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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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59

세월이 흘렀지만, 민정이는 선정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좀 더 자라고, 살이 조금 더 쪘지만 선정이는 중학교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껴안고 비명을 질렀다. 

“어머, 선정아.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와 진짜 반갑다.”

“잘 있었어? 몸은 좀 어때?”

“응, 이제는 괜찮아. 너는? 서울로 대학 온거야?”

“응, 나 한양대 다녀.”

“와, 잘 됐다.”

“선정이 너는?”

“응? 나는 대학 미국으로 갔어.”

“진짜? 어머 웬 일이니. 너 진짜 공부 잘 했나보다. 그럼 방학이라서 들어온 거야?”

“응, 이렇게 만나니까 진짜 반갑다. 어쩜, 웬일이니. 너 진짜 예뻐졌다.”

“예뻐지긴 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젊고 잘 생긴 남자가 선정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가씨, 시간이 늦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기다리시니 서두르시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아가씨?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민정이는 두 사람의 대화내용이 얼른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선정이가 민정이에게 핸드폰을 달라고 한 후 자신의 번호를 찍어주며 말하였다. 

“민정아, 우리 밥 한 번 먹자. 나 다음 주말에 미국으로 돌아가거든. 그 전에 우리 보자. 혹시 중학교 때 친구들 중에 연락하는 친구 있니?”

“응? 어, 혜경이랑 경숙이, 지민이도 서울에서 학교 다녀. 같이 볼래?”

“그래 같이 보자. 걔들도 보고 싶다.”

“보고 싶긴 개뿔. 걔들도 너 배신했잖아.”

“친구끼리 배신이고 뭐고가 어딨어. 다 어렸을 때 일인데. 그럼 우리 다음 주에 한 번 보자. 약속 잡으면 전화 줄래?”

“그래, 내가 애들한테 전화해서 약속 잡으면 연락 줄게. 아유, 이게 웬일이니.”

“그래, 만나서 진짜 반갑다. 그럼 민정아, 나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우리 다음주에 꼭 보자. 알았지?”

“그래, 알았어.”

“나 갈게. 전화 해.”선정이가 손을 흔들며 좀 전의 남자를 따라 걸어갔다. 민정이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선정이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고급승용차에 몸을 싣고 그 곳을 떠났다. 

“야, 쟤 누구야?”

선정이와 대화하는 동안 잠시 떨어져 있던 민정이의 친구들이 물었다. 

“응, 중학교 때 전학 간 친구.”

“와, 쟤 진짜 잘 사나 봐. 그치?”

“그러게.”

친구들이 옆에서 수군수군 대는 동안 민정이는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선정이가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민정이었다. 

민정이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여 저녁 약속을 잡았다. 연락한 친구들 모두 그 때 선정이에게 미안했다며 사과하고 싶다고, 꼭 나오겠다고 약속하였다. 약속한 날짜가 되어 민정이는 선정이가 예약한 약속 장소인 음식점의 한 룸에 들어갔다. 만나기로 한 혜경이, 경숙이, 지민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친구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려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의외의 인물을 본 후 민정이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안녕. 오랜만이다.”

그 의외의 인물이 웃으며 민정이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장수진, 중학교 때 친구들을 선동해서 선정이를 괴롭히고 왕따시켰던 패거리들의 리더격인 친구였다. 얼마나 못 됐는지 선정이와 끝까지 의리를 지켰던 민정을 다음 타깃으로 삼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피곤하게 굴었던 몹쓸 년이었다. 

“쟤 누가 데려 왔어?”

민정이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지민이가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화 하다가 선정이랑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고 하니까 수진이도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 앉어 응?”

선정이를 배신하고 그 때부터 수진이의 패거리를 졸졸 따라다니던 지민이는 지금도 수진이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모양이었다. 

“니가 선정이를 볼 일이 뭐가 있어?”

민정이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물었으나, 수진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하였다. 

“중학교 때는 내가 심했어. 너한테도 미안하고. 그래서 사과나 할까 하고 왔지. 왜 안 되니? 서 있지 말고 앉어. 정신 사납다 얘.”

“그래. 민정아 일단 앉아.”

“그래.”

다른 친구들도 민정이가 앉을 것을 권하였지만, 민정이는 수진이의 뻔뻔스러운 표정과 말투 어디에서도 지난 날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기미를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빠진 민정이는 밖으로 나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정이에게 약속이 취소 되었다고 전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정이가 돌아서서 룸을 막 나서려는 참에 선정이가 도착하였다. 

“민정아 안녕. 왜 안 앉고 서 있어? 와 오랜만이다 얘들아.”

선정이가 나가려는 민정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친구들에게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선정이의 그런 미소도 수진이를 보자마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안녕, 오랜만이다.”

