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25 / 0093 (25/93)

0025 / 0093 ----------------------------------------------

[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25

“아가씨, 아니 지금 그 몸을 하고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아저씨,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안 돼요 아가씨. 지금 쉬셔야 됩니다. 며칠 째 식사도 안 하셨잖습니까.”

“금방 갔다 올거야 아저씨. 그냥 모른 척 해줘요 응?”

“안 됩니다. 회장님께서 얼마나 걱정 하시는데요. 지금 이렇게 나가시면 집안 사람들 전부 큰 일 납니다. 그리고 아가씨 안색이 이렇게 안 좋은데 어떻게 내보내 드리겠습니까 제가.”

영숙이는 자기 속도 모르고 앞을 막아서는 차 집사가 답답하고 야속했다. 

“아저씨, 금방 나갔다 온다니까. 아빠 오기 전에 올거야 응? 제발?”

“그럼 식사 먼저 하시고 저랑 같이 나가요 아가씨.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저씨, 정말 이러기야? 정말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영숙이는 막무가내였고, 영숙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차 집사는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집 밖에 나서기도 전에 실랑이 하다가 제 성질을 못 이겨 까무러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저랑 약속해요 아가씨. 회장님 오늘 저녁 9시 쯤에 들어오실 거에요. 최소 한 시간 전에는 꼭 집에 돌아온다고,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곧바로 전화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죠?”

“응, 아저씨. 그렇게 할게.”

“하, 제가 아가씨를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엉 고마워 아저씨, 금방 갔다 올게.”

영숙이는 황급히 집을 나섰고, 그런 영숙이를 지켜보던 차 집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나가셨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집을 나선 영숙이는 우선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전학 간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왜 떠났는지 이유라도 알까 싶어서였다. 영숙이는 택시를 타기 위해 대로변으로 걸어갔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이영숙씨 핸드폰 맞나요?”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저 성수랑 같이 기획사에서 연습했던 형인데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성수와 같이 연습했던 연습생? 연습생이 갑자기 무슨 일일까. 혹시 성수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 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성수가 뭐 좀 전해 달라고 해서요.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네, 네 지금 갈게요. 어디신가요?”

“네 저 지금 회사 연습실인데요. 제가 그 쪽으로 갈까요?”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저 거기 가본 적 있어요.”

“그럼 30분 후에 회사 앞에서 뵐 수 있을까요?”

“네 금방 갈게요. 도착하면 전화 드릴게요. 네, 네.”

영숙이는 전화를 끊고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 홍대요.”

가는 내내 영숙이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전해 줄게 있다고? 이 사람을 만나면 성수가 떠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온갖 상상이 그녀의 머릿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홍대에 도착한 영숙이는 택시에서 내려 약속 장소인 ‘지앤비 기획’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 전 성수와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을 아픈 마음을 간직한 채 혼자 걷고 있는 영숙이. 좁다란 골목을 지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전에 봤던 기획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는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자신에게 전화를 건 남자인 것 같았다. 영숙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보았다. 

“저 혹시 전화 주셨던...”

“아 네, 영숙씨?”

“네 맞아요. 제가 이영숙이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둘은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성수한테 말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저는 성수랑 같이 연습했던 장준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 네.”

영숙이는 준영이라는 이름이 낯이 익었다. 

‘아 맞다. 성수랑 같은 팀으로 데뷔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영숙씨,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렇고 자리를 옮길까요? 회사 뒤 편에 커피숖이 있는데.”

“네, 그러세요.”

영숙이는 준영의 뒤를 따라 커피숖으로 걸어갔다. 회사 뒤쪽의 내리막길을 조금 걸어가자 넓은 사거리가 나왔는데 커피숖은 그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커피숖으로 들어가 음료를 주문하였다. 

“저 아이스 아메리카노하구요, 영숙씨는 뭐 드실래요?”

“아 네 전 아무거나. 아 콜라 주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하고 콜라 주세요. 영숙씨 저 쪽에 앉아 계세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영숙이는 준영이 가리킨 창가쪽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준영이 음료를 갖고와 영숙의 맞은 편에 앉았다. 준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많이 당황하셨죠?”

준영의 말이 두서가 없었지만 성수의 얘기겠지.

“네.”

“저도 사흘 전 아침에 성수 전화 받고 알았어요.”

‘전화를 했다고? 여자 친구인 나한테는 한 마디 말도 없었는데?’

