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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87
창식이의 부탁을 받은 승구는 진영이의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진영이가 입원해 있는 곳을 창식이에게 알려주었고, 창식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피씨를 켜고 검색해 보니 집에서 30분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모 산부인과 병원이었는데, 근처에 산부인과가 있음에도 제법 먼 거리로 간 것은 동네에 소문이 날 것을 우려한 진영이 부모님의 궁여지책으로 보였다. 창식이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진영이에게 가려고 하였으나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내 아이일까. 그 때 콘돔 안 꼈었는데, 분명히 진영이가 안전한 날이라고 말했는데. 혹시 내 아이인 건 아닐까. 정말 내 아이면 어쩌지?“
창식이는 무서웠다. 자기가 진영이가 임신한 아이의 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또 자신의 아일지도 모르는 한 생명이 수술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창식이를 더 없는 두려움에 몰아넣고 있었다. 처음에는 힘든 일을 겪었을 진영이가 걱정이 되어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려고 하였지만, 점차 현실적인 부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진영이를 찾아 가기가 망설여지는 창식이었다.
‘아냐, 아닐 거야. 만약에 내 아이였으면 며칠 전 만났을 때 진영이가 말을 했겠지. 그 남자랑 동거까지 했는데, 분명히 그 남자랑 수십 번도 더 섹스를 했을 텐데, 설마 딱 한 번 같이 잔 내 아이겠어? 그래, 그 남자 아이야 분명히. 그런데 진영이한테 찾아가도 괜찮은 걸까. 혹시라도 괜히 찾아가서 오해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창식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과 행여 오해를 살까봐 진영이의 병문안도 망설이고 있는 자신의 치졸함이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울다보니 어느 새 시간이 흘러 병원에 찾아가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 되고 말았다. 어제 수술을 했다고 하니 내일, 껏해야 낼모레면 진영이는 퇴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진영이에게서 진실이 무엇인지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창식이를 괴롭혔다.
‘그래, 가자. 가는 거야. 일단 가서 물어보는 거야. 다음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하자.’
어려운 결심을 한 창식이는 눈물을 닦고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나 머릿속이 복잡한 창식이는 한 숨도 못 잔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하였다. 여느 때처럼 마트 알바를 끝낸 창식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진영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하였다. 창식이는 가는 내내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하였다.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하지, 위로를 먼저 할까? 몸은 좀 괜찮아? 이렇게? 직접적으로 누구 애냐고 물어볼까. 내 애야 그 놈 애야? 아 맞다, 진영이 부모님이 계시면 어떡하지? 그냥 나와야 되는 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아, 계시면 안 되는데 .’
진영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 앞에 도착한 창식이는 들어갈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간신히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창식이는 간호사에게 진영이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물었다. 그리고 혹시 보호자가 함께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진영이가 입원해 있는 병실은 203호실이며, 어머니가 좀 전까지 계시다가 나가셨다고 간호사는 말하였다. 창식이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진영이가 누워 있는 203호실 앞에 다다른 창식이는 조용히 문을 노크하였다.
“네, 들어오세요.”
문 너머로 진영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창식이는 조심히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초췌한 표정의 진영이가 누워 있었다. 예상치 못한 창식이의 방문에 진영이는 조금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창식이, 니가 어쩐 일이야?”
놀라는 표정과는 달리 온 몸에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진영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느껴졌다.
“응? 어, 너 얘기 듣고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몸은 좀 어떠니?”
“나? 안 좋지 당연히.”
진영이가 힘겹게 웃어보였다. 창식이는 침대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너는 누구한테 얘기 들었니? 하여간 소문 참 빠르다. 숙영이한테만 얘기했는데 이 기지배가 친구들한테 다 소문 냈나봐. 나가면 혼 좀 내줘야겠다. 후훗.”
창식이는 막상 진영이의 얼굴을 보자 뭐라 해야할지 떠오르지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애써 웃고는 있지만 아이를 지웠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진영이의 마음이 그녀의 얼굴과 말투에서 고스란히 느껴졌고, 그 원인이 누가 되었든 창식이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그녀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진영이는 그런 창식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에 쥬스가 있으니 꺼내 마시라며 웃었다.
“진영아, 저기.”
“누구 애냐고?”
창식이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꺼낸 말을 진영이는 덤덤하게 말하였다.
“그게 걱정 돼서 온 거야?”
창식이는 고개를 들어 진영이를 쳐다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영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창식이는 진영이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런 창식이에게 진영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니 애 아냐. 그러니까 걱정 마.”
진영이의 말에 창식이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게 과연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일까. 다행이라고 박수라도 쳐야 하는 상황이냔 말이다.’
진영이가 낙태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자 창식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자신이 몇 년 동안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진영이의 몸 속에서 다른 남자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좌절감 같은 복잡한 심경들이 창식이의 마음 속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지만, 창식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무엇 하나 깨끗하게 정리가 된 것이 없었던 것이다.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창식이에게 진영이가 말하였다.
“좀 있으면 엄마 오실거야. 니 애 아니라고 말은 했는데, 괜히 마주쳐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가는 게 좋겠다.”
“응, 그래. 가야지. 음 그래, 가야지.”
창식이는 고개를 떨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는 내내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창식이는 단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진영이의 말을 듣는 것 밖에는.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창식이에게 진영이가 물었다.
“창식아.”
“응, 말해.”
“너, 그 것 때문에 온 거야? 누구 애인지 물어 보려고?”
진영이의 질문에 창식이는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창식이 본인도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지만, 막상 진영이의 말을 듣고 난 후 느껴지는 이 허탈감과 실망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창식이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나 갈게.”
창식이는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와 집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정신이 멍한 창식이는 지금 자기가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 순간,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고, 창식이는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건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였다. 은애였다. 창식이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은애야.”
“창식아 뭐 해?”
“어, 그냥 좀 걷고 있어.”
“혼자 있어?”
“응.”
“본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보고 싶다 헤헤. 지금 니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치 창식아.”
“흐흑, 흐흐흑”
은애의 말을 들은 창식이는 결국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맺혀 있던 감정의 잔해들을 울음으로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여보세요? 창식아, 왜 그래 응? 창식아.”
“은애야, 흐흐흑.”
난데없는 창식이의 울음소리에 놀란 은애가 창식이의 이름을 거듭 불러보았으나, 창식이는 이따금 은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할 뿐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울음이 진영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은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창식이는 터져 나오는 슬픔을 은애에게 모두 토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