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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63
영숙이는 돌아오는 내내 성수가 떠나기 전 자신에게 전했던 편지를 보며 생각하였다. 왜 성수는 꿈에 그리던 가수 데뷔를 코 앞에 두고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만 했을까. 평소 성수는 공부에 별로 소질도 관심도 없었던 데다, 성수를 미국으로 유학 보낼 만큼 집안이 여유롭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왜? 그리고 성수의 편지를 통해 성수의 진심을 느꼈던 영숙이는 돌아온 성수가 자신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하지 않고 또 다시 사라져 버린 것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가 않았다. 영숙이는 고 3때 우연히 인천에서 만난 한 아줌마를 생각하였다. 그 아줌마는 영숙이가 몇 번 성수네 가게에 놀러 갔을 때, 가게에서 본 기억이 있는 일하는 아줌마였다. 영숙이가 처음 그 아줌마에게 말을 걸었을 때는 영숙이에 대해 기억을 잘 못 하였으나, 영숙이가 자신이 가게에 놀러 갔을 때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자 아줌마는 점점 영숙이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하였다.
“아줌마, 이제 기억나세요?”
“응, 맞아 맞아. 성수 여자 친구 맞지? 학생 얘기 들으니까 이제 기억이 나네 호호호.”
“오랜만에 뵙네요. 아줌마는 별일 없으셨죠?”
“나야 뭐 별 일이랄게 있나. 그런데 학생은 용케 내 얼굴을 기억하네? 난 학생 얘기 한참 듣고 나니까 기억이 나는구만. 참 머리도 좋아.”
“에이, 아니에요. 저기 아줌마.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응, 말해 봐.”
“성수네 갑자기 이사 갔잖아요. 혹시 뭐 아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왜? 성수가 학생한테도 연락 안 했어?”
“네.”
영숙이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아줌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어쩜 어쩜, 사람들이 그래? 아니 나도 출근했는데 갑자기 가게가 문이 닫혀 있어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원. 아니 무슨 사정이 있으면 사정이 있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지 갑자기 그렇게 문을 닫아 버리고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말야. 내가 그 가게에서 일을 한 게 몇 년인데 어찌 그리 사람들이 매정할 수가 있냐구. 아유, 그럼 학생도 성수한테 전화도 못 받은거야? 어쩜 부모 자식이 쌍으로 똑같이 논다니. 학생도 참 황당했겠다 쯧쯧. 내가 월급이라도 제때 안 보내줬으면 경찰서 찾아갈려고 했다니까.”
“아줌마, 혹시 갑자기 가게 문 닫기 전날에 혹시 이상한 일 없었나요?”
아줌마는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영숙이는 아줌마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이상한 일? 음, 있었지.”
“그래요? 그게 뭔데요? 말씀 좀 해주세요.”
“그 전날 낮에 가게로 어떤 남자가 찾아 왔었어. 이렇게 썬글라스 끼고 검은 양복을 입은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말야. 와서 테이블에 앉아서는 사장님하고 잠시 얘기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사장님하고 마시라고 커피를 타다 줬지. 처음에는 그냥 조용조용히 얘기 하길래 난 그냥 별 신경 안 쓰고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언성이 커지더니 사장님이 그 남자 멱살을 막 요래요래 잡고 삿대질을 하면서 욕을 하는거야. 그런데 남자는 그냥 웃으면서 테이블에 봉투를 놓고 나가버렸었지.”
“아줌마, 혹시 성수네 아버지하고 그 남자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못 들으셨어요? 혹시 기억 안 나세요?”
