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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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35

영애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식탁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에서는 금새라도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꺼내지 못 한 말을 무수하게 쏟아낼 것 같았으나 복잡한 심경이 말로 정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을 식탁을 쳐다 보던 그녀의 시선이 천장 위 형광등 위로 향하였다.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환한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는 그 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영애는 답답한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며 쥐어 뜯었고,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에서는 처절한 아픔이 소리 없이 아우성 치고 있었다. 세란이 역시 고통으로 일그러진 영애의 얼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몸부림 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볼 수 없는 자신이 답답하였다. 세란이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영애에게도 한 잔 따라 주었다. 영애는 찬 물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마시며 벅차오르는 슬픔을 진정시켰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끝에 간신히 마음이 진정 된 영애는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닦고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야 말을 이어나갈 수가 있었다. 

“민용이가 며칠 전부터 나한테 묻더라. 자기 기다려 줄 수 있냐구. 난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어. 거짓말은 하기 싫었으니까. 사실 까마득하게 어린 남자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여기기도 했었지. 원래 남자들은 여자한테 항상 기다림을 강요하는 법이거든. 여자의 기다리겠다는 말 한 마디에 우쭐해지고, 자신의 존재가 우월해 진다고 착각하는 동물. 그게 바로 남자란 족속이야. 민용이도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지. 아니, 사실 그러기를 바랬어. 그게 조금이라도 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으니까. 난 어차피 끝이 정해진 민용이와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데 나는 끝까지 그 아이의 질문에 웃어줄 뿐이었어. 모질게 정을 끊어냈어야 했는데 마지막까지, 그 아이가 내 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난 민용이와의 연애놀음에 빠져서 내 웃음이 그 아이한테 어떤 의미가 될지, 내 모호한 태도에 그 아이가 얼마나 상심하고. 상처 받을지 생각을 못 하고 이기적이게도 내 감정만 생각하면서 흐흑.”

영애는 다시금 흐르는 눈물을 삼켰고, 세란이는 복잡한 감정으로 잘 정리가 안 되는 영애의 말을 들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민용이가, 그리고 영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부터 그 끝이 정해져 있었던 두 사람의 운명, 그 비극적일 결말이 과연 누구 한 사람의 잘못 때문일까? 영애의 욕심 때문에? 아니면 민용이의 지독한 사랑, 혹은 집착 때문에? 세란이는 굳이 누구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세란이는 장례식 장에서 들은 말이 생각나 영애에게 전하였다. 

“민용이가 케익을 사 갖고 오는 길이었대요. 술이 잔뜩 취해서 길을 건너다가 달려오는 트럭을 못 보고 그만, 그렇게 됐다네요.”

“내가 케익을 좋아해. 가끔 민용이가 늦을 때면 나한테 케익을 사다 주곤 했지. 요새 우리 좀 안 좋았거든. 어쩌면 내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몰라.민용이 장례식장 다녀 오고 사고 난 자리를 가 봤어. 하얀 락카로 민용이가 누워 있던 자리 그려놨더라. 어찌나 사람을 그렇게 단순하게도 그려놨던지. 한참을 넋을 잃고 민용이 떠난 자리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 오려는데 나 서 있던 가로등 아래에 피 묻은 케익이 한 움큼 떨어져 있는거야. 민용이 사고 날 때 사방으로 튄 건 싶었지. 가만히 주저 앉아서 그 케잌을 살펴 봤어. 내가 좋아하는 우유케익, 민용이랑 웃으며 나눠 먹던 그 우유케익이 민용이 피가 묻은 채로 널부러져 있는 거야.”

참혹한 사고의 현장을 떠올리는 영애의 표정이 망연자실하였다. 후회, 슬픔, 절망 등의 무수히 많은 감정이 복잡미묘하게 엉켜 있던 그 녀의 표정은 차츰 무채색의 그림처럼 어두운 물감으로 덧그려져 보는 사람마저 우울하게 하고 있었다. 

“참 후회가 된다. 그 말이 뭐라고. 그냥 기다려 준다고 하면 될 것을.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왜 괜히 고집을 부렸는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정리가 될 일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세란아, 아줌마 참 멍청하지?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영애가 웃었다. 웃고 있는 그 녀를 보며 웃음이 울음보다 더 처절하게 슬픈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세란은 눈 앞에서 처음 느낄 수가 있었다. 

“난 무책임한 내 거짓말이 혹시라도 그 아이한테 헛된 희망을 심어줄까 걱정했었어. 그런데 참 웃기지 않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날 정리할 거라고 믿었으면서도 기다리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니.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세란아. 그래,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민용이의 진심을 믿고, 또 바랬는지도 몰라. 오히려 민용이가 기다려 달라고 말 하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입으로는 민용이가 잘 되길 바란다면서,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서 내가, 마흔 여섯이나 먹은 이 욕심 많은 년이 언감생심 아들뻘 되는 사내놈하고 평생 살을 부대끼며 사는 꿈을 꾸었는지도 몰라. 차라리 기다린다고 말 할 걸 그랬을까?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지금, 민용이가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만약에 내 생각을 떠올렸다면 그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웃고 있는 사랑스런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고개 돌린 매정한 모습이었을까.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미어지는 것이, 정말...”

영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한 채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연신 술 잔을 기울였다. 세란이도 묵묵히 술 잔을 비우다가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영애에게 던졌다. 

“아줌마.”

“응?”

“아줌마도 민용이가 그랬던 것처럼 진정으로 사랑하셨나요?”

세란이의 질문에 영애는 말 없이 세란이의 눈을 바라 보았다. 세란이는 말 없는 영애의 표정에서 그 녀의 속 깊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읽으려 하였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애와 민용이, 둘 사이의 감정의 진실은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 채 밤은 깊어갔고, 두 사람은 늦은 새벽까지 말 없이 술 잔을 기울이며 각자의 기억으로 떠나간 민용이를 추억하고 있었다. 

다음 날 낮에 민용이의 식구들이 하숙집을 방문하여 짐을 정리해서 떠났고, 하숙집 식구들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 봤다. 민용이의 식구들은 떠나면서 혹시 빠진 물건이나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겠다며 세란이의 전화번호를 알아갔다. 그리고 열흘 쯤 지났을까. 세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민용이가 생전에 입었던 도복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용이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국가대표 결정전에 나갈 때까지 쭉 입어왔던 도복이라 꼭 찾고 싶다는 민용이 어머니의 부탁에 세란이는 한 번 찾아보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세란이는 민용이의 방과 세탁기, 빨래통과 옥상 등을 다 뒤져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세란이는 혹시 아줌마가 세탁을 했거나, 어디다 치운 것은 아닐까 하고 물어 보기 위해 영애의 방으로 갔다.  

‘똑똑똑’

노크를 하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가셨나?’

재차 노크를 해보았으나 방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세란이는 슬며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세란이의 눈이 일순간 어느 한 곳에 고정 되었다. 영애의 화장대 한 켠에 놓여있는 민용이의 사진이 담긴 조그마한 액자와 그 앞에 가지런히 접어 놓은 도복. 세란이는 다가가서 사진과 도복을 어루만졌다. 액자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세란이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거실 쇼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 날 식탁에서 들을 수 없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영애의 방 한 켠에 잠자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한 세란이는 잠시 후 핸드폰을 들어 민용이의 식구에게 전화를 하였다. 

“아 예,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기 다 찾아 봤는데요. 집에는 아무리 찾아 봐도 없어서요. 네, 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오게 되면 연락 드릴게요. 네, 네, 아닙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은 세란이는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아줌마도 추억 하나 쯤은 간직해야지. 너도 그랬으면 좋겠지 민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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