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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58

10여분이 넘게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던 두 사람은 울다울다 지쳐 진정이 좀 되자 나란히 앉아 멍하니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세란이가 훌쩍 거리며 민정이에게 말을 걸었다. 

“너 어제, 나한테 왜 그랬어?”

그러자 민정이 역시 눈물범벅이 된 뺨을 손바닥과 손등으로 닦아내며 세란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언니가 나 그런데 다니는 거 봤다고 생각하니까 무섭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어. 미안해 언니.”

세란이는 민정이의 대답을 듣자 간신히 멈춘 눈물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이 눈가에 그렁그렁하기 시작하였다. 세란이는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심하게 말을 해? 그냥 솔직히 말하면 같이 고민해 줬을 텐데 응? 이 나쁜 기지배야.”

“미안해. 나도 언니한테 어제 그렇게 하고 정말 죽고 싶었어. 내가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정말 친언니 같은 사람인데 미안해 언니. 정말 미안해 흑흑.”

설움이 북받친 세란이는 옆에 앉은 민정이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밀며 나무랐다. 그 모습이 마치 집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나무라는 언니를 보는 것 같았다. 세란이의 진심을 알고 있는 민정이는 고개를 떨군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너 이제 솔직히 말해 봐. 어디까지 간 거야 응? 너 설마 남자하고 그 짓까지 한 거야? 말해 봐. 어서.”

세란이의 물음에 민정이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이의 대답을 들은 세란이는 눈 앞이 노랗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란이는 민정이의 두 어깨를 손으로 쥐고 거칠게 흔들며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왜 그랬어? 응? 도대체 왜 그랬냐고 말해 봐. 흑흑.”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세란에게 면목이 없었던 민정이는 세란이가 쥐고 흔드는데로 몸을 맡긴 채 울기만 할 따름이었다. 세란이는 눈물 콧물 질질 짜며 민정이를 붙잡고 울다가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더니, 전혀 딴 사람처럼 냉정한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하였다.  

“괜찮아. 요새 세상이 어떤데 여자도 남자랑 자고 싶으면 자는 거지, 남자들은 그래도 되고, 여자들은 욕 먹는게 어딨어. 괜찮아. 괜찮아. 니가 아직 철이 없어서 잠깐 실수한 거야. 앞으로 안 그러면 돼. 울지마 울지마.”

세란이의 얼굴은 마치 강간당하고 돌아온 딸을 독하게 마음 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위로해 주는 어머니의 그것과 같았다. 물론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세란이는 민정이를 품에 안고 손으로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까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고만 있던 민정이는 세란이의 품에 안겨 ‘으앵’하고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하였다. 세란이는 민정이가 진정 될 때까지 민정이를 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민정이가 좀 진정이 됐다고 생각한 세란은 민정이가 고개를 들게 한 후,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민정이 그런 곳에서 일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세란이는, 그 이유를 민정이에게 물었다. 

“언니가 하나만 묻자. 너 도대체 왜 거기서 일한거야? 너 집이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니가 사치스럽고 그런 아이도 아니었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니? 말 좀 해 봐.”

“모르겠어. 그냥 그 아이처럼 살고 싶었는데. 나도 남들 앞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어.”

