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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86
학창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에로비디오를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포르노를 보는 것은 처음인 은애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문화적 충격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포르노에 나오는 늘씬한 여자들은 남자의 온몸 구석구석을 물고 빨고 핥으며 애무해 주었고,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소리로 끊임없이 남자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시각, 청각, 촉각 등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끊임없이 자극을 받은 남자들은 팔뚝만 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여자의 입과 질, 항문을 가리지 않고 삽입하였고, 절정이 다가오자 여자의 얼굴, 가슴, 배, 질 할 것 없이 온 몸 구석구석에 사정을 하였다. 난생 처음 겪는 신세계에 넋을 놓고 바라보던 은애는 정신을 차리고 그 중 현실적이고 자기가 따라할 수 있을 만한 포르노들을 새로 만든 찌르레기 폴더에 차곡차곡 저장하기 시작하였다.
“하아, 이건 너무 심하다. 이건 못 하겠다.”
“음, 이건 여자 몸매가 나랑 좀 비슷하네. 이렇게 하면 우리 자기가 좋아할려나. 이건 일단 킵해야겠다.”
마트에서 쇼핑하듯 야동을 차곡차곡 폴더에 저장하다 보니 어느새 스무 편 가까운 야동이 찌르레기 폴더에 쌓여있었다.
“휴,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부터 하나씩 보면서 연구 좀 해야겠다.”
그녀 나름대로 사건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찾은 은애는 그날 밤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창식이는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낯이 익은 여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그냥 모른척 지나칠까, 아니면 길을 돌아갈까 고민하였으나 그러기엔 이미 너무 가까이 마주 서 있었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서 있는 그녀를 외면하며 지나치기도 상황이 좀 애매하였다.
“오랜만이다. 진영아.”
그녀는 몇 개월 전 헤어진 여자친구 진영이었다.
“응, 오랜만이야 창식아.”
가까운 곳에 사는 두 사람이 언제고 한 번은 마주칠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마주치고 나니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난감한 창식이었다. 우선 서로에게 인사는 하였지만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의 어깨를 내리 눌렀고, 잠시 동안 시선을 회피하며 어색하게 마주 서 있던 두 사람은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으나 그마저도 서로의 말이 겹쳐서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잘 지내니?”
창식이 진영에게 물었다.
“나야 뭐 똑같지. 너는? 멀리서 보니까 표정이 좋아보이더라.”
“그랬어? 난 잘 모르겠는데.”
진영이 창식이를 보며 웃었다. 창식이가 사랑했던 진영이의 미소가 오늘처럼 쓸쓸하고 짠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진영이에게 창식이도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행이다. 좋아 보여서.”
진영이의 말을 들은 창식이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웃었다.
“안 좋아 보인다는 말보다는 다행이네. 너도 좀 여유 있어 보이고 좋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창식이의 말을 들은 진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였다.
“너 그거 나 살쪘다고 놀리는 거지? 오랜만에 얼굴 본 친구한테 하는 소리하곤. 칫.”
“아냐, 그런 거 아냐.”
창식이는 진영이의 핀잔에 아니라고 대답하였지만, 실제로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체중이 좀 늘은 것 같았다. 살이 좀 찌긴 했지만 창식이의 눈에 여전히 진영이는 예뻐 보였고,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몸과 얼굴 표정에서 ‘내가 없어도 진영이는 잘 지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 창식이는 그녀의 모습에 짙게 드리워진 그 남자의 모습을 새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남남이 되어 버린 둘의 사이에 창식이는 다시 한 번 마음이 아파옴을 느꼈다.
“어디 가는 길이니?”
창식의 물음에 진영이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나가던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너는?”
“나? 나는 과외알바 끝나고 집으로 가던 길이야.”
서로의 안부와 행선지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얘깃거리가 떨어지자 또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찬찬히 창식이의 표정을 살피던 진영이가 물었다.
“여자친구 생겼다며?”
창식이는 갑작스런 은애 얘기에 당황하였다. 주변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근황을 들은 모양이었다.
“응, 얼마 전에.”
“예쁘니?”
“소시 윤아 닮았어.”
“하핫, 웃긴다 정말.”
창식이의 뜬금 없는 윤아 드립에 진영이는 큰 웃음을 터뜨렸고, 진영이의 웃음이 그칠 때 쯤 창식이는 궁금했던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지금도 같이 사니? 그 남자랑?”
창식이의 질문을 받은 진영이는 말 없이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너한테 잘해 주고 있는 거지? 그 남자.”
“응.”
창식이는 진영이와 헤어질 때 했던 말들에 대해 사과를 하였다.
