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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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23

남자가 뭐라고 짖건 말건 성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터벅터벅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도착한 식당은 불이 꺼져 있었다. 지금쯤이면 저녁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일 식당이 문을 닫고 있었다. 

‘지잉 지잉’

성수의 호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에 차에 타면서부터 핸드폰이 계속 울렸는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받을 수가 없었다. 성수는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어 엄마.”

“성수야, 너 어디야 응?”

핸드폰 너머로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어, 나 가게 왔어.”

“니가 지금 거기를 왜 가. 너 괜찮은 거니? 너 무슨 일 없는 거야?”

“응 아무 일 없어. 엄마 가게 일 도와 줄려고 왔지.”

성수는 목이 메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엄마 왜 가게 문 안 열어? 응? 우리 가게 열어야지.”

“성수야 일단 빨리 집으로 와. 와서 얘기 하자. 아빠 기다리고 계셔.”

성수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성수가 말이 없자 걱정이 된 어머니는 성수를 급하게 찾았다.

“성수야, 성수야, 듣고 있니? 듣고 있으면 말 좀 해 봐.”

“어, 엄마. 듣고 있어.”

“너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 응? 엄마가 거기로 갈까?”

“아냐, 지금 집에 갈게. 금방 가요.”

“그래 성수야, 일단 집으로 와 알았지? 집에 와서 얘기 하자.”

“네, 끊어요.”

전화를 끊은 성수는 우두커니 서서 불 꺼진 가게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버린 성수, 식당을 떠나지 못 하고 한참을 목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후 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대문 밖에 나와서 초조하게 성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성수를 발견하자 어머니는 달려와서 아들을 와락 끌어 안았다.

“내 새끼, 그래 괜찮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는 거니?”

어머니의 음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 못 된 놈들이 애한테 무슨 짓을.”

어머니는 아들이 혹시나 다친 데는 없는지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였다. 아들을 바라 보는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성수 왔니? 왔으면 들어 와라.”

“아버지 기다리신다. 들어 가자.”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성수를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버지는 안주도 김치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평소 술을 잘 안 하시는 아버지인데 놓여 있는 빈 병을 보니 벌써 꽤나 많이 마신 상태였다. 

“성수야, 앉아라.”

성수는 말 없이 아버지 앞에 마주 앉았다. 

“너 한 잔 할래?”

성수는 말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버지는 손에 쥔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

아버지와 아들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 없이 한참을 마주 앉아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가슴 속 깊이 미안한 마음이.

“성수야.”

“네, 아버지.”

“영숙이가 그렇게 잘 사는 집 아이니?”

성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이, 아니지. 우리 집이 엉? 이 아빠가, 이 아빠가 너무 부족하고 못 나서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 친구도 만날 수가 없는 거냐? 응? 그런 거야?”

“죄송해요 아버지.”

“니가 뭐가 죄송한데? 엉? 우리 아들이 뭐가!”

이미 소주를 네 병이나 비운 아버지는 술기운이 머리 끝까지 올라온 상태였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잘 못 했다고 말하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취하고 싶었지만 취할 수 없는 아버지는 미안함과 답답함에 소주를 잔뜩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아버지”

성수는 걱정이 되어 아버지를 불렀다. 자신 때문에 괴로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성수였다. 

“성수야.”

“네.”

“낮에 어떤 남자가 이걸 놓고 가더라.”

아버지가 옆에 놓여 있던 봉투와 비행기 티켓을 성수 앞에 꺼내 놓았다. 봉투 속에는 얼핏 보기에도 적잖은 돈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남자가 놓고 간 것이겠지. 성수는 말 없이 봉투와 티켓을 바라보았다. 

“협박을 하더구나. 니가 그 아이와 헤어지지 않으면 험한 꼴을 당할 거라고. 그냥 이거 받고 좋게 좋게 해결하라고. 우리 식구 당장 이사 가라고. 너 당장 1년만 외국에 보내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성수야, 너 영숙이 좋아하지?”