민정이의 부모님은 민정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원도 속초에서 음식점을 운영해 오고 있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민정이는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구김살 없이 남부럽지 않게 자라올 수 있었다. 민정이는 강원도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 온 민정이는 대학이라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남보다 인물이 잘난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집안이 잘 사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다방면에 재능이 많은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 등등 각양각색의 특성과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사이 민정이도 그들과 다름 없이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평범한 대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민정이는 외모와 몸매가 꽤 예쁜 편에 속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대쉬를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는 민정이 같은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려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친구들이 있었다. 출발선부터 남달랐던 그들은 항상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쳐 흘렀으며,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외제차를 몰고, 매일 같이 클럽을 다니고, 비싼 양주를 마시며, 자신을 과시하고 즐기기 위해서라면 하룻밤에 한 학기 대학등록금을 질러 버리는데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그들을 보면서 민정이는 속으로 속물이라 욕하고 경멸하였다. 애초에 사치와 허영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민정이는 부모님의 배경이 아니라 스스로 이룩한 성공만이 값지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그런 그녀의 인생관을 바꿔버리는 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민정이가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같은 반에 전학생이 한 명 입학을 하였다. 그 친구의 이름은 이선정이었는데, 선정이는 평범한 얼굴에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통통한, 제법 체격이 있는 친구였다. 선정이는 말수가 적고, 소심한 성격에다 체격에 비해 몸이 약한 편이라 전학을 오고 친구를 사귀는데 애를 먹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선정이가 성격이 좋고 매우 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몇몇 반 친구들이 그녀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민정이도 그런 친구 중에 한 명이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다 보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친구들을 괴롭히고 왕따 시키는 패거리들이 꼭 있게 마련인데, 하필 선정이가 그 패거리들의 타깃이 되고 말았다. 그 아이들은 선정이를 괴롭히고 왕따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선정이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선정이와 같이 놀면 너도 왕따 당할 줄 알라는 협박에 못 이겨 하나 둘 선정이를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의리가 있는 민정이는 반 친구들과 멀어지면서까지 선정이와 함께 어울렸으나, 노골적인 친구들의 괴롭힘과 왕따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2학기의 어느 가을 날 일요일에 민정이는 선정이에게서 생일 초대를 받았다. 장소는 강원도 시내에 있는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민정이는 생일 선물을 사서 약속장소로 갔는데, 일요일임에도 가게에는 먼저 도착한 선정이 외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민정이는 선정이와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재밌게 얘기를 나누었다. 

“선정아, 여기 누가 예약한건가봐.”

“왜?”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테이블이 다 셋팅이 돼 있잖아. 우리 빨리 먹고 나가야 되는거 아니니?”

“아냐, 천천히 먹어도 돼. 여기 울 아빠가 내 생일이라고 빌린거거든.”

“헐.”

민정이는 선정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어린 나이지만 이 곳이 얼마나 비싸고 유명한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 민정이는 가게를 통째로 빌렸다는 선정이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얘, 여기가 얼마나 비싼데? 야, 너네 집 진짜 잘 사나보다.”

“그런 거 아냐. 그리고 사실 나 다음 주에 서울로 전학 가.”

“뭐?”

선정이의 전학 소식을 처음 접한 민정이는 서운하였다. 

“왜? 왜 갑자기 가는거야?”

“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 하라고 아빠가 내려보낸 거거든. 그런데 이제 좀 몸이 나아서 서울로 올라 오래. 엄마가 좀 아프셔서 옆에 있어 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평소 자기 얘기를 통 하지 않는 선정이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민정이는 안타깝고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다른 손님들은 안 와?”

민정이가 묻자 선정이가 웃으며 말하였다. 

“사실은 가기 전에 친구들한테 밥 사주고 싶어서 여기 빌린 거거든. 그런데, 한 명도 안 오네 헤헤헤.”

선정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본 민정이는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그런 민정이의 옆에 앉은 선정이가 냅킨으로 민정이 눈에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울어. 나도 괜찮은데. 울지 마 민정아.”

“흑흑. 선정아. 진짜 너무해. 애들이 진짜 너무해 흑흑.”

선정이는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 주는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조용히 민정이를 껴안았다. 

“고마워 민정아. 우리 나중에 어른 되면 꼭 다시 만나자. 알았지?”

선정이는 다음 주에 전학을 갔고, 처음 몇 달은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점점 그 횟수가 줄어 들어 결국 자연스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 흘러 민정이가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들과 홍대에 놀러간 1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저기, 혹시 민정이 아니니?”

친구들과 길을 걷던 민정이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야, 이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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