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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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62

“아저씨, 우리 얼마만이죠? 이렇게 얼굴 보고 얘기하는게?”

“음, 2년하고 한 3개월? 4개월 정도 됐죠?”

이 실장의 말을 들은 영숙이가 웃었다. 

“하여간, 아저씨는 여전하시네요. 항상 꼼꼼하고 빈틈이 없으셨죠 아저씨는. 아빠한테는 말씀 없었나요? 다시 들어오시라고.”

“아직은 제가 별로 탐탁치가 않으신가 봐요. 연락이 없으신거 보니 허허허.”

입사 동기들 중 제일 출세가 빨랐던 이 실장이 이런 곳에서 썩고 있다니 영숙이는 마음이 아팠다. 성수가 떠나고 한참 후에 영숙이가 이 회장을 만나러 회사에 들렀을 때, 이 실장이 좌천된 것이 회장 딸의 연애질 때문이라고 직원들이 수근대는 것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미안해요. 저 때문에.”

영숙이는 진심을 담아 이 실장에게 사과를 하였다. 

“꼭 한번은 얼굴 보고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아저씨.”

영숙이의 사과를 들은 이 실장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하였다. 

“에이, 내가 여기 내려온 게 어디 영숙양 때문인가. 그냥 내가 회장님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해서 잠깐 내려와 있는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몇 개월 후에 정기 인사 있을 때 또 부르실지 아나요 하하하.”

비록 이 실장은 웃고 있었지만, 그런 이 실장을 바라보는 영숙이의 마음은 많이 불편하였다. 하지만 영숙이는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를 슬슬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아저씨, 이렇게 찾아뵌 건 다른게 아니구요. 제가 예전이 아저씨께 몇 가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던 거 있잖아요?”

“아, 그거. 안 그래도 전화로 얘기할려고 했는데 직접 찾아왔네요. 음, 뭐부터 얘기할까.”

“우선 저 따라다니는 직원들 얘기부터 해주세요.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비서실 사람들 같긴 한데 영 분위기도 이상하고, 차 집사 아저씨한테 물어봐도 잘 말해주지도 않고.”

“그 부분은 나도 좀 이상해서 예전 여기 내려올 무렵에 인사부 동료한테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었어요. 새로 교체된 비서진이 어떤 친구들인지 좀 알아봐 달라고. 듣기로 개별 고용이 아니라 팀으로 전원 경력직 스카웃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이, 인사부에 서류 지원을 통하거나, 헤드헌터를 통해 영입된 게 아니라 어떤 제대로 된 서류 구비도 없이 인사 담당 이사님의 전결로 채용이 됐다고 하더군요. 인사부장님을 통해 어떻게 된 일인지 이사님께 물어봤지만 그에 대해서 함구하라는 지시만 있었구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을 통해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결과가 좀 흥미롭더군요. 지금 비서2팀으로 근무하고 있는 그 친구들은 우리 팀이 해체되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던 사람들이라는 거에요. 아마 영숙 양도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기억이 날 겁니다. 그게 모두 그 친구들의 작품들이었던 거죠.”

영숙이는 순간 고등학교 때 일진 사건들을 비롯해 어렸을 때부터 자기 주변에서 있었던 특이한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영숙이의 표정이 금새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이 실장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 친구들이 예전에 주로 했던 일들이 외부에 알려지면 좀 곤란한 일들, 떳떳하지 못한 일들을 주로 처리해 왔다고 하더군요. 아, 그렇다고 아버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요. 회장님 뿐만 아니라 큰 기업을 하다 보면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도 있고, 법적인 절차를 밟기엔 상황 처리가 시급한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회장님 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오너들은 암암리에 그런 일을 처리해 줄 친구들을 곁에 두고 있답니다. 뭐 어찌 됐든 우리 팀이 해체 되고 그 친구들을 정식 비서진으로 고용하신 건데 그 이상은 나도 파악하기가 힘들더군요. 다만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리 질이 좋은 친구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영숙 양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친구들이 감히 영숙 양에게 무슨 짓을 할 리는 없지만 말이에요. 행여 같은 내용도 영숙 양에 관해서 회장님께 안 좋게 보고할까봐 염려 돼서 하는 말입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저씨. 그리고 제가 또 부탁드렸던 거...”

“어머니하구 성수 군 찾아달라는 거 말이죠?”

영숙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결과가 좀 있었으면 좋으련만, 미안한 말 밖에 전할 게 없네요. 우선 영숙 양의 어머님은 떠나신 지가 너무 오래 돼서 소재를 파악하기가 힘들더군요. 어머님의 친지들과 당시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해 봤는데, 그렇게 떠나시고는 일절 연락이 없으셨다네요. 지금도 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아보고는 있는데 아직은 이렇다할 만한 정보가 없어요. 어딘가에 살아 계시다면, 아 미안해요. 내가 말실수를 했네요. 분명히 잘 지내고 계실 겁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내가 꼭 찾아줄 테니까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기다려요. 알았죠?”