“글세, 내가 뭐 두 사람 얘기를 신경 쓸 이유나 있었나. 그냥 이제 언성이 높아지니까 그 얘기는 기억나네. 사장님이 막 화를 내면서 남의 아들 일에 니들이 왜 감 놔라 배 놔라 참견이냐, 내가 장사하고 말고는 내 맘이니까 신경쓰지 마라 하고 화를 냈었지. 그러니까 남자가 나가면서 현명하게 판단할 거라고 믿는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더라구.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성수네가 갑자기 문을 닫고 야반도주 하듯이 떠난 게 그 남자랑 연관이 있는거다 싶더라구.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한테도 전화 한 마디 없이 떠날 수가 있냐구.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말야. 또 생각하니까 열 받네. 아 매정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아줌마는 다시금 떠오른 그 날의 황당한 기억에 씩씩거리며 흥분을 하였고, 말을 다 듣고 난 영숙이는 아줌마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 날 이후로 영숙이는 가게에 찾아 왔던 그 남자가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해 왔다. 하지만 영숙이의 능력으로는 더 깊이 알아볼 수가 없었고, 아버지가 남자를 보내 성수네 가족을 갑자기 떠나게 할 만큼의 합리적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의심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이 실장의 얘기를 듣고 난 영숙이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성수가 뭔가 타의에 의해 자신을 피하고 있고, 그 배경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다시 꺼내본 편지에서 영숙이는 성수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그렇게 자신을 좋아했던 성수가 연락조차 할 수 없는 것은 뭔가 거역할 수 없는 누군가의 뜻에 따른 것이며,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을 미루어 봤을 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영숙이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안절부절하며 이리저리 궁리해 봤으나 아무 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영숙이의 주변에는 영숙이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영숙이는 이 실장이 성수를 찾고 있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모르는 척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마음이 답답하고 찝찝한 감을 지울 길 없는 영숙이었다.
한 편, 영숙이가 다녀간 그 날 저녁 퇴근 준비를 하던 이 실장은 낯선 남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
“어이 이 실장님, 오랜만에 뵙수다.”
“누구시죠? 누구시길래 저를...”
“아, 나요? 나 황실장이라는 사람이외다. 그러고보니 이 실장님은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군요. 난 이 실장님 여러번 봤었는데 말이오 허허허.”
이 실장은 자신을 황 실장이라고 밝힌 남자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거친 얼굴과 말투에 다부진 체격이 꼭 조폭 오야지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고, 그런 남자가 갑자기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 실장은 의문스러웠다.
“저를 여러 번 보셨다구요. 허허 무슨 일로 저를?”
이 실장의 물음에 황 실장은 썬글라스를 벗고는 웃으며 이 실장을 쳐다 보았다. 이 실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황 실장의 눈빛에서 난생 처음 느껴보는 살기 같은 것을 보았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저런 눈으로 쳐다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자의 눈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게 내가 듣자니 이 실장님이 나에 대해서 캐고 다닌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캐다뇨?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실장은 황 실장의 물음에 대답하는 찰라, 무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혹시 새로운 비서 2팀의 실장?’
이 실장의 예상은 맞아 들어갔다. 이 실장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황 실장은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며 이 실장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을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황 실장이 웃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 보며 말하였다.
“하하하, 선생님들 별 일 아니니까 일들 보세요. 별 일 아닙니다 하하하.”
황 실장에게 멱살을 붙잡힌 이 실장은 숨이 막혀 황 실장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황 실장의 완력이 장난이 아닌지라 꼼짝 없이 벽에 등을 붙인 채 켁켁 거리고 있었다. “이, 이봐요. 이거 컥, 이거 놓고 얘기 합시다.”
이 실장의 죽을 것처럼 헐떡대자 황 실장은 이 실장을 풀어주어고, 그제서야 이 실장은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였다. 이 실장도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격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런 이 실장을 한 손으로 꼼짝 못하게 하는 황 실장의 정체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이, 이명훈이. 내 말 똑똑히 잘 들어. 듣기로 당신 요새 내 정체하고 아가씨 관련한 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거 같은데 당장 그만 둬. 알았어? 이거 경고야. 똑똑히 알아 둬. 긴말 안 할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황 실장은 긴 말 없이 자신의 할 말만 간단히 남기고 자리를 떠나려고 하였다. 이 실장은 출입문으로 걸어가는 황 실장에게 소리쳐 물었다.
“당신 새로 온 비서팀 실장이지? 그렇지? 지금 이 것도 회장님 지시냐?”
걸어가던 황 실장이 뒤돌아서며 이 실장에게 말하였다. 예의 그 기분 나쁜 미소를 입가에 잔뜩 머금고.
“어이 이봐, 이 실장. 난 회장님 지시 받고 움직이는 사람인데 말야. 가끔은 지시 없이도 움직이는 사람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짱돌 한 번 잘 굴려 보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