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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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39

“음, 고기 맛있네. 육즙이 뚝뚝 떨어진다 뚝뚝 떨어져.”

“그러게. 여기 처음인데 괜찮다. 다음에 언니하고 같이 와야겠다.”

창식이와 영숙이는 걸신 들린 사람처럼 숨도 안 쉬고 고기를 흡입해 나갔다. 그런데 은애는 고기가 불에 타지 않게끔 불판 가장 자리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밑반찬과 채소를 두 사람이 먹기 좋게 정돈해 줄 뿐, 고기를 별로 먹는 것 같지가 않았다. 창식이는 은애에게 고기 좀 먹어보라며 권하였다. 

“야, 이거 엄청 맛있어. 너도 먹어.”

“응, 먹고 있어. 신경 안 써 줘도 돼.”

주변에 온통 드센 여자들만 가득한 창식이에게 은애의 그런 여성스러운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헤어진 진영이도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동갑내기 친구인 데다가, 워낙 털털했던 성격 탓에 여자친구로서 창식이를 살뜰하게 챙겨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창식이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챙겨 주는 은애의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쁘고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고기를 먹는데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은 이후 꽃등심 3인분을 더 시켜먹고 나서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미있게 나눈 세 사람은 간단하게 맥주까지 한 잔 씩 한 후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은애를 데려다 주기 위해 세사람은 학교로 걸어갔다. 

“영숙아, 너 돈 너무 많이 써서 어떡하니?”

“에이. 괜찮다니까. 그런데 너 고기 너무 조금 먹던데 괜찮니? 배 안 고파?”

“아냐, 나 많이 먹었어. 다음엔 내가 살게.”

“그래, 잘 먹었다 이영숙. 아 배 불러.”

“다음엔 니가 사 이눔 시꺄.”

“하하, 알았어. 알았어, 다음엔 내가 살게.”

세 사람은 금새 학교 정문에 도착하였고, 인사를 하며 은애를 기숙사로 들여 보낸 창식이와 영숙이는 기숙사로 걸어가며 은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어때? 괜찮지?”

“음, 엄청 착한 거 같긴 하네.”

“어쭈. 팅기냐? 은애가 훨씬 아깝거든.”

“누가 별로래? 처음 봤는데 어떻게 알어.”

“쟤 나랑 제일 친한 애거든. 착한 애니까 상처 주지 마라. 따 먹을라고 들이대지 말고 좀. 알지?”

“하아. 이게 또 엄한 사람 변태 취급일세.”

“변태 맞잖아?”

“이게 진짜.”

창식이가 영숙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려 하자, 영숙이는 웃으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창식이도 뒤따라 뛰어갔다. 

“김창식 변태래요. 김창식은 왕변태!”

“야 너 거기 안 서! 죽는다 진짜!”

해 저문 골목길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청춘영화의 한 장면처럼 맑고 싱그러운 젊음의 봄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창식이의 아버지와 영애는 하숙집 근처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실내 포차로 자리를 옮겨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좀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조 여사님.”

“네, 그래야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도 식구처럼 아들처럼 지내던 아이가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뜨고 나니 가슴 한 구석이 휑하니 허전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네, 그러시겠죠. 이렇게 얘기를 나눠 보니 참 정이 많으신 분 같은데,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힘내세요 조 여사님. 자, 한 잔 하시죠.”

두 사람은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웠다. 창식이 아버지는 영애와 자신의 술잔을 채우고 말을 이어 나갔다. 

“얘기 들어보니 얼마 전에 저희 아들놈이 여자친구하고 헤어졌다던데 혹시 별 일 없었나요?  기지배처럼 속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놈이라 신경이 쓰이네요. 물어 봐도 통 말도 없고.”

“네, 한 동안 두문불출 밥도 잘 안 먹고 방 안에만 틀어 박혀서 저도 걱정 했었는데, 이젠 다 툭툭 털어낸 거 같더라구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아버님 생각보다 창식이 어른스런 아이에요.”

“어른스럽긴요. 조 여사님이 다 좋게 봐 주시는 거죠. 사실 그 놈 마음이 어땠을지 말은 안 해도 제가 잘 압니다. 누가 뭐래도 제 아들놈인데 저를 닮았겠죠. 저도 첫 사랑이 갑자기 제 곁을 떠났을 때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여자 떠나 보내고 한참을 폐인처럼 살았었죠. 아마 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사람은 모를 겁니다. 그렇죠 현경 씨?”

“네?”

영애는 현경이라는 이름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식이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현, 현경이라뇨. 약주가 과하셨나보네요 창식이 아버님. 제 이름은 영애에요. 조영애.”

“현경씨, 거짓말 하셔도 다 압니다. 그날 처음 뵀을 때 긴가민가 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뵙고 얘기 나누니 확실히 알겠네요. 현경씨 맞죠? 왜 이름을 바꿨는지, 무슨 이유로 얼굴이 그렇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경씨의 말투와 얼굴 곳곳에 20년 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난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은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하는 창식이 아버지의 시선에 영애는 더 이상 거짓말을 둘러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남자와의 갑작스런 만남에 영애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니개 위해 영애는 오래 전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고 시작하였다. 사실 영애도 창식이 아버지가 처음 봤을 때부터 낯이 많이 익었었다. 하지만 그 동안 그녀가 겪어 왔던 무수히 많은 남자 중에 하나라는 것 외에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현경씨, 나 기억 안나요? 나 김덕승입니다. 김덕승.”

