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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37
창식이는 민용이가 세상을 떠난 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민용이의 사고가 자신을 만난 이 후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거니와, 민용이와 커피숖에서 나눴던 말들 중에 혹시라도 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없었는지 그 때의 상황을 곰곰이 되짚어 볼 때마다, 왜 민용이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해주지 않았는지, 왜 그를 이해하고 좀 더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지 못 했는지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창식이었다. 오랜만에 학교 식당에서 영숙이와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창식이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그런 창식이를 보며 영숙이가 물었다.
“야, 너는 표정이 왜 그래? 또 도망 간 여자 친구 생각하냐?
“그런 거 아냐.”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민용이 오빠 때문에 그래?”
“그냥 마음이 좀 안 좋네. 좀 잘 해 줄걸 그랬다 싶기도 하고. 민용이 형 그렇게 된 게 왠지 내 잘못도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야, 사고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냐? 민용이 오빠 그렇게 된 게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니가 등 떠밀었냐?”
창식이는 숟가락을 놓고 영숙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 봤다. 영숙이는 창식이의 갑작스런 시선이 멋쩍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너는 참 알다가도 모를 애야. 어떨 땐 참 착한 것 같다가도 어떨 땐 참 냉정한 거 같고. 도대체 넌 정체가 뭐냐?”
“야 내 정체 고민할 시간에 니 알바자리나 신경 써 이놈아. 좀 있으면 여름방학인데 너 하숙집에서 쫓겨나고 싶냐? 어머니가 뭐라고 안 하셔?”
“너무 그러지 마라.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민정이 언니한테 물어보라니까? 요샌 평일에도 일하는 거 같드만.”
“물어 봤는데 거긴 여자만 뽑는다고 하더라구. 물어는 봐준다던데 말이 없는 거 보니까 잘 안 됐나 봐.”
“아니 호프집에서 일한다더니 무슨 여자만 쓰냐 거기는? 호프집이 아니라 이상한 데 아냐 혹시?”
“에이, 설마.”
창식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영숙이는 정색을 하며 의심나는 점을 계속 이야기하였다.
“아냐, 민정이 언니 그 알바 시작하기 전에 몇 달 동안 정장 같은 거 입는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런데 가끔 언니 늦게 올 때 보면 항상 무슨 직장 다니는 사람처럼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나가더라. 그것도 아침에 학교 갈 때랑 다른 옷인거 보면 밖에서 갈아 입는 거에요. 무슨 호프집이 맨날 정장 차림으로 일을 하냐? 분명히 뭔가 있어. 분명히.”
영숙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추리에 여념이 없었다. 영숙이가 탐정놀이에 빠진 사이 창식이는 정수기에서 물을 떠와 영숙이에게 건네었다.
“어이 꼬마탐정, 추리는 나중에 하시고 물이나 드세요.”
영숙이는 물을 시원하게 쭉 들이켜고 말하였다.
“흠, 조만간 민정이 언니 뒤를 밟아봐야겠어. 분명히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됐거든! 하여간 이 기지배 오지랖 하고는.”
“너도 같이 갈래?”
“됐다니까. 야 일어나. 나가자.”
다음 강의 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남은 두 사람은 5월의 따가운 햇볕을 피해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학교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즐기는 여유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아도 울적한 기분을 잊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 진짜 좋다.”
영숙이가 넓게 기지개를 켜더니 창식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얘가 왜 이래?”
“야, 어깨 좀 빌리자. 나 눕고 싶단 말야.”
“야, 남들이 오해한다. 머리 원위치로.”
“야, 남들이 보든 말든 오해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나만 편하면 그만이지. 인간 이영숙이 여태껏 남의 눈치 보고 산 적 없느니라.”
영숙이의 성격을 잘 아는 창식이는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기에 그러려니 하기로 하였다. 사실 창식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전에 영숙이에게 고마운 일도 있었고, 또 화창한 날에 예쁜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데 이를 싫어할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 바람에 흩날려 뺨과 귓가를 간질이는 영숙이의 긴 머릿결과 머리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샴푸냄새가 괜히 창식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야, 너 무슨 샴푸 쓰냐?”
“왜?”
“아니, 냄새가 좋아서.”
“반하지 마라. 상처 받는다.”
“샴푸 뭐 쓰냐니까 또 헛소리야. 아, 하여간 머리 아퍼.”
“헤헤헤.”