하지만 선정이는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착한 마음씨를 갖고 있는 듯 하였다. 민정이 자신이라면 선정이에게 침을 뱉고 쌍욕을 해도 시원찮았을텐데, 선정이는 금새 웃으면서 수진이에게도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오랜만이다. 너도 잘 지냈지?”

민정이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불편한 상황을 겪게 한 것이 미안하여 선정이에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수진이는 괜찮다는 뜻으로 눈을 찡긋거리며 민정이를 데리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수진이의 갑작스런 등장 때문에 어색했던 분위기는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며 자연스럽게 풀려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말수도 적고 내성적이었던 선정이가 말도 많아지고, 밝아진 것 같아 그런 선정이를 보는 민정이는 참 다행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주문한 식사가 도착하자 친구들은 근황 토크에서 어렸을 때의 추억 얘기로 주제를 전환하였다. 그러자 그 때까지 별 말 없던 수진이의 깐족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어쩜, 선정이 너는 변한 게 전혀 없니? 덩치만 더 좋아졌네. 호호호. 너랑 민정이랑 같이 다닐 별명이 미녀와 야수였잖아. 너도 들은 적 있지? 그거 내가 지어준거야 호호호. 얘들아 진짜 잘 짓지 않았냐?”

친구들은 수진이의 짓궂은 옛날 얘기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씁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수진이의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동네에서 공장을 크게 운영해온 동네의 유지셨는데, 그래서 수진이가 몹쓸 짓을 하고 다녀도 동네 사람들은 크게 나무라지를 않았다. 어릴 때부터 수진이를 보고 자라온 친구들은 그 때의 트라우마가 남은 듯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수진이가 어렵고 불편한 것이었다. 

“야, 사과하러 왔다며? 작작 좀 해라. 밥이나 쳐드시고 그만 가지?”

민정이가 선정이를 대신하여 수진이에게 따졌다. 그러나 수진이는 오히려 민정이에게 웃으며 되물었다. 

“얘, 넌 웃자고 어렸을 때 얘기 하는 건데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러니? 그래도 넌 내가 미녀라고 불러줬잖아. 그럼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니니?”

“이게 진짜.”

너무 화가 난 민정이가 한 판 붙을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선정이가 민정이의 팔을 꽉 붙잡았다. 민정이가 선정이를 쳐다보자 선정이는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참으라는 뜻이었다. 민정이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수진이의 깐족거림은 계속 됐고, 특히 선정이의 외모를 비하하는 말들을 자주 쏟아냈다. 평소 자신의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었던 선정이는 계속 웃으며 수진이의 비아냥거림을 넘기고는 있었으나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수진이는 선정이의 성질을 건드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어머, 그런데 선정이 너 나랑 같은 브랜드 옷 입었다.”

수진이가 선정이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 보기 시작하였고, 다른 친구들도 수진이의 시선을 따라 선정이를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크게 튀지 않는 차림새였는데, 가만 보니 선정이가 입고 차고 있는 옷과 악세사리들은 모두 유명 명품 브랜드의 것들이었다.  

“너 들고 온 빽도 명품이네? 어머, 너 서울로 이사갔다더니 아버지가 돈 많이 버셨나보다. 그런데 진짜 너랑은 안 어울린다 호호호. 얘 너 그 옷 맞긴 하니? 그 브랜드 빅사이즈는 취급 안 하는데?”

또 다시 자신의 외모에 대해 험담을 하는 수진이를 본 선정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정이는 잔뜩 화가 난 듯 수진이를 쏘아보았으나, 금새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한마디 건네었다. 

“훗, 수진아. 너 같은 천민들이나 옷에 몸을 맞추는거야. 알겠니? 어쩜 넌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그 천박스런 얼굴도, 유치한 말장난도.”

선정이는 밖으로 나가며 친구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먼저 일어나서 미안해. 계산은 내가 할게.”

문을 나서던 선정이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자리에 멈춰서더니 수진이에게 말하였다. 

“아 참, 너네 집 지금도 공장하고 있니? 옷 깨끗하게 입어. 그 공장 망하면 너 쓰던 거 다 팔아야 될 테니까.”

수진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고, 선정이의 뜻밖의 모습을 본 민정이와 친구들은 떠나는 선정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민정이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진이의 공장이 문을 닫고, 빚더미에 앉은 수진이의 집이 야반도주를 했다는 것이었다. 몇 십년 째 한 곳에서 운영해온 수진이의 공장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쌓아온 인맥과 탄탄한 거래처들로 인해 지역에서 가장 알짜배기 공장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 불과 몇 개월 만에 문을 닫고, 수진이 식구들은 패가망신을 하고 만 것이었다. 민정이는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치 이 일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내뱉었던 선정이의 말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민정이는 잠깐 선정이가 한 짓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였지만 스스로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겼다. 선정이가 무슨 수로 멀쩡한 공장의 문을 닫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민정이는 그 것이 충분히 말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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