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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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61

선정이의 장례식을 다녀온 후로 민정이는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산다는 게 참 허무하다는 것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선정이에게 직접 자초지종을 들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수진이의 집이 어느 날 갑자기 망하게 된 것은 분명 선정이의 소행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민정이는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선정이가 수진이에게 보였단 말과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절대 흥분하지 않고 소리 지를 필요도 없이, 도도한 표정과 단 한마디 말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가진 자의 힘과 여유. 사실 그날 민정이는 선저이의 행동을 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그간 친구들에게 말은 안 하였지만, 민정이는 수진이가 죽이고 싶을만큼 밉고 싫었다. 아무 이유 없이 단지 선정이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당했던 민정이는 수진이 패거리가 자신을 괴롭힐수록 오기로 선정이와 더 붙어 다녔었다. 선정이가 전학을 가게 되고 자연스레 괴롭힘에서 벗어나나 하였으나, 수진이는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혔고, 그녀의 괴롭힘은 민정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민정이는 머리끄덩이라도 붙잡고 싸우고 싶었으나, 그러다가 친구들과의 사이가 더 안 좋아지지는 않을까 두려웠고, 또한 어린 마음에 자신이 수진이와 싸우면 괜히 동네에 안 좋게 소문이 나서 행여 부모님이 장사하시는데 방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꾹 참고 지내야만 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선정이를 만난 자리에서도 수진이의 짓궂은 행동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 있는 친구들과 소리만 질렀을 뿐,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속이 상했던 민정이는 선정이의 말과 행동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그 때부터, 선정이의 죽음을 겪고 난 이후부터 민정이의 인생관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누구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성공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민정이의 믿음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고, 돈과 지위만이 성공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라는 속물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선정이와 같은 로열 패밀리가 될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민정이는 결국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는 남자와의 결혼을 통한 방법 외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평소 민정이의 예쁜 외모를 눈 여겨 보던 무용과 선배 언니가 자신이 일하는 곳에 가면 괜찮은 남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며 민정이를 꼬드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평소 과에서 소문이 좋지 않은 선배의 꼬드김에 경계를 하며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어린 학생 신분에 고급 외제차를 타고 명품 브랜드만을 즐겨 찾는 선배 언니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민정이는 결국 선배를 따라 지금 일하는 클럽에 찾아가게 되었고, 결국은 김사장의 스폰을 받는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민정이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세란이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아, 그래서? 그래서 너는 지금 이 생활이 만족스럽니? 계속 이렇게 살고 싶은거야?”

세란이의 물음에 민정이는 울먹이며 대답하였다. 

“아니, 언니. 나 무서워.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무섭고, 내가 이제 내가 아닌 것 같아서 무서워. 정말 내가 쓰레기 같고 걸레가 돼 버린 것 같아. 언니, 나 어쩜 좋지? 나 어쩜 좋아 흐흑.”

세란이는 오열하는 민정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으며 말하였다. 

“민정아 언니 봐봐. 정신 차리고 언니 봐봐 어서.”

민정이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세란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 잊자.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그냥, 음, 그냥 또래보다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하고 연애했다고 생각하자. 그냥 좀 평범하지 않고, 남들은 못 하는 조금 나쁜 경험을 했다고 치자구. 고개 들어. 언니 봐봐. 너 일 그만 둘거지? 그럴 수 있지?”

민정이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장 일 그만 둬. 다시는 거기 가지 말라구. 니가 원하면 그만 둘 수 있는거야? 안 되면 언니가 같이 가 줄게.”

“아냐 언니. 나 선수금 같은 거 안 받아서 내가 그만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어. 그런데 지금 나 찾는 단골이 있는데 어떡하지? 그 사람이 나 가게 그만 두고 자기가 오피스텔 사 줄테니까 나와서 살라고 그랬거든. 어떡하지?”

민정이의 말을 들은 손으로 민정이의 가슴을 모질게 때리며 화를 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그게 아깝다는 얘기야? 응? 오피스텔이 아쉬워?”

“아냐 언니, 그런게 아니고 그 사람이 나한테 집착하면 어쩌지? 안 떨어지면 어쩌냐구.”

민정이의 잔뜩 겁먹은 표정을 보니 세란이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민정이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걱정하지 마 민정아. 언니 법대생에 사시 준비하는 사람이야. 그런 데 출입하면서 여자 만나는 사람이 어디 정상적인 사람이니? 소문 나면 자기 손해인데 절대로 너 해코지 못해. 잃을 게 많은 사람들은 절대 함부로 행동 못 한다구. 만약 너 귀찮게 하고 그러면 언니가 절대 가만 안 둘 거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당장 안 나간다고 사장한테 전화해. 알았지?”

세란이의 말에 힘을 얻은 민정이는 일을 시작하면서 항상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모든 불안함과 두려움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니,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민정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묻자, 세란이는 그런 민정이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럼, 다시 시작할 수 있지. 그럼, 물론이지. 괜찮아 내 동생. 우리 다 잊자. 다 잊고 다시 시작하자. 여태까지 일은 우리 둘만 아는거야. 평생 무덤까지 갖고 가는 거라구, 알았지? 괜찮아 괜찮아. 겁먹지마.”

세란이는 안고 있는 민정이의 등을 손으로 토닥거리며 한참을 그녀에게 격려와 위로, 응원의 말을 해주었고, 민정이는 그날 저녁 바로 클럽 사장에게 전화하여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클럽 사장은 가게의 에이스가 그만두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고, 김사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달라는 민정이의 부탁에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였다. 물론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다시 오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 클럽 사장이었다. 그렇게 민정이는 화류계 생활을 청산하고 평범한 또래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민정이의 이 남들에게는 말 못할 오늘의 비밀이 후에 하숙집 사람들 모두에게 몰고올 엄청난 파장을 세란이와 민정이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세란이와 민정이가 방에서 울며 불며 가슴 찡한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사이, 영숙이는 아침밥을 먹고 곧장 경기도 안성에 있는 회사 물류 창고에 찾아갔다. 그 곳에서 근무하는 이명훈 실장에게 볼 일이 있어서였다. 

“아저씨.”

물류창고 정문에 도착한 영숙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명훈 실장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런 영숙이를 본 이 실장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걸어왔다.  

“영숙양, 오랜만이야.”

“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별 일 없으셨죠?”

“나야 뭐, 별 일이랄게 있나요 하하하. 밥은 먹었어요?”

“네 먹고 왔어요. 아저씨는요?”

“나도 먹었지. 음, 점심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인데 어떻게 하지? 우리 차나 마시러 갈까요?”

“네, 아 참, 그런데 아저씨 자리 비우셔도 돼요? 혹시 곤란하시고 그런 거 아니에요?”

“천만에요. 어차피 내가 있든 말든 여기 사람들은 별로 신경도 안 써요. 나도 나일롱 직원 다 됐다니까 하하하.”

이 실장의 말을 들은 영숙이는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 나 따라와요. 근처에 괜찮은 커피숍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얘기합시다.”

“네, 아저씨.”

영숙이는 이 실장을 따라 창고 인근의 한 커피숍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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