오래 전 헤어진 어머니를 찾기 힘들 것이라는 건 영숙이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영숙이는 이 실장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성수 군은 영숙 양과 헤어지고 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1년 후 쯤에 한국으로 돌아왔다더군요.”

“네? 성수가요?”

이 실장 뿐만 아니라 영숙이는 그 동안 성수에 대해 여기저기 수소문 하는 동안 성수를 봤다는 얘기를 성수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성수에게 연락이 없었고, 보았다는 사람들도 그 사실에 대해 확신을 못 하던 터라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믿을 수 있는 소식통인 이 실장의 입에서 이 사실을 전해들으니 영숙이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네, 그런데 이후의 행적이 묘연해요. 한국에 돌아와서 잠시 서울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혼자 지낸 것까지는 확인을 했는데 이웃집 사람에게 물어보니 어느 날 갑자기 이사 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새로 이사 온 사람과 경비실, 인근 부동산, 혹시 몰라서 동사무소에서 전입 전출 담당하는 공무원한테까지 알아봤는데 소재 파악이 힘들더군요.”

이 실장의 말을 들은 영숙이는 심장이 방망이질 치듯 쿵쿵거리고 있었다. 영숙이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 실장에게 성수에 대해 물었다. 

“저, 성수, 잘 있기는 한 건가요? 잘 있는 거죠 아저씨?”

“우선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경비실에 물어보니 표정도 밝아보였고, 건강에도 전혀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이 실장의 말을 들은 영숙이는 한 편으로는 성수가 건강하다는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서울에 돌아왔는데도 자신에게 연락이 없는 성수가 서운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서울에 돌아왔으면서도 나한테 연락을 안 했을까요? 아저씨 왜죠?”

시무룩한 영숙이의 표정을 본 이 실장은 도움이 돼 줄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글쎄요. 아마 말 못 할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하지만 영숙 양이 성수 군을 생각하는 것처럼, 성수 군도 영숙 양을 잊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내가 계속 알아보고 있고, 또 언제고 성수 군이 영숙 양에게 먼저 연락할 수도 있으니까 조급해 하지 말아요 영숙 양.”

영숙이는 이 실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였다.

“자, 이러지 말고 우리 그만 일어납시다. 얘기하다 보니까 벌써 점심 시간이 다 됐네. 우리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을까요?”

영숙이는 이 실장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그만 가 볼게요 아저씨. 바쁘실텐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실장은 실망한 표정의 영숙이의 어깨를 손으로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없었지만, 그래도 힘 내요.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테니까. 내가 열심히 알아볼게. 자 약속.”

이 실장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영숙이는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였다. 

“네, 약속.”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서려는데 영숙이가 멈춰서서 이 실장을 자리로 불러들였다. 

“아저씨, 잠깐만요.”

“응? 왜?”

이 실장이 영숙이에게 다가가자 영숙이는 자신의 핸드백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어 이 실장에게 건네었다. 

“이게 뭐죠 영숙 양?”

“바쁘실 텐데 도와주셔서 그냥 감사한 마음 조금 넣었어요. 받아주세요 아저씨.”

이 실장은 영숙이가 건넨 봉투를 받아 안을 살펴 보았다. 봉투 안에는 백 만원짜리 수표가 두둑하게 들어 있는 것이 얼핏 보기에도 큰 금액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러지 마요 영숙 양. 이러면 내가 곤란해.”

이 실장은 정중히 봉투를 영숙이에게 되돌려 주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영숙이는 막무가내였다.

“아니에요. 이거 받으셔야 제 마음이 편해요. 그리고 엄마하고 성수 알아보시려면 비용도 들어갈 텐데 거기에 써 주세요. 네? 아저씨 제발 부탁이에요.”

영숙이의 거듭되는 부탁에 이 실장은 봉투를 받아 안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낸 후 다시 영숙이에게 봉투를 돌려주었다.  

“하아, 이러면 내가 너무 부끄러워지는데, 그런데 이건 많아도 너무 많아요. 그럼 조금만 놔두고 나머지는 가져가요 자.”

그러나 영숙이는 한사코 봉투를 받지 않았고, 이 실장은 마지못해 봉투를 안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영숙 양이 정 그렇다면 이번만 받을게요. 대신에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또 이러면 나 영숙 양 안 볼거야. 알았죠?”

이 실장의 말을 들은 영숙이가 혀를 삐쭉 내밀며 웃었다.

“헤에, 그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넣을 걸 그랬네. 아저씨 고마워요.”

“고맙긴, 제대로 알아낸 건 하나도 없는데. 하여간 천천히 여유를 갖고 찾아 봅시다. 분명 좋은 결과 있을 거에요.”

“네 고맙습니다. 아저씨, 저 이만 가볼게요.”

“그래요. 또 전화해요.”

커피숍을 나선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이 실장은 영숙이에게 말 못 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성수의 행방에 관해서였다. 사실 이 실장은 성수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영숙이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영숙 양 미안해. 아직은 두 사람이 만나기는 시기상조야. 당분간은 서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이 영숙 양이나 그 친구한테 둘 다 좋은 일이야. 나중에 언제고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내가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해 줄게.’

이 실장은 떠나가는 영숙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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