“그 때 미안했어. 내가 너무 흥분했었거든. 진심 아니었으니까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
창식이의 말을 들은 진영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냐, 내가 너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어딨니. 다 내 잘못인걸. 다 이해하니까 미안해 하지마. 정말이야.”
창식이는 가슴 속에 내내 담고 있었던 그 때 일에 대한 미안함을 진영이에게 전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다행이다.”
다시 침묵에 휩싸인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가자고 말하였다.
“진영아, 너 약속 있다며? 늦겠다. 어서 가 봐.”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너도 얼른 집에 가 봐. 피곤하겠다.”
“그래, 잘가.”
“너도, 안녕.”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등을 돌린 채 각자 가던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헤어지며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창식이는 걸어가다 미련이라도 남은 듯이 자리에 멈춰 서서 잠시 떠나가는 진영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창식이쪽을 향해 길게 드리워진 진영이의 그림자가 창식이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며칠 후, 창식이는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였다.
“야 이 새꺄, 누가 보면 죽은 줄 알겠다. 전화 좀 하고 살자 응?”
“궁금한 놈이 전화하면 되지 새꺄. 잘 지냈지?”
“나야 뭐 그렇지. 너는?”
“그냥 뭐 알바하고 지내고 있지. 아 참, 너 진영이 얘기 들었냐?”
“진영이 얘기 뭐?”
오랜만에 전화하는 친구에게서 진영이의 얘기가 나오자 창식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너 진영이랑 헤어진 지 좀 됐지?”
“몇 달 됐지. 4월 달에 헤어졌으니까.”
“그래? 야, 너 진영이랑 그거 했지?”
“그거는 뭐 그거야 뜬금없이.”
“그거 있잖아 새꺄, 섹스!”
“야, 너는 오랜만에 전화해서 헛소리 하기냐? 그럴거면 전화 끊고 잠이나 자 이놈아.”
“안 했어? 흠, 그럼 다행이네.”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너 얘기 못 들었냐? 진영이 임신했대. 걔네 집 완전 난리도 아니라더라. 걔네 아버지는 진영이 임신시킨 놈 잡아죽인다고 하고 걔네 엄마는 지방에 있는 걔 짐 다 싸서 올라오셨대.”
친구의 말을 들은 창식이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김창식!”
창식이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어, 미안. 잠깐 떨어뜨렸어. 계속 말해 봐.”
“야, 그런데 진짜 웃긴 게 기숙사에서 사는 줄 알았던 진영이가 남자랑 동거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처음에 짐 찾으러 기숙사에 엄마가 갔었는데 진영이 기숙사에서 나갔다고 해서 학교 친구한테 물어서 진영이 사는데 찾아가 보니까 글쎄 남자랑 같이 살고 있었더라는 말이지.”
창식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 하고 친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근데 진짜 웃긴다. 진영이 걔 고등학교 때 니가 한 번만 하자고 그렇게 졸라도 안 주던 애가 순진한 줄 알았드만 뒤에서 콩깍지 깐 거야 그치?”
창식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물었다.
“그, 그래서? 진영이는 지금 어떻게 됐대?”
“어떻게 되긴. 어제 중절 수술 받았다던데 지금쯤이면 병원에 누워 있겠지 아마. 내가 그 얘기 듣고 혹시 니가 저질러놓은 거 아닌가 싶어서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말하는 거 보니까 애 아빠가 너는 아닌가 보네. 진짜 다행이다 야.”
“저기 승구야.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전화 끊자.”
“야 여태 전화 하다 말고 갑자기 무슨 일인데?”
“응 미안, 그럴 일이 있어. 나 끊는다.”
“야, 김창식! 김창식!”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핸드폰을 끈 창식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금새 옆의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떨리는 가슴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창식이는 진영이와 처음 관계를 가졌던 그날과 진영이와 헤어지던 날, 그리고 며칠 전 본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황을 짜맞추고 진실이 무엇인지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창식이의 머릿 속에 떠오른 장면 장면들은 의미 없이 빠르게 흘러갔고, 창식이의 머릿 속은 더욱 더 복잡해져만 갔다. 창식이는 꿈도 꾸지 못 했던 진영이의 임신과 낙태 소식에 덜컥 겁이 났고, 또 진영이가 걱정이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창식이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승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야 김창식. 이 새끼는 지 맘대로 갑자기 전화 끊어놓고는 금새 또 전화질이네? 왜 임마.”
“승구야, 미안한데 진영이 지금 어디 병원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진영이 친한 친구들은 알 거 아냐. 부탁 좀 하자.”
전화를 거는 창식이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