영숙이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한 말로 할 수 없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자세한 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런 영숙을 보며 준영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많이 기분 나쁘셨을 거에요. 영숙씨한테 떠난다고 말도 없었다면서요.”

“도대체 어떻게 된거죠? 만나서 무슨 말을 하던가요?”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단지 급한 사정이 생겨서 식구들이 집하고 가게도 채 정리 못 하고 멀리 떠나야 되게 생겼다고만 들었거든요. 아침 일찍 성수한테 전화가 왔는데 급하게 보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홍대역 안에서 만났는데, 영숙씨한테 이 쪽지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준영이는 품 속에서 곱게 접은 쪽지 한 장을 꺼내 영숙이에게 건넸다. 영숙이는 건네받은 쪽지를 받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표정이 많이 안 좋았어요. 뭐에 쫓기는 것처럼 엄청 다급해 보였구요. 그냥 저한테는 미안하단 말만 되풀이 했죠. 저하고 한 팀으로 데뷔할 계획이었거든요. 혹시 자기 때문에 피해가 가는건 아닌가 하고 가면서도 계속 미안해 했어요. 진짜 착한 녀석이었는데.”

“네, 알아요.”

“조만간 사장님하고 미팅할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내정이 되어 있었거든요. 사장님이 연습생들 연습 동영상 보시고는 성수가 제일 괜찮은 것 같다고 실장님한테 말씀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실장님도 성수가 거의 확정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며칠 전에 말씀하셨었는데.”

준영은 말 끝을 흐렸다. 그의 말투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단순히 자신의 데뷔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아끼는 동생이자 팀원이었던 성수가 자신의 꿈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서라는 것을 그의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쪽지에 성수가 영숙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을 거에요. 영숙씨가 아마 저보다도 더 잘 아실거에요. 성수가 어떤 놈인지. 그렇죠?”

영숙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떠난다고 말 할 수 없었던 데에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에요. 저랑 만났을 때도 급하게 떠나면서도 꼭 이 쪽지를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 했었거든요. 그 때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네요.”

두 사람은 말 없이 음료를 마셨다. 영숙이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그래 뭔가 이유가 있겠지. 성수는 무책임한 놈이 아니니까. 그래 분명 말 못할 이유가 있었을거야. 분명히.’

영숙이는 잠시나마 성수를 오해했던 자신이 밉고 속상했다. 말로만 전해 들었음에도 어떤 말 못할 사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급하게 떠나야만 했던 성수를, 그리고 이 쪽지를 영숙이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성수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영숙이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의 풍경은 영숙이의 마음과는 서글픈 마음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 더 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유리창을 통해 내리쬐는 5월의 뜨거운 햇살에 영숙이는 눈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 때였다. 커피숖 바로 길 건너편 멀지 않은 거리에 짙게 썬팅이 되어 있는 차의 운전석에서 유리창을 반쯤 내린 채 자신을 쳐다 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영숙이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영숙이는 콜라를 마시며 준영을 쳐다 봤다. 아니 쳐다 보는 척 하였다. 차의 남자가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 영숙이는 눈에 띄지 않게 남자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 못 가 남자는 다시 영숙이를 쳐다 보기 시작하였다. 분명 쳐다 보고 있는게 맞았다. 영숙이는 이 회장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비서팀 직원을 시켜 항상 먼 거리에서 지켜보도록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얼굴도 잘 알고 있었다. 비서팀에서 영숙이를 담당하는 직원은 이명훈 실장과 유호준 대리, 그리고 입사한 지 1년 밖에 안 된 이병규씨. 그들은 항상 영숙이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먼 거리에서 영숙이를 지켜 보았고,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는 사이였다. 특히 이명훈 실장의 경우는 드물게 현장에 나와 자신을 지켜 봤는데, 그럴 때면 맛있는 것도 사 주고 고민도 들어 줄 정도로 영숙이와는 제법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들의 미행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지시 때문이라는 점과, 그 지시가 혹시라도 돈을 노리는 놈들에게 딸이 해코지를 당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영숙이는 이 날 이 때껏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바깥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느낌에 분명 아버지 회사의 직원 같은데 전과는 다른 뭔가 불쾌하고 무례한 시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이질감에 영숙이는 남자가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어 몰래 동영상을 찍기로 하였다. 최대한 남자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조심스레 동영상을 찍어 저장한 후, 영숙이는 준영에게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말하였고, 커피숖을 나선 두 사람은 인사를 한 후 헤어져 각자 갈 길로 걸어갔다. 시간을 보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은 영숙이는 이명훈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