영숙이가 웃자 창식이가 따라 웃었다. 하여간 영숙이는 미워할래야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친구였고, 같이 앉아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헤어진 진영이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야, 우리 미팅이나 할래?”
영숙이가 창식이에게 물었다.
“미팅? 웬 미팅?”
“그냥, 재밌잖아.”
창식이는 기가 막혔다. 성수가 보고 싶다고 질질 짜던게 엊그제인데, 미팅을 하자는 영숙이가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햐, 성수가 누군지는 몰라도 참 불쌍하다. 걔는 너 이러는 거 알고 있을까?”
“어유 이게. 죽을래?”
영숙이가 주먹을 쥐어 창식이의 얼굴에 들이댔다. 창식이가 손으로 영숙이의 주먹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넣어둬 넣어둬. 그런데 하면 몇 명이나 하게? 할 애들은 있냐?”
“글세, 너랑 나까지 4:4 정도?”
“예쁘냐?”
“하여간 남자들은 여자 얘기만 나오면 예쁜지부터 묻더라. 하여간 문제야 문제. 사람의 내면을 볼 줄 알아야 되는데 말야.”
“어이구 지랄.”
“너 혹시 박은애라고 기억 나?”
“박은애? 그 때 OT에서 같이 놀았던 애 아닌가?”
“맞어, 기억하네? 사실은 걔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더라구. OT 갔다 와서 니 얘기 하는데 내가 너 여자 친구 있다고 했었거든. 그런데 너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니까 소개 시켜 달라더라?”
“걔가?”
사실 OT를 다녀온 후에 함께 놀았던 명수와 재석이에게서 은애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진영이와 사귈 때라 그냥 한 쪽 귀로 흘렸었는데, 지금 영숙이의 말을 듣고 보니 새삼 그 아이가 다시 생각이 났다. 날씬한 몸매에 하얗고 긴 다리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왜? 싫어?”
영숙이의 물음에 창식이는 즉답을 피했다. 은애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영이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 좀 그랬다. 창식이의 눈치를 살피던 영숙이가 창식이의 속마음을 콕 찝어냈다. 역시나 눈치가 빠른 이영숙.
“왜? 헤어진 여자친구 때문에? 아직도 못 잊었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벌써 다른 여자를 만나도 되나 싶기도 하고.”
영숙이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작정하고 쓴 소리를 내뱉기 시작하였다. 말투에 한심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야, 정신 차려 이 눔 시꺄. 너 차버린 애는 다른 남자랑 동거를 하는 마당에 니가 무슨 열녀 났다고 의리를 따지고 있냐? 야 정신 좀 차려라 제발. 정신 차리세요 김창식 씨이이이이.”
영숙이가 창식이의 두 귀를 잡고 머리를 쥐어 흔들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손 놔. 아프다니까.”
창식이는 영숙이의 손을 떼어내고 아픈 귀를 만지작 거렸다.
“야 만날 거지?”
영숙이가 물었다.
“그런데 나한테 관심 있으면 둘이 만나면 되지 뭘 미팅을 하자고 그러냐?”
“은애 걔가 수줍음이 좀 많아. 어색해서 그럴 걸. 야, 걔 남자친구도 안 사귀어 본 거 같더라.”
“그래?”
아까까지의 의리는 어느 순간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버리고, 늑대의 본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충분히 그럴 만큼 은애는 매력적이었다.
“그럼 한 번 만날까? 언제 만날까?”
“야, 너 친구 세 명 되지?”
“만들려면 충분히 만들지. 그게 뭐 어렵나.”
“잘 생겼냐?”
“내면이 성숙하지.”
“아유, 이게 죽을라고. 신경 써라. 내 친구들 다 이쁘다. 맞다. 설마 너 그 때 걔들 데리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누구? 명수하고 재석이?”
“너는 걔들 데리고 나오는 순간 관짝 열고 들어갈 준비 해라잉. 알았지?”
“왜? 걔들이 어때서.”
“아유 진짜, 무조건 잘 생긴 애들 데리고 나와라잉. 알았지? 하여간 내 친구들한테 나 욕 먹으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찾아 볼게.”
“야 그런데 몇 시냐?”
“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야 빨리 수업 들어가자. 뛰어야 돼.”
“에잇, 진작에 말해야지. 이따 봐.”
영숙이는 수업이 있는 경영대 쪽으로 뛰어 갔고, 창식이도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뛰어가기 시작하였다. 미팅이라, 한 동안 마음 속에 그 누구도 들여 놓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강의실로 뛰어가는 내내 창식이는 미팅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