다가 얘기하자구. 영숙이 아버님이 자네가 영숙이 만나는 걸 못 마땅해 하셔.”
“네?”
성수는 깜짝 놀라 남자에게 되물었고, 남자는 성수의 그런 반응이 재밌는지 기분 나쁘게 실실 웃어댔다.
“왜? 못 알아 들었어? 그럼 다시 말해 주지. 영숙이 아버님이 학생이 영숙이 그만 만나라고 말씀 하셨다고. 그래서 내가 온 거고. 이제 알아 들어?”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성수는 영숙이를 만나지 말라는 남자의 통보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던 성수의 머릿 속에 영숙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이대로 있으면 다시는 영숙이를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물었다.
“영숙이도 알고 있나요?”
“아, 물론 영숙 양은 모르지. 알아서도 안 되고 말야. 오늘 있었던 일을 혹시라도 영숙 양한테 알리면 어떻게 될까? 그건 학생 상상에 맡길게.”
성수는 불길한 생각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작년에 소문으로 들었던 일진 사건이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남자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성수는 슬쩍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남자는 성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눈과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칼, 그는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었다. 남자의 표정에서 전해져 오는 살기에 성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제 갓 열여덟 살 먹은 고등학생이 겪기에는 너무도 공포스러운 상황이 차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뭐 아직 어린 나이긴 한데, 그래도 세상 물정 전혀 모를 나이는 아니잖아. 안 그래?”
성수는 대꾸도 못한 채 가만히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성수 군한테 오기 전에 부모님하고는 얘기 끝냈어. 한 1년쯤 외국에 나갔다 오면 다 정리가 돼 있을 거야.”
“외국이요?”
성수는 남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은 아직 학교도 다녀야 되고, 또 다음 주면 기획사 사장과 정식으로 계약을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뜬금없이 외국행이라니.
“외국이라뇨. 저 다음 주면 중요한 계약을 해야 될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 그거? 부모님께 얘기는 들었지. 그런데 말야. 어차피 영숙이 아버님 눈 밖에 나면 가수고 나발이고 학생은 아예 이 대한민국 땅에서 살 수가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성수는 기가 막혔다.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일이 자신에게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라니.
“그 뿐만이 아냐. 학생이 말 안 듣고 버티면 부모님한테도 좋지 않을 거야. 부모님 식당하시지?”
“네.”
“이번에 좋은 데로 옮겨 가시기로 했는데 아들이 마음 한 번 잘 못 먹어서 길거리에 나앉게 되면 나이 드신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지 않겠어?”
남자는 성수를 협박하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열 여덟의 사내아이를. 그 때까지 겁이 나도 꾹 참고 있었던 성수는 남자가 부모님 얘기를 꺼내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부끄럽지만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성수의 두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뭐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만, 영숙이 아버님이 워낙 성미가 급하신 분이셔서 말야. 비행기표는 부모님께 주고 왔으니 내일 바로 출발하면 될거야.”
남자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피울래?”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성수에게 권했다. 성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남자는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이 어린 친구, 좋게 좋게 생각해. 응? 좋잖아? 여자 친구 잘 만나서 해외 여행도 하고. 뭐 그냥 이사 가면 끝날 것도 같은데 우리 아가씨가 지 아버지 닮아서 성격이 웬간해야 말이지. 아마 갑자기 남자 친구가 사라진 걸 알면 전국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닐 거란 말이지. 그렇게 되면 피차 번거롭잖아? 좋게 생각하라구. 덕분에 집안 살림도 피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넌 운 좋은 거야. 너 우리 아가씨랑 엮여서 험한 꼴 당한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이번엔 회장님이 인심 쓰신 거니까 그냥 조용히 응? 알지?”
남자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였다. 성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멍하니 반대편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건물과 차, 사람들이 의미 없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더 이상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이 성수는 낯선 미지의 세계에 홀로 던져진 것처럼 그렇게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실장님 홍대입니다.”
“어 도착했나. 학생 여기서 내려 달라고 했지?”
성수가 남자에게 말하였다.
“저, 식당으로 데려다 주시면 안 될까요?”
성수의 부탁에 차는 이태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얼마가 지난 후, 차는 성수네 식당 근처 대로변에 도착하였고, 성수는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걸어갔다. 떠나가는 성수의 뒤로 남자가 크게 소리 질렀다.
“어이 학생, 우리 또 보지 말자구. 또 보면 큰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