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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50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OT 때의 첫인상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둘 사이의 추억거리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본 후로 몇 개월, 서로의 감정을 알아가기 시작한지는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지났지만 함께 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오랜 대화를 통하여 알아가는 두 사람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안주 삼아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나눠 마시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휘영청 둥근 달이 뜬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환한 달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내뿜는 바다와 주변을 온통 환하게 비추고 있는 가로등과 상가의 불빛들로 인하여 창식이와 은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로의 시선을 또렷하게 볼 수가 있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 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은애의 눈동자와 입술이 마치 달빛을 받은 바다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애야.”
창식이가 오랜 침묵을 깨고 은애에게 말을 하였다.
“응, 왜?”
“고마워.”
“뭐가?”
“나를 좋아해 줘서.”
은애는 창식이의 말뜻이 무엇인지 얼른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좋은 뜻일까, 아니면 나쁜 뜻일까. 사실 창식이가 부산에 내려오기로 했을 때부터 은애는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외사랑이 아니라 창식이도 조금은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던 은애는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백사장에서 창식이에게 고백을 받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막 입을 연 창식이의 말뜻이 부디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행복한 결말이기를 바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창식이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은애야.”
“응.”
“너도 알겠지만, 나 얼마 전에 오랫동안 좋아했던 친구랑 헤어졌어.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더라. 밥도 굶고, 울기도 원 없이 울어보고. 사실 영숙이한테 니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생각했었어. 이렇게 쉽게 좋아했던 사람을 잊어도 되나, 내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배신으로 무너져 버린 내 가슴에 또 다른 사랑이 올곧게 서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말야. 그리고 영숙이랑 우리 셋이서 만났잖아. 너를 처음 제대로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이렇게 멋진 친구가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솔직히 궁금한 마음 반, 기분 좋은 마음 반이더라.”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하는 창식이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였고, 그런 창식이를 보며 은애는 숨 죽인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너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미팅 때 너를 두 번째 만났어. 그 때의 느낌은 솔직히 부담스러웠어. 솔직히 내가 너한테 잘 해 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보다 얘가 나한테 잘 해 줄 수 있을까, 또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거든. 자신이 없었지. 그리고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행여라도 떠났던 그 친구가 다시 돌아오진 않을까 하는 미련도 남아 있었고. 그러다가 세 번째 만나고, 너랑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생각해 주는 너의 배려심에 나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이렇게 멋진 여자한테 과연 내가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너와 함께 하는 나를 상상다하 보니까 언제부턴가 내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던 그 아이의 흔적들이 지워져 가는 걸 느꼈었지. 그 후부터 우리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만났잖아. 그치?”
창식이가 묻자 창식이와의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은애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너하고 만났던 매 순간 순간이 나는 항상 새롭고 소중해. 그런데 그 중에서도, 내 감정이 시시 때때 변하고 너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게 만들었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이 나는 제일 기억에 남고, 앞으로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거든. 그리고 내 평생의 기억에 남을 오늘 네 번째 만남에서 지금의 내 마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를 갖고 싶다, 니가 항상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거야.”
창식이의 말을 듣고 있던 은애는 두 눈이 시큰거리며 떨려옴을 느꼈고, 이내 자신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던 달빛이 어느새 소리없이 조금씩, 천천히 흘러내려 두 뺨을 적시고 있음을 깨달았다.
“은애야, 나는 1년 후의 오늘도, 또 10년 후의 오늘도, 또 언제일지 모르지만 추억할 수 있는 먼 나중의 어느 날에도 이 자리에서 지금처럼 너를 보며 설레이고 싶다. 너만 괜찮으면, 우리 사귀자.”
은애는 두 뺨을 잔뜩 적신 눈물 자국을 손으로 닦아 내었지만,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감정의 흐름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창식이는 울고 있는 은애를 보며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망설이며 알 듯 말 듯 주저하는 자신 때문에 지독한 가슴앓이를 했을 은애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은애는 한참을 코를 훌쩍 거리며 눈물을 흘리다가 가볍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 감정을 추스른 후 입을 열었다.
“창식아.”
“응.”
창식이는 떨리는 마음으로 은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어제 현식이랑 주연이 춤추는 거 보면서 나도 너하고 스테이지 위에서 춤 추고 싶었어. 그런데 쑥스럽기도 하고, 혹시 니가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까, 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 돼서 말도 못 걸었거든. 나 지금, 너 하고 춤 추고 싶어. 그래 줄 수 있니?”
은애의 말을 들은 창식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은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요?”
은애는 감격에 겨워 멎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은애는 창식이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 창식이의 품에 안겼다. 창식이는 은애의 한 쪽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백사장에는 어제처럼 분위기 있는 음악도, 화려한 조명도 없었다. 그러나 넓게 펼쳐진 하얀 백사장 위에서 독무를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행복한 댄서였다.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달빛이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하라는 듯 춤추는 두 사람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