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91 / 0093 (91/93)

0091 / 0093 ----------------------------------------------

[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91

영숙이의 아버지 이 회장은 몸이 피곤하다며 오후에 예정 되어 있던 골프라운딩을 취소하고 자택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른 저녁 시간, 예정보다 일찍 재벌가 사모님들의 모임에서 돌아온 이 회장의 본처 강 여사는 무슨 일 때문인지 화가 머리끝까지 잔뜩 나 있었다. 

“일찍 왔군.”

거실에 앉아 신문을 보던 이 회장은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보, 당신.”

이 회장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변의 눈을 의식한 강 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모두에게 잠시 집밖으로 나가있으라고 지시하였고, 강 여사의 지시에 거실에 있던 차 집사, 오 여사와 그 외 스탭들이 밖으로 나가자 강 여사는 이 회장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도대체 바깥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죠?”

격앙된 강 여사의 목소리를 들은 이 회장은 그제서야 신문을 내려놓고 강 여사를 쳐다봤다. 

“짓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요?”

강 여사의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회장의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은 차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강 여사는 평소 이 회장과 얘기할 때마다 벽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을 느꼈었고, 그러한 이 회장의 태도가 강 여사의 기분을 더욱 더 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 바깥에서 오입질 하고 다니는 거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도 소문은 나게 하지 말았어야죠. 당신 내가 바깥에서 어떤 수모를 당하고 왔는지 알긴 알아요?”

강 여사의 말에 이 회장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하게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내가 모임에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여편네들이 당신의 그 오입질에 대해서 입방아를 찧었답디다. 오입질해서 낳은 딸 집 안에 들여놓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딸 뻘 되는 계집하고 그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그러면서 삼정그룹 마나님은 성격도 좋지, 바람난 남편 씨앗 거둬 키우더니 이제는 첩까지 얼굴 맞대고 살게 생겼다고 말예요. 내가, 내가 당신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해야만 해요? 말 좀 해봐요. 네? 말 좀 해 보라구요.”

강 여사의 악다구니에 잠자코 있던 이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여간 여편네들 모여서 하는 거라고 남 뒷담화 뿐이지. 그런 모임에 갈 것 없어. 앞으로 가지 마.”

이 회장의 냉정한 말투에 강 여사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이봐요 이정수 씨, 당신만 사회생활이 있는 게 아니라 나도 내 사회생활이 있어요. 이제 와서 당신한테 가정에 충실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냐. 그냥 제발 소문만 안 나게, 다른 여편네들 앞에서 망신만 안 당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데 당신은 그 따위로밖에 말 못해? 내 얼굴 똑바로 보고 말해 봐요.”

이 회장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 여사를 쳐다봤다. 그런 이 회장을 바라보는 강 여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회한이 한데 뒤섞여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 다른 여자 배에서 낳은 새끼를 자식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내 심정은 생각해주지도 않고 흑흑. 당신,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흐흐흑.”

강 여사는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을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가만히 쇼파에 앉아 강 여사의 말을 듣고 있던 이 회장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려다 뭔가 꼭 할 말이 생각 난 듯 다시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고, 강 여사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후, 비틀거리며 쇼파에 마주 앉았다. 강 여사를 쳐다보는 이 회장의 표정에서는 좀 전의 불쾌했던 감정은 온데간데 없었고, 한없이 차갑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음험한 미소만이 입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회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영숙이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영숙이를 받아들인 건 아이 하나 낳지 못하던 당신이 삼정 그룹의 안주인으로 남아 있기 위한 고육지책 아니었나? 어디까지나 당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었나 말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지?”

“당신, 우리가 20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산 부부가 맞긴 한가요? 정말 당신은 나란 여자한테, 당신의 아내한테 그렇게 잔인한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건가요?”

이 회장의 말에 잠시 흥분을 가라앉혔던 강 여사는 다시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표정, 말투, 목소리 어느 곳에서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에 대해 강 여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껴야만 했다. 

