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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24
만원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영숙이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썩어 있었다.
‘박성수, 넌 뒤졌어. 이게 아주 풀어놔 주니까 천지분간을 못 하네.’
성수와 같이 기획사를 다녀 온 이후로 성수의 사정을 알게 된 영숙이는 성수가 마음 편히 연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등하교도 혼자 하고(성수가 연습생 생활을 하기 전에는 일부러 영숙이 집 앞의 버스정류장에 아침 일찍 가서 영숙이와 함께 등교하곤 하였다.), 가능하면 신경 쓰이지 않게 전화도 먼저 걸지 않았다. 성수도 그런 영숙이의 배려를 알기에 방과 후에 함께 놀지는 못 하지만 그 전보다 문자나 전화를 더 자주 했었다. 그러나 어제는 밤이 늦도록 전화 한 번, 문자 한통이 없었고, 성수가 자신에게 점점 소홀해 진다고 생각한 영숙이는 단단히 삐지고 만 것이었다.
‘학교 가서 보자. 박성수. 너 춤은 다 췄다.’
영숙이는 성수에게 속으로 갖은 저주를 퍼부으면서 등교를 하는 참이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성수의 교실로 뛰어가려 하였으나, 간신히 지각을 면한 영숙이는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성수네 반으로 달려가서 큰소리로 성수를 불러댔다.
“야 박성수! 빨랑 뛰어 나와.”
그러나 성수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일제히 영숙이를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영숙이는 교실문 쪽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성수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야, 너 박성수 못 봤어? 걔 매점 갔냐?”
영숙이의 질문을 받은 아이는 황당하다는 듯이 영숙이에게 되물었다.
“야 너 무슨 소리야? 성수 전학 갔잖아. 아침에 선생님이 그러던데?”
성수와 영숙이가 사귀는 것은 2학년 아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인데, 남자 친구가 전학 간 것도 모르는 영숙이가 어처구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모르는 영숙이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야, 나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 박성수가 시켰냐? 자기 전학 갔다고 하라고?”
“얘는 자꾸 무슨 헛소리야. 너 진짜 성수 전학 간 거 몰랐어? 너네 사귀는 거 맞아?”
영숙이는 그제서야 분위기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수근대고 있었고, 방금 전까지 자기와 얘기를 나눴던 아이도 앞자리의 친구와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교실을 터벅터벅 빠져 나온 영숙이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성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음성 메시지 사서함으로 넘어가기를 수 차례, 영숙이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 하고 전화기를 바닥에 집어 던진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어떻게 된 거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전학을 갔다고?’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이 황당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성수와 나눴던 이야기와 모습들을 떠올려 보려 하였지만, 백지처럼 하얘져버린 머릿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넋이 나간 채로 서 있기를 몇 분, 쉬는 시간이 끝나고 복도에 서 있는 영숙이를 본 선생님은 영숙이를 불렀다.
“이영숙, 거기서 뭐 해? 수업 시작했잖니. 어서 교실로 들어가.”
선생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영숙이는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줍고는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숙이가 걸어 가는 방향은 교실 쪽이 아니었다.
“야 이영숙, 이영숙 너 어디 가니? 빨리 안 돌아와?”
자신을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영숙이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영숙이는 성수네 가게에 몇 번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설령 진짜 전학을 갔더라도 가게와 집은 그대로 있겠지라고 생각한 영숙이는 학교를 뛰쳐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성수네 식당으로 향하였다.
“아저씨, 좀 빨리 가주세요. 급해요.”
택시를 탄 영숙이는 안절부절 못 하고 택시 기사에게 빨리 가달라고 재촉하였다.
“아니 어린 친구가 뭐 이리 성미가 급해. 알았으니까 앉아 위험하니까.”
