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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하숙집에서 생긴일-93
시간은 흘러흘러 한 여름 무더위의 절정도 그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다사다난 버라이어티 했던 여름방학을 마친 하숙집 식구들은 새 학기를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뿐인 남자 식구인 창식이까지 복귀하여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창식이 너는 어째 방학 동안 코빼기 한 번 안 비치냐?
세란이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고 눈을 흘기며 창식이를 쳐다봤다.
“누나, 말도 마세요. 여름방학 내내 알바만 했어요. 낮에는 마트에서 일했지, 저녁에는 중딩들 과외알바 했지, 완전 노예 12년이 따로 없었다니까.”
“야 그런다고 잠깐 올라올 시간도 없냐? 이게 여자친구만 챙기고 누나들은 챙길 생각을 안 하네요.”
민정이도 창식이의 무심함에 한마디 하였다. 창식이도 자기가 조금 무심하긴 했다는 생각에 웃으며 사과하였다.
“미안 미안,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 앉아서 밥을 먹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하여간 너는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능글능글해 지니? 참.”
민정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창식이를 바라봤다.
“그런데 누나는 뭔가 느낌이 참 많이 다르네? 연애해요? 얼굴이 많이 좋아진 거 같다. 안 그래요?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건가.”
창식이의 말에 괜히 민망해진 민정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홀짝거렸다. 확실히 긴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민정이의 얼굴은 전에 비해 활기차고 많이 밝아져 있었다. 창식이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텐프로의 생활을 시작했던 민정이의 지금 표정이 창식이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은애는 내일 아침에 올라온다던데 니들 수강신청 같이 할 거지?”
영숙이가 내일 있을 수강신청에 대해 창식이에게 물었다.
“그래야지, 너도 같이 할래?”
“그래, 교양 몇 학점 같이 듣자.”
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세란이 서운한 척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였다.
“아쭈, 요것들 봐라 요것들. 1학기 때는 수강신청 같이 하자고 그렇게 졸라대더니 이번엔 고런 얘기가 아주 쏙 들어갔네. 이제 대가리가 좀 굵었다 이거지?”
세란이의 말을 들은 영숙이가 세란이에게 찰싹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에이, 울 언니 왜 또 그러실까. 언니 한참 바쁠 때니까 그렇죠 히힛. 요거 먹어봐요. 열무김치가 너무 맛있네. 아줌마, 열무김치가 참 맛있네요 호호호.”
창식이는 영애에게 아버지가 2학기 내내 지낼 하숙비를 보냈다고 했으니 확인해 보라고 말하였다.
“응, 안 그래도 전화로 말씀하시더라. 창식이가 아버님께 다시 한 번 아줌마가 고맙다고 하더라고 말씀 전해줘.”
“네. 그런데 아줌마 민용이 형 방은 일부러 계속 비워놓으시는 거에요? 2학기 시작할 때도 다 됐는데 사람이 안 올 리가 없는데.”
창식이의 물음에 영애는 말없이 웃으며 밥알을 입에 넣었다. 세란이 창식이에게 얼굴 표정으로 그만 물어보라는 신호를 보내자, 영문을 모르는 창식이는 “왜? 왜?” 라는 입모양으로 이유를 물어보았다. 두 사람이 눈치 게임을 하는 사이 민정이 세란에게 광남과는 어떻게 돼가냐며 물었다.
“언니는 그 후로 어떻게 된 거야? 어째 영 소식이 없다?”
“응? 그냥 뭐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거지 뭐.”
세란이의 시크한 대답에 영숙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언니, 설마 시작도 제대로 못 해보고 깨진 건 아니죠?”
창식이는 처음 듣는 남자의 이름에 광남이 누구냐고 물었고, 영숙이가 그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응? 내가 얘기 안 했었나? 광남이 오빠라고 우리 부산 놀러갔을 때 세란이 언니하고 썸 탄 남자 있어.”
“뭐? 나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는데? 우와, 누나 연애해요? 추카추카. 드디어 모태솔로를 탈출하시는군요. 맨날 야한 얘기하면서 욕망을 푸시더니 참 다행이네요 하하하.”
“이게 순진한 누나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요? 그리고 누가 모태 솔로야 이 놈아.”
세란이 숟가락을 들어 창식이를 때리는 시늉을 하자, 창식이는 국을 더 먹어야겠다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레인지 쪽으로 피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진짜 그 때 그 오빠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기도 싫다.”
민정이가 위험했던 그 때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자 영애가 세란이에게 물었다.
“어머, 나도 얘기 들었는데 세상에나 세상에나 어떻게 그런 몹쓸 놈들이 다 있다니? 그 놈들 경찰에 신고는 했니?”
