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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44
집에 들어 온 창식이는 은애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은애야.”
“수업 끝났어?”
“어, 좀 전에 들어 왔어. 너는?”
“나도 방금 끝났어. 뭐 해?”
“그냥 있지 뭐. 너는?”
“나도. 창식아.”
“어, 말 해.”
“너, 어제 내가 전화 안 받아서 화 났어?”
“응? 아, 화난 건 아니고 그냥 좀 궁금했지. 어제 바빴어?”
창식이가 기분이 상했거나,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은애는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는 창식이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왜 전화를 안 받았는지 진심을 얘기할까 고민했던 은애는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응? 아, 몸이 안 좋아서 약 먹고 하루 종일 잤어.”
“왜? 어디가 안 좋은데?”
“그냥 몸살.”
“많이 아팠나보다. 언제부터 아팠는데?”
“너랑 헤어지고 슬슬 아프더라구. 오랜만에 술 많이 마셔서 그랬나봐.”
“그랬구나. 전화 안 하기 잘 했네. 아 참, 미안. 전화 한다고 했는데 안 해서. 갑자기 좀 일이 많아서 전화를 못 했어.”
“괜찮아. 나중에 전화했잖아. 내가 못 받은 건데 뭘.”
“이제 몸은 괜찮아?”
“응. 다 나았어.”
“다행이다. 내일 강의 몇 시에 끝나?”
“네 시 쯤? 왜?”
“밥 먹고 영화나 볼까 하고. 난 세 시에 끝나거든. 오후에 시간 괜찮아?”
은애는 창식이의 애프터 신청에 뛸 듯이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질렀고, 자기가 지른 소리에 자기가 놀라 허겁지겁 핸드폰을 손으로 막아 창식이가 못 듣게 하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은애야?”
설레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은애가 대답하였다.
“응, 응, 말해.”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니가 말을 안 해서.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냐. 아무 것도 아냐. 나 내일 시간 괜찮아.”
“그럼 내일 학교 정문에서 볼까 너 수업 끝나고 볼까?”
“그래, 그러자.”
“오케이. 그럼 좀 쉬어. 저녁 꼭 먹고.”
“응, 알았어, 이딱 카톡 해.”
“어, 그래.”
의자에 앉아서 전화를 하던 은애는 전화를 끊고 침대 위에 뛰어 올라가 촐싹촐싹 뛰어댔다. 창식이가 기분이 안 상해 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내일 만날 것을 생각하니 또 기분이 좋았다. 은애는 침대에 드러누워 내일 뭐 먹을까, 뭐 입고 나갈까, 무슨 영화를 볼까 등 벌써부터 내일 있을 데이트를 머릿 속에 그리기 시작하였다. 은애의 가슴은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에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창식이는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왔다. 마침 수업을 마친 은애가 집에 들어오고 있었다.
“왔냐?”
창식이가 아는 체를 하였다. 창식이가 아는 체를 하든 말든 모른 척 계단을 올라가려던 영숙이가 발걸음을 돌려 창식이에게 걸어왔다. 창식이는 인상을 잔뜩 쓰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영숙이를 보고 혹시나 또 때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움찔하였다.
“야, 너 은애한테 전화 좀 해 봐. 너 집에 오자마자 전화 하기로 해 놓고 안 했다며?”
“어제 했는데 안 받더라고. 안 그래도 방금 전에 은애한테 전화 왔어.”
“전화를 하기로 했으면 바로 해야지. 왜 안 해서 애 기분 상하게 하냐?”
“야, 내가 전화 할 정신이 있었냐? 오자마자 두들겨 팬 게 누군데.”
“그럼 토요일에 전화 했어야지.”
“했으면 된거지.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가 뭐가 중요해. 은애가 뭐라고 하디?”
“하여간 잘 해라. 나랑 제일 친한 친구다. 순진한 애 맘 고생 시키지 말고 잘해줘.”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 끄셔.”
“야, 김창식!”
“또 왜?”
“너 어떡할거야?”
“뭐를 어떡해?”
“이 새끼가 그 새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박명수 어떡할거냐고.”