“아, 덕승씨.”

창식이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그제서야 덕승과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20년도 전에 잠깐 만났던 이 남자,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지만 영애의 사정 때문에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 남자를 하숙집 주인과 하숙생 아버지의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영애는 당황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자신을 바라보는 덕승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덕승은 영애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현경씨, 보고 싶었습니다. 그 때 왜 날 떠났는지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 듣고 많이 힘들었었죠. 그래도 원망은 안 했습니다. 그게 현경씨의 선택이고, 우리의 인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그저 현경씨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랬어요. 그래도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그저 꿈만 같네요.”

영애는 고개 숙인 채 덕승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온 몸이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덕승은 테이블의 위에 초조한 듯 깍지를 낀 채로 미세하고 떨고 있는 영애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잡아 주었다. 

“현경씨, 미안해서 그럽니까? 왜 떨고 있습니까. 현경씨는 내가 반갑지 않나요?”

“그런 게 아니라...”

영애는 말끝을 흐렸다. 

“현경씨, 아무 말 안 해도 됩니다. 그냥 우리 이렇게 가만히. 천천히. 지난 20년 세월 동안 현경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현경 씨는 나한테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무 변명도 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우리 이렇게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앉아 있습시다.”

덕승의 말을 들은 영애는 고개를 들어 덕승을 바라 보았다. 세월이 싸리눈처럼 내려앉아 희끗해진 머리와 자글자글한 눈가의 주름, 까무잡잡한 피부, 20여년 전 영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수줍게 사랑을 속삭였던 청년 김덕승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그 마음만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승 씨.”

두 사람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한참을 말 없이 서로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창식이 자냐?”

덕승은 자정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창식이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뇨. 아직요. 어디 다녀오시길래 이렇게 늦으세요?”

“응, 조 여사랑 밥 먹고 술 한잔 하느라 늦었지.”

“아버지, 외간여자랑 너무 다정하신거 아니에요? 어머니 아시면 난리 날텐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당연히 니가 입을 다물어 줘야지.”

“댓가는 비쌉니다. 아버지.”

“알았다 알았어. 소주 한 번 비싸게 먹었네.”

덕승은 지갑에서 신사임당 몇 장을 꺼내어 창식에게 용돈으로 주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서 자리 펴라. 아, 피곤하네.”

“네, 아버지.”

창식이는 이부자리를 깔았고, 불을 끄고 부자가 나란히 누웠다. 

“창식아.”

“네 아버지.”

“너 진영이랑 헤어졌다며?”

“어떻게 아셨어요?”

“니 엄마가 그러더라. 진영이 엄마가 그러더라고.”

“혹시 진영이네 어머니가 무슨 말 안 하세요?”

“무슨 말?”

“아, 아니에요.”

창식이는 혹시나 진영이가 남자와 동거를 하는 것을 진영이 엄마가 알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였지만, 분위기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차버리는 전 여자친구의 걱정까지 해주는, 창식이는 그런 남자였다. 

“많이 힘들었지?”

“그냥 뭐, 그렇죠.”

“내 아들인데 어련하겠냐. 아버지가 다 알지.”

“아버지도 그러셨었어요?”

“야 이 눔아, 아버지는 남자 아니냐? 어디 평생 니 엄마만 만나 봤겠어?”

“우리 아버지, 용돈 더 주셔야겠네.”

“이 놈이.”

“하하하.”

“참 많이 좋아했었지. 참 고왔는데.”

“지금 엄마 얘기 하시는 거에요, 첫사랑 얘기 하시는 거에요?”

“첫사랑이다 왜? 니 엄마한테 이를라고?”

“제 입은 아버지 지갑만큼 무거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놈 참 허허허.”

덕승은 한바탕 웃었다. 

“왜 헤어지셨어요?”

“잘은 모르지만, 헤어지고 나서 듣기로 어느 돈 많은 남자한테 갔다더구나. 그냥 아버지가 부족했던 거지. 인연이 거기까지 밖에 안 됐던 거고.”

“원망 안 하셨어요?”

“너는 진영이가 원망스럽니?”

“....”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다. 부자지간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안 보고 싶으세요?”

“보고 싶지. 가끔 생각이 난다. 젊었을 때 그 여자 얼굴이 지금도 생생해.”

“혹시라도 다시 만나시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글쎄다.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 거기까지 생각은 안 해 봤는걸 허허허. 내가 아들놈한테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원. 늦었다. 자자.”

“주무세요.”

창식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아버지로써는 서운할 얘기였지만, 같은 남자로서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먼 훗 날에 진영이는 나한테 어떤 기억일까. 창식이는 잠시 잊고 있었던 진영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새벽녘까지 잠을 못 이룬 채 뒤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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