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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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32

‘똑똑똑’

오후 열 시가 넘은 시각에 누군가가 창식이의 방문을 노크하였다. 창식이는 깨어 있었지만 말 없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다시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그러나 창식이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고 그저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문 너머로 영숙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야 자냐? 나 들어간다.”

문이 열리고 영숙이가 들어 와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창식이는 등을 돌린 채 방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불도 끄고 누워 있냐. 자는 거 아니지? 야 배 안 고파? 너 거의 일주일 째 아무 것도 안 먹었어.”

미동도 않는 창식이. 영숙이는 창식이의 등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학교에 열녀문이라도 세워 드려야겠어. 그냥 변태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순정파인 줄은 몰랐네. 다시 봐야겠어.”

등 뒤로 캔을 따는 소리가 들렸고, 무언가를 꼴깍꼴깍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냄새로 보아 맥주인 것 같았다. 

“캬, 시원하다. 한 잔 안 할래?”

영숙이가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창식이는 묵묵부답이었고, 영숙이는 본의 아니게 혼잣말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니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만사가 다 귀찮고, 그냥 혼자 있고 싶겠지.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될 거야.”

영숙이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고, 넋두리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밥은 좀 먹어라. 그 애가 너한테 잘못한 게 화가 나서 굶는거야? 그래도 밥은 먹고 화 내. 아니면 니가 잘못한 게 자꾸 떠올라서 미안해서 굶는거야? 그래도 밥은 먹고 미안해 해라. 니가 자리에 드러눕는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고, 그런다고 그 아이가 돌아오지도 않아. 너도 알지? 내가 아무리 힘들어하고 절망 해도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더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 있잖아 왜. 조금 더 편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영숙이는 술을 한 모금 넘기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창식이는 자는지 깨어있는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누워 있었고, 영숙이도 한참을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방에는 두 사람의 조용한 숨소리와 이따금 술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영숙이는 술을 마시며 어두컴컴한 창 밖을 바라보며 옛날 생각에 잠겼다. 어느샌가부터 영숙이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성수의 얘기를 읊조리기 시작하였고, 창식이는 등 너머로 영숙이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아빠한테 우겨서 나 혼자 집을 얻어서 인천으로 이사를 갔어. 학교도 전학 갔고. 힘들더라. 그 아이랑 같이 다니던 학교 매점, 운동장, 근처 떡볶이집. 그리고 날 보면 수근대는 아이들까지. 나도 그 때 참 힘들었거든. 그냥 다 귀찮고, 피하고만 싶더라.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 아이를 만나고 나 많이 바뀐 거거든. 다시 만났을 때 못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더라구. 그래도 그 곳에서는 영 자신이 없어서 이사를 간 거야. 전학 간 학교에선 참 열심이었지. 사람들하고 어울리려고. 아빠 회사 사람들도 근처에 절대 못 오게 하고 하여간 열심히 했어. 그러니까 나도 제법 남들하고 똑같은 사람 흉내는 낼 수 있더라. 남들처럼 축복 받지 못 하고 태어난 나도 말야.”

영숙이의 넋두리에서 그 녀가 그동안 짊어지고 왔을 슬픔과 고통, 외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런데도 이렇게 꿋꿋했구나. 가끔은 엉뚱해 보이고 과하다 싶은 그 녀의 행동들이 사실은 자신의 약한 모습, 슬픈 얼굴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생각하니 영숙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창식이는 조용히 돌아누워 영숙이를 쳐다 봤다. 불 꺼진 방 안으로 환하게 떠 있는 달빛이 부서지듯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고,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앉아 있는 영숙이는 창식이가 돌아누워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창 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성수를 찾으려고 많이 노력했어. 그 아이는 단지 내 남자친구 이상의, 음 뭐랄까. 내가 사람이고 싶은 목적?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라고 해야 될까. 아 말이 어렵다. 몰라 몰라 헤헤헤. 어려운 말은 영숙이하고 안 어울리지. 그냥, 그냥 딱 한 번만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 성수.”

어둑어둑한 방안에서 영숙이의 표정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 녀의 마음이 어떤지 창식이는 잘 알 수가 있었다. 잠시 말 없이 달빛을 바라보는 그녀의 뺨에 달빛을 머금은 은하수가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나보다 니가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차이진 않았잖아 헤헤헤. 피곤한데 내가 말 너무 많이 했지? 미안, 이상하게 난 술만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더라구. 쉬어라 나 간다.”

영숙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식이를 보았고, 창식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너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좀 전부터.”

“야, 일어났으면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그냥 너 말 하는 거 듣고 있었어. 술 다 마셨냐? 나도 좀 먹자.”

창식이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눈 앞에 있는 맥주캔을 땄다. 

“이 기지배 깡 술 마시고 있었네? 야, 너는 일주일 굶은 친구한테 안주도 없이 술 먹자고 들어오는 게 매너냐 응?”

“헤헤 그러네.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야, 마시지 말고 있어 봐. 내가 안주 가져올게. 아, 아니다. 너 죽 먹어라. 너 너무 오래 굶어서 죽부터 먹어야 돼.”

“죽이 어딨어?”

“내가 만들면 되지.”

“니가 죽을? 너 만들 줄은 알어?”

