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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45
다음날, 수업이 끝난 창식이는 약속시간이 남아 과방에서 놀고 있었다. 명수를 보면 영숙이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하려 했으나, 그 날 겹치는 수업이 없었던 명수가 과방에도 오지 않아 만날 수가 없었다. 물론 전화를 하면 만날 수 있겠으나, 명수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창식이는 이를 핑계 삼아 영숙이 얘기를 또 하루 미루기로 마음 먹었다. 과방에는 학생회장 원경이와 선배 두 명, 그리고 동기 몇 명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며칠 전 있었던 창식이네의 미팅이었다.
“창식이 잘 돼가나 보다? 다른 애들은 어때?”
원경이 창식에게 물었다.
“현식이는 잘 돼가는거 같구요.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요. 말들이 없어서.”
“야, 니들끼리만 놀지 말고 과팅 만들어 봐. 너 하숙집 같이 사는 여자들이 다 과가 다르다며?”
친구 1의 말에 친구 2가 덧붙이고 나섰다.
“이번에 주선한 애가 그 때 OT 때 노래 불렀던 아이라며? 걔 말고도 법대도 있고, 체대도 있고 그렇다더라.”
“김창식이 완죤 금맥이었네. 야, 과팅 주선 좀 해 봐.”
함께 있던 1학년 반대표와 다른 친구들까지 가세해서 적극적으로 과팅에 대해 주장하고 나섰으나, 창식이는 이번 명수 일 때문에 누구를 소개해 주고 하는 것이 영 부담스러웠다.
“어차피 좀 있으면 기말고사 끝나고 여름방학인데 무슨 미팅이야. 다음에 해.”
“야, 기말고사 끝나고 하면 좋지 뭘 그러냐? 여름방학 때 같이 놀러도 가고. 안 그래?”
“그러게. 야 창식아. 튕기지 말고 좀 해 봐라.”
“생각 좀 해 보고.”
시간이 네 시가 다 되어 정문으로 나가려는데 은애에게 카톡이 왔다.
“나 기숙사에 가방 놓고 금방 갈게. 어디야?”
“나 과방인데 시간 맞춰서 나갈게.”
“아냐. 내가 갈테니까 거기 있어.”
“사람들 많은데 괜찮겠어?”
“문 앞에서 전화 할테니까 나와.”
“ㅇㅇ 이따 봐.”
창식이가 카톡을 하는 사이 이야기의 주제는 영숙이로 넘어가 있었다.
“저번에 걔 창식이 대신에 대출 들어왔다가 혼났었지? 그 때 엄청 웃겼는데. 우리는 너 걔랑 사귀는 줄 알았어.”
과대표의 말에 친구 1이 아는 척을 하였다.
“아냐, 아냐. 걔는 명수가 찜했잖아. 창식아, 이번에 미팅 나가서 걔하고 명수하고 파트너였다며? 어땠대? 잘 됐냐?”
친구 1의 물음에 창식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창식이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의 표정만 보고도 상황이 어땠을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짐작하고도 남았다.
“잘 안 됐나보다. 명수 불쌍하다. 옛날부터 OT 때 노래한 애 엄청 귀엽다고 말 많이 했었는데.”
친구 2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였고, 창식이는 아는 척 하지 말라며 모두에게 신신당부 하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은애에게 전화가 왔고, 창식이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복도 왼쪽을 돌아보니 사회대로 들어오는 출입구 쪽에 은애가 서 있었다. 환한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는 은애의 몸에서 마치 여신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말아 올리고,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색 미니스커트에 커피색 스타킹, 거기에 높은 힐을 받쳐 신고 한 쪽 어깨에 핸드백을 걸쳐 멘 은애는 잘 빠진 모델, 섹시한 오피스 레이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창식이를 발견한 은애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여신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창식이는 입이 귀에 걸리는 걸 간신히 참고 은애에게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창식이가 밖으로 나가자 은애가 온 것임을 알아챈 친구들은 뒤따라서 과방을 뛰쳐 나왔고, 출입구 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은애임을 눈치 채자 이쁘다며 난리를 부렸다.
“와, 진짜 이쁘네.”
“키가 창식이보다 더 큰 거 같은데? 아, 좋겠다 창식이.”
“이 새끼 전생에 나라를 구했네.”
창식이가 은애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반대표와 친구 1, 2, 3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은애에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저흰 창식이 친구들이에요. 은애씨 맞죠?”
“우와 진짜 이쁘시네. 창식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친구들의 짓궂은 행동에 은애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였다.
