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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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31

“창식아.”

창식이를 바라보는 진영이의 눈가도 어느덧 촉촉해져 있었다. 창식이는 오른손을 들어 진영이의 왼쪽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더 이상은 내 여자가 아닌 사람의 뺨을 어루만져도 되는 것인가. 창식이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고, 그렇게 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다시 한 번 슬픔과 절망 속에 내던져지는 자신을 느껴야만 했다. 창식이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꺼내려고 했으나 목이 잠겨 잘 나오지가 않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한 창식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사는거야?”

진영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기숙사 살았었잖아. 언제 옮긴거야?”

진영이는 곡를 들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식이의 손에 뜨거운 눈물이 매만져졌다. 

“저, 저 진영아.”

막상 진영이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영이가 고개를 들어 창식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 봤다. 그 녀의 눈은 뭔가를 결심한 듯 하였다. 진영이가 말하였다. 

“여기까지 다 알고 왔을 테니까 그냥 말할게.”

진영이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한 창식이는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리고 한발짝 물러섰다. 

“나 다른 남자 만나. 우리 과 예비역 오빠고 나 지금 그 오빠랑 같이 살아. 지금 내가 나온 집에 그 오빠 있어. 이제 됐니?”

진영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식이는 진영이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그 때 마침, 파란 문 안에서 낯선 남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야, 안 들어오고 뭐 해?”

그 예비역 오빠라는 사람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 남자는 진영이가 뺨을 손으로 감싸쥔 채 낯선 남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자 금새 창식이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당신 뭐야. 너 얘한테 무슨 짓 한거야? 진영아 괜찮아? 응?”

남자가 고개를 돌려 진영이에게 물었고, 진영이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말하였다. 

“오빠, 들어가.”

“뭐?”

“별 일 아냐. 들어가 있어.”

“뭐? 별 일이 아닌게 아닌데 무슨 소리야? 이거 도대체 뭐 하는 놈인데?”

“들어가.”

진영이의 단호한 말투에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창식이를 쏘아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둘만 남은 창식이와 진영이. 짧막한 침묵 끝에 창식이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자.”

“말해 봐.”

“그 날 왜 그랬냐. 그냥 헤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잤냐구?”

진영이가 되물었고, 창식이는 말 없이 진영이를 쳐다 봤다. 

“니가 항상 원하던 거였으니까. 한 번은 니 소원 들어주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진영이의 말에 창식이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진영이의 뺨으로 손이 올라가려 하였으나 간신히 참는 창식이었다. 

“이것만 알아 둬. 그 날 나는 아무 여자나하고 섹스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 여자친구 진영이, 그 동안 응? 몇 년 동안 마음 속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내 여자친구랑 하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그 날 나하고 잔 여자는 내 여자친구가 아니었구나. 그냥 난 길거리에서 여자를 산 거구나.”

창식이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자신의 모진 말이 비수처럼 진영이의 가슴에 꽂히고 있었다. 진영이는 한 마디 대꾸 없이 날아오는 비수를 온 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넌 나쁜 년이야. 더러운 년. 퉤.”

창식이는 바짝 마른 입 안의 침을 끌어 모아 바닥에 내뱉었다. 

“진작에 말했으면, 다른 남자 생겼다고 말 했으면 아마 난 너하고 안 잤을거야. 내가 왜 지금 기분이 더러운지 알아? 너가 딴 남자 생겨서도 아니고, 그것도 모르고 병신 같이 여기까지 쳐내려와서가 아니라, 내 첫 경험을 길거리 창녀한테 바쳤다는 그 더러운 사실 때문이야. 알아?”

창식이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창식이었다. 진영이에게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모진 말을 쏟아내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 숙이고 있는 진영이가 안쓰러웠다. 차라리 쿨하게 보내 줄 것을. 이러고 있는 자신이 한 없이 못 났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창식이는 진영이를 뒤에 남겨 둔 채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다신 보지 말자.“

창식이는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흐흐흑”

창식이는 다시 한 번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었다. 참았던 슬픔이 뜨거운 울음소리가 되어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모진 말은 하지 말 것을. 왜 이렇게 된 건지 이유라도 물어 볼 것을. 창식이의 흐르는 눈물 방울 방울마다 짙은 회한이 한 움큼씩 담겨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질 없는 일. 그녀는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창식이는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간신히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서는 나오지를 않았다. 그런 창식이에게 하숙집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저 하루 빨리 창식이의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를 빌어줄 수 밖에 없었다. 