“그냥 밥 넣고 채소 좀 넣어서 팔팔 끓이면 되지 그게 뭐가 어렵다고.”

“오랜만에 먹는 밥인데 좀 맛나게 먹고 싶다 친구야. 믿어도 되는 거지?”

“야 세상에 사람이 못 먹을 게 어딨어. 그냥 갖다 주면 주는대로 먹어.”

“끙”

영숙이는 주방으로 달려가 냄비에 물을 앉히고, 밥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채소를 꺼내 칼로 다듬기 시작하였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창식이에게 흥겨운 콧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고마운 친구. 자신에게 힘을 북돋워 준 영숙이의 저 듣도 보도 못한 멜로디의 콧노래가 세상 어느 가수의 노래보다도 아름답게 들려 왔다. 창식이는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크으.”

알싸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따라 빈 속을 훑어 내려갔다. 빈 속이라 속이 많이 쓰렸다. 잔인한 첫사랑의 기억처럼.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여전히 속이 쓰렸지만 처음보다는 좀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점점 무뎌지겠지. 쓰디쓴 맥주의 맛도, 첫사랑의 기억도. 창식이가 상념에 젖은 사이 고소한 죽의 냄새가 방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이 기지배, 혼자서 살았다더니 그래도 음식은 좀 할 줄 아나 보네.”

제법 구색을 갖춘 음식 냄새에 창식이는 내심 기대가 되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영숙이. 창식이는 그 녀를 보면 왠지 기분이 업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갑자기 식욕이 올라온 창식이는 맛있는 죽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잠시 후, 자신 앞에 펼쳐질 충격적인 현실을 알지 못한 채.

입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민용이는 요새 기분이 좋지가 않다. 영애와의 사이가 삐걱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사정은 민용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자신만 잘 하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민용이는 영애에게서 용기가 되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녀는 민용이에게 어떤 말도 속시원하게 해 주는 법이 없었고, 입대 날짜가 다가올수록 민용이는 점점 애가 닳고 있었다. 사실 민용이는 남자답게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지만 여자한테 은근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항상 여자친구의 소재를 알아야 하고, 쉬는 날에는 꼭 같이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행여 여자친구가 집에 늦게 들어갈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는 민용이에게, 어쩌면 항상 자신을 반갑게 맞아 주고 기다려주는 영애는 다시는 못 만날 천생연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민용이는 밤마다 영애의 방에 찾아가 어르고 달래며 기다리겠노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 했지만 영애는 요지부동이었고, 초조한 민용이는 그런 영애에게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한 편, 창식이는 일주일만에 학교에 나갔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학교 식당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너 괜찮아? 영숙씨가 너 많이 아프다고 하던데?”

명수가 창식이에게 물었다. 

“응, 괜찮아. 그냥 몸이 좀 안 좋았어. 근데 영숙이한테 어떻게 들었냐? 너 영숙이랑 연락해?”

“야, 그럼 전화를 하지 그랬어. 영숙씨가 너 때문에 고생했잖아. 너 대신에 니 수업 일일이 들어가서 다 대출한 거 같더라. 우리 수업 들어 왔다가 교수님한테 걸려서 얼마나 혼 났는데? 지금 우리 과 사람들은 너하고 영숙 씨가 사귀는 줄로 알아. 야 진짜냐? 응 브라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창식이는 새삼 영숙이가 고마웠다. 

“그런 거 아냐 새꺄.”

“안 사귄다고? 진짜로?”

“그래, 절대로 아니거든?”

“이야, 영숙씨 의리 쩌네. 야 나 좀 소개시켜 달라니까. 볼수록 매덩이네 매덩.”

“몰라. 영숙이는 너한테 관심 없어.”

“아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날도 날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는데?”

“아유 시끄러. 야 밥이나 먹어.”

창식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민용이었다. 창식이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형.”

“창식아 너 어디냐?”

“저 학교 식당이요.”

“그래? 밥 먹었어?”

“네 지금 막 먹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 밥 좀 사주려고 전화했지. 너 수업 몇 시에 있냐?”

“저 오후 세시 수업이요.”

“그럼 시간 좀 있네. 우리 잠깐 차나 한 잔 할까?”

“그럴까요? 어디에서 보실래요?”

“엉 학교 앞에 스타벅스로 와. 지금 간다.”

“네, 저도 지금 갈게요. 이따 봐요 그럼.”

창식이는 전화를 끊었다. 

“나 좀 일어나야겠다. 이따가 봐.”

“무슨 전환데 그래?”

한 친구가 물었다. 

“엉, 하숙집에 같이 사는 형이 좀 보자네. 나 먼저 갈게.”

“헐, 그렇게 예쁜 영숙씨를 버려두고 혹시. 너 취향이...”

명수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창식이를 바라봤고, 그 눈빛의 의미를 눈치 챈 창식이가 숟가락으로 명수의 이마를 때렸다. 

“아얏!”

“아유 이 새끼가 진짜. 나 아직 덜 나았다. 이따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창식이에게 명수가 소리쳤다. 

“야, 이따가 6시에 학회모임 있는 거 알지? 과방으로 와.”

창식이는 알았다는 듯 가볍게 손을 들었다. 

‘민용이 형이 웬 일이지? 남자한테 전화 잘 안 하는 스타일인데.’

갑자기 만나자는 민용의 전화에 창식이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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