“당신이 날이면 날마다 술에 취해 다른 여자의 화장품 냄새를 풀풀 풍기며 침대에 오르는 걸 어느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 하고 살아온 세월이 자그마치 23년이에요. 23년. 당신은 양심이란 게 없나요? 정말 당신은 최소한의, 정말 최소한의 사람으로서의 양심이란 게 없는 건가요?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최소한의 자존심만은 지킬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도 들어줄 수 없는 거냔 말이에요. 네? 그래요. 당신 부인으로서, 이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나는 영숙이를 받아들여야만 했죠. 당신이 조금만 내게 힘이 되주었다면, 조금만이라도 당신의 아내로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다면, 나는 그런 다시 없을 잔인한 선택을 강요받지도 선택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런데 내 선택이 아니었냐고 말하는 당신, 당신은 정말 최악이야!”

이 회장은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를 한 모금 깊에 빨아들인 이 회장은 담배연기를 강 여사 쪽으로 뿜어댔다. 그의 차갑고 뻔뻔스러운 표정에 강 여사는 저절로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마치 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바쳐온 여자인 양 얘기하는군. 후훗. 당신도 참 어처구니가 없는 여자야.”

“무슨 뜻이죠?”

강 여사가 이 회장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정말 몰라서 묻나?”

이 회장의 질문에 강 여사는 입을 다물고 이 회장을 노려보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영숙이에게 하도 쌀쌀 맞게 굴길래 영미에게 그룹의 일정지분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엄마 노릇 똑똑히 하라고 내가 말을 했었지. 친딸한테 그룹을 물려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며 당신은 격하게 반발했었지만, 결국엔 내 말을 따르기로 했고 말야. 그런데 말야. 자기 친딸도 아닌 애새끼한테 그룹의 일부를 넘겨주겠다고 말한 내 말이 엄청난 배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정말 단 한 번도 없는 건가?”

이 회장의 말에 강 여사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강 여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더듬거리며 이 회장에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 영미가 왜 당신...”

“입 닥치고 마저 들어 이 암캐년아.”

이 회장의 얼굴이 일순 분노로 일그러져갔다. 이 회장이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강 여사였지만, 지금 보는 이 회장의 표정은 그녀로서도 난생 처음 마주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생날것의 잔인한 얼굴 그 자체였다. 이 회장은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비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에게도 말 한 적이 없었지.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첩의 자식 주제에 이 삼정 그룹을 손에 움켜쥐기 위해서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야 했고, 아무런 결점도 있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첩의 자식은 그룹의 후계자로서 절대로 인정 받을 수 없을 테니 그 긴 세월을 입을 닫고 살아야만 했지. 그래, 그래야만 했어. 그런데 당신은 뻔뻔스럽게도 영미를 낳고는 내 아이라며 나에게 안아보라고 했지. 순간 나는 영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분만실에 있는 매스로 니 입을 찢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지. 어차피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았고 너 역시도 날 사랑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어차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 그 위에 물감 하나 덧칠한다고 해서 나쁠 게 뭐냐며 구역질나는 니년의 기만과 위선을 참고 또 참아줬단 말이다.”

“여보, 잠깐 내 말 좀...”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나야 말로 부탁하지. 당신이 어떤 놈에게 그 더러운 가랑이를 벌리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냐. 내 눈에 안 띄게 해. 내 귀에 안 들리게 하라구. 부탁이 경고가 될 때 쯤이면 당신 딸 영미에게 돌아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거야. 그리고 경고가 포기가 돼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그 때는 내 약속하지. 너희 두 모녀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고.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시는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도 말고, 영숙이에 대한 얘기 입 밖에도 꺼내지 마. 그냥 정숙한 아내인 척, 다정한 엄마인 척, 니 역할에 충실하라구. 알아들었나?”

겁에 잔뜩 질린 강 여사는 이 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짐승의 분노로 가득차 있던 이 회장의 표정은 강 여사가 자신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판단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회장님이자 남편으로서의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보아하니 당신 급하게 돌아오느라 식사도 안 한 것 같구려. 저녁 먹고 좀 쉬지, 피곤할텐데.”

이 회장은 말을 마치고 천천히 서재로 들어갔고, 강 여사는 마치 악마라도 본 듯한 사람처럼 한참을 자리에 앉아 두려움에 떨어야만 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