창식이는 학교도 가지 않고 며칠 동안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영숙이만 바빠졌다. 전화도 꺼놓고 방구석에 틀어박힌 창식이의 학점이 빵꾸 나지 않도록 영숙이가 출석 체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창식이의 시간표를 알아내어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리출석을 해주었다. 심지어 둘의 수업 시간이 겹칠 때는 자신의 출석을 먼저 하고 허겁지겁 창식이의 수업에 달려가 대리출석을 해 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영숙이었다. 수강생이 2~300명씩 되는 교양수업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수강생이 수십 명에 불과한 전공필수 수업이었다. 인원이 적다 보니 목소리나 모습이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강동원.”

“네”

“전지현”

“네”

“김창식”

“네”

“김창식?”

“네? 네.”

강의실 뒤 쪽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교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모자를 푹 눌러 쓴 학생이 앞에 학생 등 뒤에 숨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거기 학생. 김창식 맞아?”

수근대는 학생, 키득키득 웃는 학생들로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그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맞는데요.”

“어이 거기. 고개 좀 들어 봐.”

교수가 불렀으나, 이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개를 들 줄을 몰랐고, 화가 난 교수가 목소리의 주인공에 엄한 목소리로 경고를 하였다. 

“이봐, 자네 누군데 교수한테 장난을 치고 그러나? 엉? 고개 빨리 안 들면 김창식이는 무조건 F야 F학점. 알았어?”

그제서야 목소리의 주인공이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리면 고개를 내밀었다. 영숙이었다. 학생들이 깔깔 대고 웃었다. 

“자네 누구야? 왜 김창식이를 부르는데 자네가 대답하나?”

영숙이는 민망함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전 창식이랑 같은 하숙집에 사는 친군데요, 창식이가 몸이 너무 아파서 나오지를 못 해갔구요. 제가 대신 들어 온 거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영숙이가 고개 숙여 사과하였다. 그러나 교수는 화가 풀리지가 않았다.

“아니 아프다고 이런 식으로 장난을 쳐? 김창식이가 그래 달라고 자네한테 부탁하던가?”

깜짝 놀란 영숙이는 손사래를 치며 말하였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창식이는 아무 것도 몰라요. 걔 지금 물도 못 먹고 계속 누워 있거든요. 정말 창식이는 아무 것도 몰라요. 한 번만 봐주세요. 네? 교수님 한 번만요.”

영숙이는 울상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비록 잘못한 일이었지만, 친구를 위한 영숙이의 마음과 태도가 귀여웠던 교수는 기분이 풀렸고, 영숙이에게 말하였다. 

“친구가 아프다고 그러면 되나.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장난 치면 안 돼. 알았어?”

“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봐 주세요 교수님.”

“김창식이는 진단서 끊어 오면 출석 처리 해 줄테니까 학생은 그만 나가 봐요. 다음에 또 그러면 진짜 혼 나.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숙이가 방긋 웃으며 여러 번 허리를 숙여 교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영숙이가 나가려는데 앞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영숙씨 맞죠? 창식이 무슨 일 있으면 얘기를 하시지. 내가 대출 할 걸 괜히.”

남학생은 명수였다. 영숙이가 명수에게 말하였다. 

“그러게요. 수고하세요.”

영숙이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 나왔고, 영숙이가 빠져 나간 뒤로도 학생들은 한참을 수근대고 키득키득 거렸다. 후에 이 일은 창식이네 반 친구들과 선배들로부터 영숙이가‘여자 김창식’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영숙이의 고생을 전혀 모른 채 창식이는 방에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고,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은 지도 일주일, 여전히 실연의 아픔을 떨쳐내지 못한 창식이는 깊은 한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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