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9 / 0093 ----------------------------------------------
[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69
같은 날 오전, 은애는 서울행 KTX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은애는 창식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뭐해? 알바 중?”
“ㅇㅇ 오는 중이야?”
“ㅇ 점심 쯤에 도착할 것 같아. 알바 몇 시에 끝남?”
“나 오후 세 시에 끝나.”
“그럼 내가 거기로 갈게. 주소 좀 카톡으로 보내.”
“알았어. 이따 봐.”
은애는 핸드폰을 집어 넣고 시트를 뒤로 젖힌 후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여중과 여고를 나온 은애는 대학 가면 남자친구 사귀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충실한 나머지, 가까운 친구들 모두가 인근 학교의 남학생들과 사귈 때에도 남자 보기를 돌 같이 하며, 이성교제에 최대한 무관심 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예쁘고 매력적인 그녀를 주변의 남자들이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통학 버스 안에서 남학생에게 쪽지를 받아본 적도 있었고, 친구와 친구 남자친구들과의 모임에서 그녀를 눈 여겨 본 남학생의 대시를 받은 적도 수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유혹을 모두 뿌리치고 대학교에 진학하였고, OT 때 우연히 마주친 창식이에게 그녀의 순정을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은애는 요새 너무 행복하였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찬가지로 자신을 끔찍하게 아껴주고 사랑해 준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랑이 부모님 외에도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은애는 무한한 감사와 소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은애는 불과 몇 시간 후면 창식이를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 올랐고,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하고 놀지 같은 것들에 대한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남들이 보면 걱정도 팔자다, 만나면 어련히 자연스럽게 흘러갈 일들인데 뭘 고민을 하냐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연애는 하는 맛도 좋지만, 앞서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도 연애만큼이나 맛있는 것 아니겠는가. 창식이와의 달달하고 상큼한 데이트를 꿈꾸는 은애의 핑크빛 상상은 은애 자신도 모르는 새 그녀의 두 뺨을 조금씩 조금씩 수줍은 선홍빛으로 물들여 가고 있었다.
창식이는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중학생 과외 수업 외에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동네에 있는 이마트의 생선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코너에는 이마트의 정규직원 다섯 명과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 네 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후 1시까지 있는 점심시간으로 30분 씩 교대로 식사를 하였다. 나중에 밥을 먹기로 한 창식이는 매대에 얼음을 채우고 냉장실에서 생서을 갖고 와 진열을 하느라 분주하였다.
“어머, 어쩜 생선들이 눈깔이 다 맛이 갔네.”
매대에서 등을 돌린 채로 생선을 정리하고 있던 창식이는 매대 쪽에서 이상한 말이 들리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은애야.”
창식이가 바라본 곳에는 은애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농담이야 농담. 깜짝 놀랐지?”
“언제 왔어?”
“지금 막 왔어. 밥은 먹었어?”
“아냐, 조금 이따 교대하면 먹어야지.”
창식이가 눈치 없이 은애와의 대화에 넋을 놓고 있자 옆에 있던 생선코너의 직원 형이 헛기침을 하며 창식이에게 눈치를 주었다. 창식이보다 먼저 직원의 눈치를 알아차린 은애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며 말하였다.
“창식아, 나 푸드코너에 있을 테니까 전화해.”
“응, 알았어.”
은애가 자리를 떠나자 직원 형이 정면을 쳐다보며 창식이에게 물었다.
“여자친구냐?”
“네.”
“쟤는 인사가 뭐 그리 험하냐.”
직원 형은 은애가 농담 삼아 한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고, 이에 창식이가 대신 사과하였다.
“네? 네, 죄송합니다.”
직원 형은 사과를 하는 창식이에게 슬쩍 곁눈질을 하더니 찡긋 눈웃음을 지었다.
“좋겠다. 여자친구 이뻐서.”
잠시 긴장했던 창식이는 직원 형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맙습니다. 형.”
먼저 밥을 먹으러 간 사람들이 매대로 돌아오자, 창식이는 한 달음에 푸드코너로 달려갔다. 창식이는 은애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살폈고, 창식이를 먼저 발견한 은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창식이는 웃으며 은애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느라고 힘들었지?”
“아니, 편하게 왔어. 점심 시간 언제까지야?”
“응, 한 시까지야. 30분 이따가 가 봐야 돼.”