영숙이의 입에서 명수 이름이 나오자마자 창식이는 머리가 아팠다. 고집 세고 눈치 없는 명수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지라 이래저래 참 난감하였다. 그렇다고 OT 때부터 제일 친하게 지내 온 친구인데 상처 주는 말을 하자니 창식이 성격상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은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한 창식이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하였다.
“알았어. 말할거야.”
“야, 걔는 눈치도 없냐? 연락을 계속 쌩 까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연락 안 하겠다. 아까 니네랑 마주치고 나 도망치는거 봤지? 근데도 또 카톡 왔어. 어쩔거야. 응? 어쩔거냐고.”
“야, 넌 명수가 그렇게 싫으냐? 걔 괜찮은 애야.”
창식이는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 쓸데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창식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숙이는 창식이에게 달려와 쇼파에 앉아 있던 창식이에게 올라타서는 주먹으로 온 몸을 마구 때리기 시작하였다.
“아, 아, 아파. 아프다고. 미안해 미안해.”
“니 놈이 지금 매가 부족한거지? 그래서 자꾸 주둥이에서 헛소리가 튀어나오는거지?”
이대로 맞다간 죽겠다 싶은 창식이는 억지로 영숙이를 떼어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알았어. 알았어. 명수한테 얘기할테니까 좀만 기다려.”
창식이는 말을 마치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고, 밖에서 영숙이가 창식이를 향해 소리 질렀다.
“내일 당장 말해라. 알았지? 또 귀찮게 하면 너네 둘 다 죽을 줄 알아!”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보고 있던 창식이에게 은애에게서 카톡이 왔다. 침대 위에 가지런히 상하의 셋팅해놓은 옷가지 사진이 몇 장 도착하였다.
“내일 뭐 입을까?”
은애의 물음에 창식이는 사진 중에서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미니스커트가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은애의 늘씬한 몸매에도 잘 어울릴 거 같았고, 무엇보다 창식이 본인이 짧은 치마에 스타킹 차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미팅 어땠대? 얘기 안 해 봤어?”
창식이가 은애에게 다른 친구들은 미팅이 어땠는지를 물어봤다. 영숙이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분위기상 그럴 수가 없었고 은애와 카톡을 하다 보니 마침 생각이 나서였다.
“주연이는 분위기 괜찮은 거 같은데, 은혜는 모르겠대. 너네는?”
“우리도 현식이는 주연이가 마음에 드는 거 같은데, 정석이는 그냥 그런 거 같더라구.”
“그렇구나. 아 참, 명수는?”
“아, 그것 때문에 머리 아파. 그냥 데리고 나가지 말걸.”
“안 그래도 영숙이도 엄청 피곤해 하던데. 니가 곤란하겠다.”
“내가 벌인 일인데 내가 해결해야지. 밥 먹었어?”
“응, 이제 먹으려구.”
“그래, 저녁 맛있게 먹어. 낼 연락하자.”
“응, 너도 맛있게 먹어.”
“그래, 낼 봐.”
은애와 카톡을 마친 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창식이는 갑자기 진영이가 떠올랐고, 그녀와 나눴던 카톡 대화를 차례차례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이미 남남이 되었지만, 아직 카톡에는 둘 만의 사랑의 밀어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미 수개월 전의 이야기였지만, 그 때의 대화를 보니 정말 헤어진 것이 맞나 싶고 지금도 전화를 하면 진영이가 반갑게 받아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창식이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책상 서랍을 열어 진영이와의 사랑의 흔적이 묻어 있는 타월을 꺼내 보았다. 검붉은 피와 정액이 잔뜩 묻어 있는 타월을 뚫어지게 보던 창식이는 휴지통에 던져 넣으려고 손을 번쩍 들었으나 이내 손을 내리고야 말았다. 뭔가 아쉽고 아까운 기분. 창식이는 서랍을 열어 다시 타월을 집어 넣고, 방금 전 은애와 나눴던 카톡을 들여다 보았다.
‘그렇게 좋을까.’
은애가 보내 온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그녀의 설레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왔고, 그녀와의 대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본 창식이는 마음이 심란함을 느꼈다. 떠나간 사랑과 새롭게 찾아온 사랑, 착잡한 마음과 설레는 마음 사이에서 창식이의 기분은 묘하게 복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