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폐허가 된 천화장
밤에 잠시 눈을 붙이며 이틀을 달려온 호천웅.
그는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앞으로 길어야 한시진.
점점 눈에 익은 풍경을 보며 천화장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 것이었으니...
여기저기 흩어진 건물의 잔해.
부러진 나무사이로 새로이 자라나는 조그만 나무들.
호천웅은 폐허로 변한 천화장의 터를 내려다보며 제자리에 주져앉았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한 순간 복받쳐오르는 눈물이란...
마치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천화장의 참상,
무영림에 도착하기까지 험난한 이모와의 여정,
그리고,
자신을 살리기위해 몸까지버린 이모 염향림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힘이 없어 피눈물만을 흘리수
밖에 없었던 상황까지...
호천웅의 머리속에서는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두서없이 스쳐가며 참고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
시커먼 천공을 뚫고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별빛이 어두운 대지에 내리꽂혔다.
눈물로 말랐던가?
퉁퉁부운 눈을 비비며 호천웅은 품속에서 한웅큼의 지폐를 꺼내 태웠다.
"아버지! 어머니! 멸문의 복수는 제가 꼭 이룰테니 저승에서라도 행복하세요..."
비장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폐허가 된 천화장을 향해 절을 한 호천웅은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무영림을 떠나 무작정 달려온 천화장.
하지만,
막상 천화장에 도착해 복수를 맹세했지만 어디에서 단서를 잡아야될지 너무나 막연했으니...
이모 영향림의 생사가 불문명한 상태에서 광활한 무림에 오직 자신뿐이지 않은가?
거기에 자신의 생은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호천웅이었기에...
뾰족한 방법을 찾지못해 머리를 굴리다 어느덧 호천웅은 잠에 골아떨어졌다.
샤륵샤륵~~~
잠에 빠져있던 호천웅이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미미하게 들리는 발자국소리.
범인이라면 도저히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이제 초극고수의 반열에 오른 호천웅에게 그것은
천둥소리보다 컸던 것이었으니...
호천웅은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안광을 집중시켰다.
동녘이 뿌였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에 잡초무성한 천화장을 찾아올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호기심과 경개심에 잔뜩 긴장된 호천웅의 시야에 한명의 인영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전신이 눈처럼 하얀 여인.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윤기를 머금은 흰색이요,
헐렁하게 몸에 걸친 장삼도 화얀 소복,
금방이라도 묻어날듯 매끈한 피부도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나이를 추측하기 힘든 너무나
아름다운 중년미부.
호천웅은 여인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보일 정도가 되었을때 마치 뒤통부를 얻어맞은것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초생달처럼 멋지게 곡선을 그린 하얀 눈썹,
혜지로 가득 넘치는 눈,
오똑하게 뻗어내린 코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은 입술.
중년미부는 호천웅이 여태까지 보아왔던 여인들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만큼 아름다을뿐만
아니라 고고함과 자애로운 기운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호천웅을 충격속에 밀어넣은 것은 여인의 미모와 기도가 아니었으니...
어디선가 본거같은 느낌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끌어당기는 형언할수 없는 기분이란...
호천웅은 여인을 본후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흥분을 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호천웅을 향해 다가오던 중년미부로 한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호천웅을 발견한듯 눈에서 한줄기 이채의 빛이 흘어나오는 듯 하더니 그 자리에서
불상처럼 얼어붙었다.
세상이 멸망되더라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것같던 심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폐허가 된 천화장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상대방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소, 소협! 당신은 누구길래...???"
"아, 아주머..니...는 누구십니까...????"
마치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후 호천웅과 중년미부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말을 멈추고 침묵했다.
상대방에게 질문한 것이 똑같았으니...
옛날의 영화를 조금이라도 느끼게 만드는 커다란 대리석이 깔린 연무장.
중년미부와 마주한체 자리에 앉아 있는 호천웅.
한데,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알수없는 설레임은 좀처럼 스그러들지 않았다.
보고 다시보아도 난생 처음보는 중년미부인데 자꾸만 끌리고 있었으니...
호천웅은 더이상 침묵을 견디고 못하고 말을 뱉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아닙니다. 소협! 내가 아는 사람과 무척 닮아... 무레를 범한것 같군요..."