영숙이의 바람과 달리 길은 막혔고, 택시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설 때마다 답답함에 영숙이의 심장은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택시가 성수의 식당에서 멀지 않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을 때, 영숙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택시에서 식당까지 뛰기 시작하였다. 턱까지 차 오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달리기를 10여 분, 성수의 가게 앞에 도착한 영숙이는 닫혀 있는 가게를 보고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이면 영업 준비로 한창 바쁠 시간일 텐데 불 꺼진 가게 내부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가 않았다. 영숙이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게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계세요?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영숙이는 가게의 문을 두드리고, 또 거칠게 잡아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줄을 몰랐고, 불이 꺼진 가게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가게 문을 두드리던 영숙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얼마 못 가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성수가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현실만은 명확하게 깨닫게 된 영숙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다가 결국엔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그런 영숙이를 보고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 말을 걸어오곤 하였으나, 그에 아랑곳 없이 영숙이는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마냥 세상에 다시 없이 서럽게 울 뿐이었다. 결국에는 학교에 있을 시간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길바닥에 울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누군가의 신고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영숙이를 강제로 경찰서로 데려 갔고, 연락을 받고 달려 온 차 집사가 한참을 달래고서 나서야 영숙이는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시각, 전 날 성수를 만나 이 회장의 지시를 전달했던 남자가 회장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 그래, 나 왔다고 말씀 좀 전해 줘.”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가 인터폰으로 이 회장에게 남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회장님, 황 실장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실의 문을 열어 주었고, 남자는 이 회장에게 걸어가 인사를 하였다.
“그래, 확인 했나?”
“예 회장님, 좀 전에 비행기에 타는 거 직접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음, 현지 직원한테 스케쥴 확인 하고, 말 안 나오게 끝까지 마무리 잘 해.”
“예 걱정 마십시오. 한 동안 그 쪽 직원이 헛짓거리 못 하게 옆에 착 달라붙어서 관리할 겁니다. ”
“그래, 영숙이는 좀 어떤가?”
“오면서 차 집사한테 얘기 들었는데, 그 놈 식당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불고 하는 걸 간신히 달래서 집으로 데려왔답니다. 지금 방 침대에 누워있답니다.”
“음.”
이 회장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 하였고, 눈을 뜨자 황 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마 영숙이 한 동안 학교에 못 갈 거야. 학교에는 아파서 못 나간다고 미리 연락 해놓고. 그 놈 식구들은 어떻게 됐지?”
“예, 눈에 안 띄게 아예 부산 쪽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뭐 집하고 가게 자리는 거기 담당 직원이 알아서 물색해 줄테고, 이 쪽에 남겨 놓은 것도 최대한 빨리 정리 하겠습니다.”
“영숙이가 사람 시켜서 찾으려 들거야. 입단속 잘 시켜.”
“예 물론이죠. 전화 번호도 바꾸고, 당분간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말라고 단단히 단도리 쳐놨으니까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음, 좋아. 알았으니 그만 나가지.”
“옙,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황 실장은 90도로 인사를 한 후 회장실을 빠져 나갔고, 이 회장은 굳게 입을 다문 채 황 실장이 나간 자리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생각도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찌푸려진 미간 사이로 불길한 기운만이 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영숙이가 성수와 헤어지고 3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영숙이는 밥도 거른 채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성수를 떠나보내고 느낀 상실감과 슬픔, 절망감에 눈물이 마를 새 없었던 영숙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별의 이유조차 말하지 않고 떠난 성수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영숙이의 마음을 채워가고 있었다. 사흘 째 잠도 제대로 못 잔 영숙이는 퀭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지난 며칠 간 있었던 일들을 이리 저리 껴 맞추며, 혹시나 지금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어떤 특별한 일도 없었을뿐더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다람쥐쳇바퀴 돌 듯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영숙이는 생각하였다. 적어도 성수의 입으로 직접 왜 갑자기 자기를 떠났는지 변명을 들어야겠다고. 왜 말도 없이 급하게 떠나야 했는지 변명이라도 들어야겠다고. 오랜 생각 끝에 영숙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누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선생님이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가게를 정리해야 되니까 근처 부동산에 연락처가 있을 지도 몰라, 일단 나가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사흘 째 밥도 안 먹고, 잠도 잘 못 자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였지만 영숙이는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방을 나서는데 거실 쇼파에 앉아 있던 차 집사가 현관문을 막아 서며 영숙이를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