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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46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화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술집은 한산하였다. 창식이와 은애는 며칠 전 앉았던 자리에 앉아 두부김치와 소주를 주문하였다.
“너는 시험 언제부터야?”
창식이가 은애에게 언제부터 시험기간인지를 물었다.
“다음 주에 두 개 있고, 나머진 다 그 다음 주야. 기말시험이라 레포트 대체도 없고 짜증나.”
“비슷하네. 나도 다음 주에 몇 개 있고, 다 다음 주 월요일에 마지막 시험이야.”
“넌 중간고사 잘 봤어?”
은애가 창식이에게 시험 잘 봤는지를 물었다. 이래저래 다사다난 했던 한 학기를 보낸 창식이었지만, 수업도 안 빠지고 과제와 시험 준비에 충실했던 지라 학과 성적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나쁘지 않게 봤는데 장학금 받으려면 이번에 진짜 잘 봐야 돼. 엄마가 하숙하는 대신에 알바하라고 했거든? 웬만하면 학교 근처에서 하려고 알아 봤는데 영 자리가 없더라. 그래서 장학금이라도 받아야지, 안 그러면 나 여름방학 때 짐 빼야 돼.”
“어머, 진짜 잘 봐야겠다. 너 집이 인천이라고 했지?”
“어, 인천이 은근히 피곤하다니까. 1호선 타고 시청에서 또 갈아타야 되고, 시간이 꽤 걸려요. 차도 일찍 끊어지고. 그래서 인천 사는 애들은 학교에서 술 마실 때 아예 일찍 가던가, 집에 안 들어가던가 둘 중에 하나야.”
“맞어 맞어. 내 친구도 인천 사는 애 있는데 한참 재밌을 때 일어나야 된다고 맨날 불만이야. 걔네 집이 엄하셔서 절대 외박 안 되거든.”
“시험 끝나면 집 내려가지?”
창식이가 은애에게 물었다. 은애의 집은 부산이어서 학기가 끝나고 집에 내려가게 되면 한 동안 서로 볼 수가 없게 된다. 창식이는 그게 아쉬웠다.
“그래야지. 내려가기 싫은데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집에서 학기 끝나면 바로 내려오라고 난리셔. 나 집에 안 내려간다고 하고 영숙이 방에서 있을까?”
은애의 깜찍한 아이디어에 두 손 높이 박수를 쳐주고 싶었지만, 하숙집의 규칙상 안 될 말이었다. 창식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 영숙이까지 쫓겨날걸. 우리 하숙집 외부 사람 못 재우게 돼 있거든.”
“그래? 그렇구나. 그냥 해 본 말인데 그래도 아쉽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안주가 나왔고, 두 사람은 잔을 채운 후 건배를 하였다.
“카아, 쓰다. 은애 너 술 마셔도 돼?”
‘아 맞다. 아프다고 했었지.’
순간 창식이에게 했던 거짓말이 생각난 은애는 갑자기 아픈 표정을 지으며 엄살을 피웠다.
“응, 이제 열 내렸으니까 괜찮아. 왜? 또 아플까 봐 걱정 돼?”
은애가 창식이 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더니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며 창식이를 바라 보았다. 똘망똘망한 눈초리에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수줍고 내성적인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보기 보다 애교도 많은 것 같았다.
“그럼, 아프면 안 되니까. 술 안 받으면 먹지 마. 알았지?”
“알았어.”
“아, 맞다. 현식이가 주연이하고 우리 넷이서 시험 끝나고 같이 놀자더라. 걔네 잘 돼가나 봐?”
“그래? 주연이도 현식이 싫지 않는 눈치던데 그렇게 됐구나.”
“너 시험 끝나면 바로 내려 갈거야?”
“봐야 될 거 같은데. 웬만하면 한 번 같이 봐야지. 아니면 여름 피서 겸 해서 부산 내려와. 창식이 너 부산 와 본 적 있어?”
“아니, 한 번도 못 가봤지. 그것도 괜찮겠다. 한 번 현식이한테 물어봐야겠네.”
고개를 끄덕이는 창식이를 보는 은애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저기, 창식아.”
“응.”
“저기, 우리도 지금 잘 돼 가고 있는 건가?”
은애의 갑작스런 질문에 창식이는 순간 당황하였다. 창식이야 은애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최근에 알았고, 정식으로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 아직 끈끈한 무언가가 생기기엔 이른 감이 있었지만, 처음 본 몇 달 전 그날부터 자신을 마음 속에 품어 온 은애의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이 전혀 급한 것도, 섣부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창식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자신의 감정을 되짚어 보는 사이, 은애는 초조한 표정으로 창식이를 쳐다보았고, 창식이는 그런 은애의 얼굴을 보자 어떤 결심 같은 것이 생겨남을 느꼈다.