중년미부는 실수를 사과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고 포권을 취했다.
순간,
호천웅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은은한 홍조가 어린 미부의 얼굴.
그것은 마치 대지의 여신이 새벽빛을 받으며 앉아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으니...
잠시 멍한 상태로 중년미부를 쳐다보던 호천웅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새빨개진체
마주 포권을 취했다.
"호호~~ 이 늙은이의 얼굴이 몹시 추하지요!!!"
"천, 천만에요.... 아주머니는 제가 보아왔던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습니다..."
"호호호... 소협의 말은 너무 과찬이군요... 그냥 흘려듣겠어요..."
중년미부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은은히 번지는 홍조는 결코 싫은 기색이 아니었으니...
사실,
미부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마음을 놓고 웃는 것이었다.
가슴속에 맺힌 한이 너무나 커 언제나 웃음을 잊고 살았는데...
어떻게 된일인지,
앞에 앉은 어린 소년에게서 이렇듯 묘한 감정이 일어 행동하는지 자신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소협!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나요?"
"예, 예... 옛날 천화장이 있던..."
호천웅은 중년미부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 말을 멈추었다.
아직 중년미부의 정체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너무나 성급했으니...
만약 적이라면???
중년여인의 몸에서 은은히 풍겨나오는 기도.
그것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너무나 거대한 기운이지 않은가?
비록 겉모습은 너무나 자애롭고 아름답지만 그것으로 적이 아니라고는 장담할수 없었으니...
호천웅은 조심스럽게 태극양의심법을 끌어올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순간,
호천웅을 쳐다보는 중년미부의 눈에 언듯 이채와 감탄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호호~~ 아직 어린나이인데 소협의 화후가 대단하군요..."
"아, 아주머니!!!"
"괜찮아요... 나는 소협에게 적의가 없고 천화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경계를 취하지 않아요 돼요.,,,"
"아, 알았습니다... 한데 천화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건 무슨 뜻입니까?"
"음... 내가 소협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소협이 천화장에 찾아온 이유를 말해줄수 없을까요?"
"......"
중년미부의 질문에 호천웅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호천웅은 결심을 했다.
왠지 중년미부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저, 저의 아버님이 바로 전에 천화장의 장주였던 분입니다."
"뭐, 뭐라구... 아~~~"
호천웅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중년미부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며 상체가 휘청거렸다.
"아, 아주머니!!!"
호천웅은 너무나 돌연한 상황에 급히 중년미부의 상체를 손으로 받쳤다.
도대체 이 중년미부의 정체가 무엇이라 이렇게 충격을 받는단 말인가?
천화장과 무슨 인연이 있길래...
중년미부는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호천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한 눈을 한체로...
"너, 너의 이름이... 천, 천웅이란 말이냐???"
"예! 호천웅이 제 이름입니다... 하, 한데 왜????"
"처, 천웅아!~~~~!!!"
와락~~~
중년미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짖고 있던 호천웅을 갑자기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죽은 아들이 되살아 난것처럼 감격에 복받쳐...
졸지에 중년미부의 뭉클한 젖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호천웅은 잠시 황당했다.
생전 처음보는 중년미부가 자신을 껴안고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토하고 있으니...
하지만,
곧 호천웅의 가슴속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뭉클하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년미부의 통곡에 동화되어서가 아니었다.
막연하나마 중년미부가 자신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느낌때문이었으니...
"아, 아주머니!!!???"
"흐으윽... 이, 이놈아... 내, 내가 너 할머니다!!!"
"뭐, 뭐라구요! 그럼 아주머니 존함이 예, 예설향!!!"
"흑! 그래... 내가 예설향이다. 천웅아!!! 흐흐윽~~~!"
"하, 할머니... 아아앙!!!"
호천웅은 두손으로 할머니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우연한 만남.
처음 본 순간부터 그렇게 가슴이 뛰더니...
바로 자신의 혈육.
그것도 다름아닌 친할머니였단 말인가?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할머니였기 때문에...
할머니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는 호천웅의 머리속에 여태까지 겪어왔던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여태까지 꾹꾹 참아왔던 설움을 한꺼번에 토하며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 펑펑 울었다.
예설향도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손자를 꼭 끌어안고 굵은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