“야야, 우리 나가야 돼. 비켜 봐.”
창식이가 친구들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으나, 친구들은 완강하였다.
“은애씨, 우리 과팅 한 번 해요. 네?”
“창식이한테 얘기했는데 이 놈이 말을 안 들어서요. 우리 시험 끝나고 친구들끼리 같이 놀아요. 어때요?”
은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네, 말해 볼게요.”
은애의 말에 친구들은 사회대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죠? 오예, 약속 약속.”
반대표가 은애의 손을 잡고 새끼손가락을 걸자, 창식이는 짜증이 났다.
“아 진짜 왜 그래? 영화 시간 늦는다고.”
창식이가 정색을 하자 친구들은 그제서야 길을 비켜줬다.
“알았어 알았어, 넌 정색을 하고 그러냐.”
“은애씨, 우리 약속한 거에요. 꼭 약속 지켜요. 알았죠? 약속 안 지키면 물 떠놓고 둘이 깨지라고 기도할거에요.”
은애가 새끼 손가락을 걸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둘은 사회대 건물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창식이는 친구들의 돌발행동에 당황했을 은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 그냥 내가 정문으로 나갈걸 그랬아. 많이 놀랬지?”
“아냐, 괜찮아. 재밌었는데 뭘.”
은애가 창식이에게 웃어 보였다. 웃을 때마다 입술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가지런한 치아가 매력적이었다. 은애의 웃는 모습을 본 창식이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고, 잡고 있던 손을 고쳐 잡아 깍지를 끼었다. 그러자 은애도 기분이 좋았는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영화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창식이가 물었다.
“아니, 너 보고 싶은 거 봐. 난 아무거나 괜찮아.”
“그럼 어벤져스 볼까? 나 그거 아직 못 봤는데.”
사실 은애는 지난 달에 친구들과 어벤져스를 보고 왔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창식이와 함께 영화를 본다는게 중요하지.
“나도 그거 안 봤어. 그거 보러 가자. 재밌겠다.”
“잘 됐네. 그럼 우리 그거 보러 가자. 혹시 몰라서 어제 시간 확인 했거든. 극장 근처에서 밥 먹고 7시꺼 보면 되겠다.”
“그래.”
둘은 신촌으로 가기 위해 학교 앞에 있는 역으로 걸어갔다. 둘은 손을 잡은 채로 앞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창식이는 슬쩍슬쩍 은애를 쳐다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은애의 큰 키가 힐을 신으니 자기보다 더 커 보여서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창식이었다. 그런 창식이를 눈치 챈 은애는 혹시나 자기가 더 커 보여서 그런 건 아닐까 하여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불편하면 나 신발 바꿔 신고 올까?”
은애의 말을 들은 창식이는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뜨끔하였다.
“아냐, 아냐. 지금 예쁜데 왜.”
“그냥 자꾸 쳐다 보길래 니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아냐, 아냐. 지금 엄청 잘 어울려.”
“그래? 다행이다.”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담부턴 깔창을 깔든가 해야지 안 되겠네.’
신촌에 도착한 두 사람은 7시 영화를 예매하고,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과 돈까스를 먹었다. 영화 시간이 다 되어 음료와 군것질을 사들고 상영관 구석 끝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평소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창식이는 스크린에서 눈을 뗄 줄 몰랐고, 그런 창식이가 귀여운 은애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가량 논 뒤에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우리 저번에 갔던 그 술집에서 한 잔 하고 들어갈까?”
창식이가 물었다.
“노래방은 내가 낸다니까. 너 돈 너무 많이 쓴다.”
은애가 더치를 하자고 했으나, 창식이는 분식집부터 노래방까지 모두 자기가 쏘았고, 은애는 그런 창식이를 걱정해 주었다.
“괜찮아, 나 아버지한테 얼마 전에 용돈 받아서 지갑이 뚱뚱하거든. 그리고 원래 첫 데이트 때는 남자가 다 쏘는거야.”
“그러지 말고 이번에 술집은 내가 쏠게. 안 그러면 나 그냥 기숙사로 갈거야.”
자기를 생각해 주는 은애가 고맙기도 하고 이쁘기도 한 창식이는 그러마 하고 대답하였다. 가끔 진영이가 생각 나서 마음이 흔들리다가도,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 두 눈과 머릿 속에 온통 은애가 가득 차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학교앞 지하철역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학교 뒤 편에 있는 술집으로 걸어갔고, 가는 도중에 마주친 창식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창식이는 그런 시선을 느낄 때마다 어깨가 으쓱거려졌고, 이제야 진짜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