“그렇구나. 배 고프겠다. 일단 우리 밥부터 먹자.”
“그래.”
두 사람은 각자 육개장과 돈까스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칠월칠석날 오작교에서 만난 견우와 직녀처럼 창식이와 은애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만나서 하는 얘기래봐야 전화로 했던 얘기를 또 하는 것 뿐인데, 왜 그리도 항상 들어도 들어도 재밌고 설레는 것인지, 두 사람은 음식이 나왔지만 먹는 둥 마는 둥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렇게 점심 시간 30분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흘러갔다.
“은애야, 나 이제 가 봐야 돼. 혼자 기다리기 지루하겠다. 어떡해?”
“너 일하는 거 구경하지 뭐. 얼른 가 봐.”
“알았어. 그럼 조금만 기다려. 이따가 보자.”
은애는 생선코너로 뛰어가는 창식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였다. 참 언제 봐도 애틋하고 이쁜 커플이 아닐 수가 없다. 은애는 먼 발치에서 창식이가 일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냥 똑같이 매대 뒤에 우두커니 서서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생선 권하고, 팔고 하는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은애는 전혀 지루하지도 않았고, 벌써 한 시간 가까이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심지어 은애의 눈에는 가끔 낙지를 집어 올리는 창식이의 모습이 거대한 크라켄과 맞서 싸우는 잭 스패로우 선장으로 보이기까지 하였다. (잭 스패로우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주인공 해적 선장입니다. 어부가 아닙니다 - 작가 注) 그렇게 창식이를 지켜보다가 둘이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서로 손을 흔들고 뽀뽀하듯 입술을 모으는 시늉을 하는 것이 옆에 있는 사람은 도저히 눈꼴이 시어서 못 봐 줄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은애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창식이에게 아까 전의 그 직원 형이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하였다
“니들 너무 오바 아니냐. 누가 보면 집 나간 마누라 돌아온 줄 알겠다.”
“네? 네. 죄송합니다.”
“아니, 뭐라 할려는 건 아니구. 잘 어울린다 니들.”
“네? 하하, 그렇죠? 감사합니다.”
한 시간이 하루 같았던 근무 시간이 모두 끝나자, 창식이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함께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들이 귀찮게 굴기 전에 서둘러 은애와 함께 마트를 빠져 나왔다. 안 그래도 아르바이트 날짜를 바꾸지 않아서 오늘과 내일 오후 시간에만 함께 보내야 하는데, 친구들에게 붙잡혀서 시간을 허비하기엔 1분 1초가 아까운 창식이었다. 창식이는 은애를 데리고 월미도로 갔다. 그 곳에서 둘은 월미도의 명물인 디스코팡팡도 타고, 바이킹도 타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창식이의 집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한 잔 하였다. 이미 잠자리를 함께 한 두 사람은 (발기부전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부산에서 만났을 때처럼 더 이상 어색해 하지 않았고, 술이 한 잔 들어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진한 스킨십을 거리낌 없이 나누는 누가 보기에도 끈적끈적한 커플 그 자체였다. 술 한 잔에 키스 한 번, 또 술 한 잔에 키스 한 번을 나누던 그들은 열 시가 좀 넘을 무렵 술집을 나섰다.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님을 서울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잔다고 설득하여 올라온 은애는 내일 저녁에는 다시 부산으로 출발해야만 하였다. 은애가 먼저 모텔을 잡아놓고 놀자고 하자, 창식이는 그러지 말고 자기네 집에 가서 자자고 하였다. 은애는 갑작스럽게 창식이의 부모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무섭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여 거듭 싫다고 하였으나, 창식이가 부모님한테 여자친구를 소개하고 싶다며 끈질기게 졸라대자 결국 이기지 못하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다녀왔습니다.”
창식이의 부모님은 거실 쇼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어, 창식이 왔냐.”
“많이 늦었다. 친구들하고 놀다 왔니?”
부모님은 창식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현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엄마, 아버지. 소개 할게요. 여기는 내 여자친구 은애. 은애야 인사 드려. 엄마, 아빠셔.”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 뵈서 죄송합니다.”
은애가 두 손을 가슴과 배에 얹고 90도로 허리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였다. 은애의 얼굴은 술기운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빨간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뜬금 없는 아들의 여자친구의 인사를 받은 창식이의 부모님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창식이와 은애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