“왜? 잘 안 돼 가는 것 같아?”
창식이의 물음에 은애는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그냥, 잘 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서...”
창식이는 이런 은애의 모습을 보고 영숙이 말마따나 참 순진한 아이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여중, 여고 나온데다가 남자를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많이 서툴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창식이는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창식이의 미소를 본 은애는 창식이가 자기를 놀리는 것 같아 울상이 되었다.
“야, 왜 웃니? 내가 얼마나 심각한데.”
“미안, 미안. 웃을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웃음이 나왔어. 이 상황이 너무 좋아서 하하하.”
“뭐가 좋은데?”
“그냥 니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 같아서 고맙기도 하고, 기분도 좋고,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그냥 기분이 붕 뜬다.”
“그게 무슨 말이야? 좋은 뜻이야?”
은애가 묻자 창식이는 말 없이 웃으며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씹쌔끼, 좋다는 표현을 저 따위로 하다니 (작가 注).
“그게 무슨 뜻이야 히잉.”
창식이의 알 듯 말 듯한 표현에 은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아직 만난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빨리 가까워지고 호감을 갖게 돼도 괜찮나 싶어. 그래도 분명한 건 우리가 출발선은 다르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나란히 걷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 천천히 오래 걷자. 같이 손 잡고, 무슨 말인지 알지?”
좋아하지만 좀 더 여유를 갖고 서로를 지켜보자는 창식이의 말뜻을 알아들은 은애는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비추는 노란 조명등이 은애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더욱 밝게 빛내주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창식이와 은애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2주 후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내려갔다. 창식이는 다행히 학과 장학금을 받게 되어, 알바를 안 한데 대한 어머니의 분노를 잠재우고 2학기 하숙집 티켓을 획득할 수 있었고, 명수는 창식이의 끈질긴 설득과(다른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는) 영숙이의 처절하리만치 독한 잠수에 지쳐 결국 포기하고야 말았다. 현식이와 주연이는 창식이와 은애가 영화를 본 다음 날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하여 시험 기간 내내 붙어다녔고, 정석이와 은혜는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방학이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6월의 마지막 날, 창식이와 은애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성적 잘 나와서. 그럼 2학기 때도 하숙할 수 있는거야?”
“응, 성적장학금 받고 국가장학금 이거저거 하면 등록금 얼마 안 나올 거 같더라구. 그래서 방학 때 알바 열심히 하기로 하고 2학기에도 하숙하기로 했어.”
“와, 진짜 잘 됐다. 그럼 알바 시작 한거야?”
“집에 오니까 엄마가 과외를 세 개나 잡아 놨더라구. 그거 하고 며칠만 놀고 마트에서 알바 하려구.”
“우리 창식이 엄청 바쁘네. 우리 언제 봐? 아, 보고 싶다.”
은애는 창식이가 2학기 때도 하숙집에서 지내게 된 것이 자기 일처럼 기뻤으나, 멀리 떨어져 볼 수 없는 상황이 못내 아쉬웠다.
“안 그래도 현식이랑 전화 했는데 은애 너 요새 뭐 해? 바빠?”
“왜? 부산 오게? 나 하나도 안 바쁘지. 현식이가 뭐래?”
“응, 이번 주말에 2박3일로 부산 내려갈까 해서. 너 괜찮으면 주연이도 간대.”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주연이 이 기지배는 전화도 안 하네 어쩜. 너 내려오면 나는 당근 좋지. 우와, 진짜 잘 됐다.”
은애의 기뻐하는 목소리에 창식이도 기분이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내려가고 싶었다.
“그럼 현식이한테 다시 전화해 보고 언제 내려갈지 얘기해 줄게. 아마 이번주 금요일 아침 쯤에 내려갈거야.”
“아싸! 앙, 빨리 보고 싶다. 오늘 인제 겨우 월요일이야.”
“나도 보고 싶다. 좀만 참아. 꼭 내려갈테니까.”
“알았어. 약속했다. 꼭 내려와야 돼. 알았지?”
“응, 알았어.”
두 사람이 애틋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바깥에서 창식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김창식! 너 과외 안 가? 과외 시간 다 됐잖어.”
“알았어요. 나갈 거에요.”
창식이는 큰 목소리로 어머니의 부름에 대답하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어, 벌써 과외 갈 시간이 다 됐네. 은애야 나 과외 갔다가 현식이한테 전화 하고 다시 연락할게.”
“응, 알았어. 잘 하고 왕.”
“그래, 안녕.”
창식이는 서둘러 교재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과외를 하기로 한 아이들은 어머니가 알고 지내던 동네 아주머니의 중학생 딸과 친구들인데 일주일에 세 번, 세 명이 한 집에 모여서 같이 과외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창식이는 난생 처음 하는 과외 알바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현식이에게 전화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