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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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40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금요일 오후, 강의를 모두 마치고 홍대의 한 커피숖에서 남자 넷, 여자 넷의 미팅 자리가 마련 되었다. 남자쪽은 창식이와 같은 반 친구 셋, 여자쪽은 영숙이와 같은 반 친구 셋이 마주보고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영숙이의 표정은 똥이라도 씹은 듯 잔뜩 구겨진 표정이었고, 창식이는 그런 영숙이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유인 즉은, 영숙이가 절대 데리고 나오지 말라던 명수가 미팅 자리에 당당히 끼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식이가 미팅멤버를 구한다는 말을 어떻게 알았는지 날이면 날마다 창식이를 졸라대기 시작했고, 한 번도 여자친구를 못 사귀어 봤다는 둥, 미팅자리에 자기를 안 데리고 가면 다시는 안 볼 거라는 둥, 명수의 온갖 우는 소리와 협박에 못 이긴 창식이는 결국 명수를 미팅에 데리고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영숙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창식이에게 기분이 팍 상해서 인상을 팍팍 구기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는 명수는 누구 한 사람 빠질 것 없이 이쁜 상대편 여자들을 보며 벌써 로맨틱하게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설레었고, 더구나 자신이 관심 있어 하던 영숙이를 미팅 자리에서 만나자 분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하지만 못난) 웃고 있었다.

창식이가 일행을 둘러보며 인사를 할 것을 제안했다. 

“자자, 우리 자기 소개나 할까? 우리 동갑이니까 말 놓자. 우리부터 할게. 나는 영숙이랑 같은 하숙집에서 살고 행정학과반 김창식이야.” 

“안녕, 나는 유정석.”

“나는 김현식, 반갑다.”

“숙녀분들 안녕, 나는 박명수라고 해. 이렇게 화장한 5월의 어느 날 너희들을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다.”

명수의 느끼한 멘트에 여자들은 야유를 보내며 미간을 찌푸렸고, 여자들의 반응이 자신의 말이 재밌어서 관심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한 명수는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여자들의 차례가 되었다. 

“우린 국문과반이야. 나는 이영숙이야. 반갑다.”

“나는 박은애야. 반갑다.”

“나는 송은혜야. 안녕.”

“안녕, 나는 박주연. 재밌게 놀자.”

여자들의 인사가 끝나고, 현식이가 여자들에게 물었다. 

“너네는 다 현역이야?”

현식이의 물음에 주연이가 대답하였다. 

“나는 재수했어. 너네는?”

“나도 재수야. 다른 애들은 현역이고.”

현식이와 주연이의 대화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서로 간의 대화가 시작 되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겠지만 다 대 다의 미팅자리에선 자신의 포지션과 타깃을 빨리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먼저 현재의 멤버들 사이에서 자신의 순위를 재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친구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낭중지추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급의 외모와 스펙을 갖추고 있다면 상대 여자 중에 아무나 찔러 대도 성공할 확률이 높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중간 하다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여자에게 대쉬를 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관심이 있는 여자에게 대쉬를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잊은 채 이 여자 저 여자에게 찝쩍대며 마냥 웃겨 주기만 하면 한 명은 걸리겠지 라는 안일한 자세로 미팅에 임한다면 고생고생 분위기는 혼자 다 띄워놓고, 애프터는 엄한 놈들이 다 챙겨가는 슬픈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싱해야 하겠다. 

방향과 타깃을 정했다면 나와 상대방이 공통적으로 흥미를 느낄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상대일지라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대화가 자칫 무료하고 어색해 질 수가 있다. 무조건 웃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리자. 말할 때마다 불꽃처럼 빵빵 터져주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쉼 없이 길게 대화를 끌고 나갈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자. 여자들은 대체로 유머러스한 남자를 좋아하지만, 재미는 좀 없더라도 대화가 통하고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남자도 좋아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런 점에서 현식이와 주연이는 재수생이라는 공통점 덕분에 이야깃거리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전체적인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남들은 몰랐지만 이미 파트너가 정해져 있다시피 한 창식이와 은애, 그리고 명수를 보자 기분이 팍 상한 영숙이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포지션과 타깃을 정하기 위해 열심히 상대를 스캔하기 시작하였고, 서로간의 어색함을 잊어갈 때 쯤에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술집에는 여덟 명이 같이 앉을만한 자리가 드물었고, 몇 군데를 뱅뱅 돌아다니고 나서야 맨 처음 가 봤던 퓨전포차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자리에 앉은 친구들은 안주를 고르기 시작하였다. 