영애의 물음에 세란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그 오빠한테 줘터지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는데요 뭐. 그냥 우리끼리 액땜한 걸로 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 참 장난 아니다. 너희들한테 몹쓸 짓 하려고 했던 놈들이 한 두명이 아니었다면서? 어떻게 혼자서 그 많은 놈들을 다 때려눕혔다니? 세란아, 뭐 하는 사람이래?”
“그냥 부산에서 작은 무역회사 다닌대요. 저도 자세하게는 안 물어봤어요.”
“그렇구나. 그럼 너하고 그 남자하고 잘 되가는거야?”
영애가 묻자 민정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대답하였다.
“아주 둘이 좋아서 죽었죠 처음엔. 그런데 요새 영 소식이 뜸하네요. 역시 장거리 연애의 한계란 말인가.”
민정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세란이 웃으며 말하였다.
“호호호 얘 표정이 왜 이래? 다들 남의 연애사에 신경들 끄시고 식사들 하세요? 저 먼저 일어납니다.”
밥을 다 먹은 세란이는 더 앉아 있다간 자신이 저녁밥상의 반찬거리가 될 것 같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운 세란이는 광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뭐 해?”
“응, 일하는 중이지.”
“하숙집 사람들이 오빠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데 난감해 죽는 줄 알았어.”
“하하하, 난감하긴 뭐가 난감해. 그냥 있는데로 얘기하면 되지.”
“오빠, 내가 남의 연애사 얘기 하는 건 좋아라 하는데, 또 내 얘기하는 건 무지 쑥스러워 하거든.”
“하하하 너도 참.”
“오빠, 그런데 서울엔 언제 올라 와?”
“음, 아마 담주 초에 2박3일 예정으로 출장 갈 것 같아.”
“그래? 잘 됐다. 그럼 우리 그 때 보겠네.”
“그래야지. 내가 학교로 갈게.”
“아냐. 밖에서 만나.”
“왜? 간 김에 세란이 친구들한테도 눈도장 좀 찍으려고 했는데.”
“친구들 막 물어보고 내 얘기 하고 그러는거 챙피하단 말야. 나중에 응? 알았지?”
세란이의 의외의 모습에 광남이 큰 소리로 웃었다. 세란이는 평소 털털한 성격이지만, 자기 얘기, 특히 연애사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쑥스러워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하하, 하여간 우리 세란이는 참 알다가도 모를 아이야. 알았어 알았어.”
“오빠 땡큐. 이해해 줘서 고마워 히히.”
세란이 광남과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사이, 식사를 마친 창식이도 은애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은애야, 내일 아침 일찍 오는 거지?”
“응, 너는 하숙집이야?”
“엉, 짐 싸서 올라왔어. 넌 2학기 때도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거지?”
“응, 맞다. 너네 집에 방 하나 빈다며? 나 그냥 엄마한테 말해서 하숙한다고 할까? 우리 매일 아침 저녁밥 같이 먹고 TV도 같이 보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웅, 생각만 해도 너무 신난다 그치? 진짜 그러면 신혼부부 같고 얼마나 좋을까?”
은애의 말을 들은 창식이는 상상만으로도 마치 신혼생활을 시작한 것 마냥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민정이와 영숙이에게 대충 자초지종을 들은 터라 신혼의 단꿈은 기약 없이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참 좋을텐데, 하숙집 아줌마가 당분간은 하숙집에 새 식구 들일 생각이 없으신가 봐.”
“왜? 방 비었으면 주인 입장에선 빨리 사람 들이는게 좋은 거 아닌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뭔가 사연이 있나봐. 나중에 기회 봐서 물어봐야지 뭐.”
“아웅, 아깝다. 하숙집에 같이 있으면 밤에 몰래 우리 자기 방에 놀러가고 할텐데.”
창식이는 은애의 애교에 저절로 므흣한 미소가 입가에 번져갔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요새 은애의 스킨십이나 멘트가 날이 갈수록 적극적이고 대담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자기, 요새 말하는 거며 행동하는 거며 너무 대담한 거 아냐? 첨에 봤던 우리 수줍 은애는 어디로 간거죠?”
“왜? 자기는 내가 이러는 거 싫어? 남자들은 그런다며.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요부가 좋다고. 우리 오빠야는 안 그래요?”
“아냐 아냐, 나야 고맙지 큭큭.”
“그러면서 뭘.”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시간이 늦어 내일의 만남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창식이는 머릿속에 은애를 떠올리며 헤벌레한 표정을 지었다가 흘끔 자신의 아랫도리를 쳐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아아,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