성수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가수도 해야 되잖아. 니 평생 소원이잖아. 그치?”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수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 봤다. 부모님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성수의 눈은 이미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너 지금 외국 가면 가수 못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차라리 아이처럼 떼를 쓰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아들이 안 쓰러운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고, 성수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들의 눈물을 본 아버지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 이.”

아버지는 성수 앞에 놓여진 봉투와 티켓을 집어들더니 찢어버리려 하였고, 깜짝 놀란 성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아버지를 말렸다. 

“놔라 성수야. 놔.”

“아버지, 진정하세요 아버지.”

성수의 극진한 만류에 아버지는 반쯤 찢어진 봉투와 티켓을 바닥에 던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버지.”

성수는 울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를 감쌌다. 아버지는 옷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훔쳐낸 후 성수에게 말하였다. 

“성수야, 아빠 엄마가 말이다. 너 태어나기도 전에 맨 손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정말 열심히 일 해서 이만큼 살게 된 거야. 정말 힘들었지. 돌아 보면 정말 힘든 세월이었어. 그런데 아빠 엄마가 왜 그렇게 힘든 고생 다 참고 살아 온 줄 아니? 너 하나 보고 산거야. 응? 우리 박성수. 우리 아들은 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게 해 주자고. 엉? 엄마 아빠가!”

아버지는 소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켠 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너 상처 주고 하고 싶은 거 못 하면 엄마 아빠 고생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렇지? 성수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제깟 것들이 우릴 괴롭히면 얼마나 괴롭히겠냐 응? 성수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영숙이도 만나고, 가수도 하고. 우리 성수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소주를 다섯 병이나 비운 아버지는 완전히 만취 상태가 되어 자리에 앉은 채로 비틀거리며 점점 몸도 못 가눈 채 횡설수설 하기 시작하였다. 

“성수야, 끅 너 응?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빠는 니 편이야 니 편, 알지? 우리 잘 난 아들.”

아버지가 성수의 손을 꼭 쥐며 말하였다. 횡설수설 절반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성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얼마나 미안해 하는지를.

“아버지, 저 결정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성수는 술상을 미루고 아버지를 자리에 눕힌 후,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아버지를 덮어 주었다. 

“성수야, 하고 싶은 거 해. 음냐.”

정신을 잃었음에도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성수는 미안함을 느끼며 방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어머니가 주저 앉아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성수는 어머니를 일으켜 세워 끌어 안았다. 

“괜찮아요 엄마, 잘 될 거야. 나 믿죠?”

“성수야, 흑흑.”

어머니를 진정시킨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 온 성수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생에 다시는 없을 힘든 하루였다. 핸드폰을 꺼내 영숙이와 주고 받았던 문자를 하나 하나 다시 보았다. 즐거웠던 추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의 눈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손으로 닦아 내야만 했다. 문자를 다 본 후 영숙이의 단축번호인 1번에 자연스럽게 엄지손가락이 갔다. 그러나 성수는 누를 수가 없었다. 아까 본 남자의 얼굴, 그 무서운 기억들이 성수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남자의 얘기를 듣고 집에 오면서 영숙이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여자 친구 때문에 다시는 못 올지도 모를 꿈을 접어야만 한다니,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 먼 이국땅으로 떠나야만 한다니,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원망은 미안함으로 바뀌어 갔다. 남자의 얘기를 듣고 자기의 앞 일만을 떠올렸던 자신이, 영숙이가 얼마나 힘들지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의 비겁함이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도 남자의 협박이 두려워 떠난다는 인사조차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영숙아, 미안해.”

힘겹게 마음을 열어 준 영숙이를 지켜 주지 못 하는 자신이 한 없이 밉고 원망스러운 성수. 잠 못 든 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새, 어느 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기나 긴 밤이 지나가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나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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