“뭐 먹을까?”

“치킨 먹자. 치킨.”

닭을 좋아하는 명수가 치킨을 고르자 아이들이 일제히 말렸다. 

“야, 사람 많을 때 치킨 시키는 게 제일 어리바리 한거야. 한 조각 씩 먹으면 끝인데.”

“그러게. 너네 다 밥 안 먹었지? 밥 되는 거 시키자.”

“술은 뭐 마실 건데?”

“너네 뭐 마실래?”

“호프 3천하고 소주 한 병 일단 시켜.”

“그럼 탕 두 개하고 모둠 하나 시키고 먹다가 더 시키자.”

“그래. 탕 뭐 먹을래?”

“알탕하고 김치찌개 시킬까?”

“그거 하고 공깃밥 시키자.”

“그래.”

메뉴를 정하자 벨을 눌러 직원을 호출하였다. 벨소리를 들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알바생이 주문을 받기 위해 걸어왔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네, 알탕하구요 김치찌개, 모둠안주 하나 주시구요. 호프 3천, 소주 한 병 주세요. 그리고 공깃밥 몇 개 시킬까?”

“네 개 시켜. 네 개.”

“공깃밥 네 개 주시구요. 잔은 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알바생이 자리를 떠나고, 여자들은 화장실에 가자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고, 여자들은 화장실에서 미팅 온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주연이 너는 현식이하고 잘 돼 가는 분위기다?”

은혜가 화장을 고치며 주연이에게 물었다. 

“에이, 그냥 똑같이 재수해서 얘기를 많이 하는 거지 뭐.”

“그럼 넌 현식이 별로야?”

은혜가 묻자 주연이가 웃으며 말하였다. 

“아직 몰라. 좀 봐야지. 너는?”

“나도 몰라 아직. 애들이 생긴 건 다 괜찮네. 한 명 빼고.”

누군지 콕 집어 지목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혜의 말에 모두가 공감을 하고 있었다. 주연이가 다른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네 여기서 술 마시고 어떡할거야? 다 같이 움직일거야, 찢어질거야?”

은애의 제안에 주연이와 은혜가 전혀 예상 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 너처럼 낯 가리는 애가 웬 일? 너 벌써 마음에 드는 애라도 있니?”

“그러게. 누구야 누구? 아 맞다. 너 OT 때 찍은 애 있다고 했지? 걔 여기 나왔어?”

“아, 나 이름 들었었는데 까먹었다. 누구였더라.”

주연이와 은혜는 호들갑을 떨었고, 은애는 아무런 대답 없이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영숙이가 심드렁하게 말하였다. 

“김창식 김창식. 주선 있잖아.”

“아 맞다. 김창식.”

“야 그럼 너 걔 찍은 거야?”

주연이의 물음에 은애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알았어 우리가 팍팍 밀어줄게. 그럼 여기서 술 마시고 각자 찢어지는거다. 알았지?”

“야, 그런데 걔는 어떡하냐?”

“박명수?”

아이들이 모두 영숙이를 쳐다 보기 시작하였다. 영숙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양 한 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이것들아. 내가 떠 안고 사라져 줄테니까 니들끼리 재밌게 노셔. 이 의리 없는 것들아.”

“아잉, 왜 그랭 영숙앙. 내가 나중에 잘 생긴 오빠랑 소개팅 시켜 줄게. 기분 풀어. 알았징?”

“그래, 그래 저번에 보니까 너네 사촌 오빠 진짜 잘 생겼더라. 그 오빠 소개 시켜 줘.”

친구들은 논개를 자처한 영숙이를 달래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같은 시간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셈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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