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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54)

28화

제 5 장 어둠의 정보 상인, 흑막(黑幕)

비담은 서희를 떠나보낸 슬픔에 이곳저곳 한 달간 방황을 하며 정처 없이 떠돌다가 낙양성에 도착했다.

하남성에 위치한 낙양은 주(周)나라가 기원전 도읍을 정한 것을 시작으로 9개 왕조가 도읍을 정하였다 하여 구조고도(九朝古都)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비담은 낙양성에 들어서자 정신적 충격으로 허약해진 육체를 달래기 위해 우선 유명한 주점부터 찾아들어갔다. 그리고 아낌없이 돈을 풀어 산해진미를 주문하였다. 뜻밖의 재신이 강림하자 점소이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전망이 좋은 자리로 다시 옮겨주었고, 숙수들은 주방에서 지지고 볶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문한 양이 많고 종류가 다양하여 상이 차려지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나온 음식들은 기다린 보람이 충분할 정도로 냄새도 구수하고 비담의 입맛에 딱 맞았다.

그런데 한참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비담의 맞은편에 웬 거지가 와서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더니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킁킁, 캬! 냄새 죽이네. 소협? 혹시 이걸 혼자 다 먹으려고 시킨 거요?”

“엥? 누구쇼? 누군데 허락도 없이 함부로 앉는 거요?”

“에이, 보아하니 무림인 같은데 야박하게 너무 그러지 마시오. 사해가 동도라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이야기도 하고 음식도 나눠먹읍시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소.”

“하! 내가 무림인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찌 안단 말이오?”

“무림인이 아니었소? 그럼 그냥 적선하는 셈 치면 될 것 아니오. 거지에게 이깟 음식하나 대접하지 못할 정도로 궁해 보이지는 않소만?”

“궁하지 않다고 해서 무작정 적선을 베풀라는 법도 없지요. 그나저나 제법 명성이 있는 식당 같은데 관리가 영 엉망이군요. 거지가 함부로 들어와서 손님의 식사를 방해해도 아무런 제제도 가하지 않으니.”

“관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는 못 하는 것이오. 뭐 무림인이 아니라니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아쇼.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나는 여기 단골거지라 함부로 못 대한다오.”

“하하, 단골거지도 있소? 뭐 아무튼 내가 아직 허락도 안했는데 닭다리를 덥석 집으시네요. 도대체 이건 무슨 경우요?”

“에이, 젊은 사람이 너무 빡빡하게 구는구먼. 경로우대라는 좋은 미풍양속은 국 끓여 자신 거요?”

“하하하, 당신처럼 넉살이 좋은 거지는 정말 처음 보는구려. 알았소. 어차피 남을 음식이니 크게 인심 한 번 쓰리다. 드시고 싶은 데로 마음껏 드시오.”

“역시 처음 볼 때부터 배포가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소. 그럼 사양하지 않고 먹겠소이다.”

거지영감은 걸신이라도 들렸는지 게걸스럽게 남은 음식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음식을 해치우는 속도만 놓고 보았을 때는 천하제일고수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빨랐다.

처음에 이야기를 나누면 좋다는 말은 엿을 바꿔 먹었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포만감을 느꼈는지 한 마디씩 말을 걸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낙양에는 처음인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소?”

“직업이 거지인줄 알았는데 점쟁이까지 겸업을 하는 줄은 미처 몰랐구려. 어찌 아셨소?”

“내가 행색은 남루하고 거지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소식통이라오. 그리고 당신처럼 귀티가 좔좔 흐르는 고객은 항상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 놓는 편인데 아무리 뒤져도 댁 같은 인물은 처음이란 말이지. 그러니 낙양에 처음 온 게 아니고 무엇이겠소.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는 법이라오. 무슨 일로 오신 거요?”

“하하하, 정말 귀신을 속이는 것이 더 빠르겠군요. 사실은 한 가지 알아볼 것이 있어 낙양에 들렀소이다.”

“그게 뭐요?”

“잘 됐군요. 영감이 낙양의 소식통이라고 하니 한 번 물어보겠소. 이것도 맞추는지 어디 봅시다. ‘흑막’이란 단체에 의뢰를 하고 싶은데 통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군요. 혹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시오?”

“물론 알고 있소. 낙양의 소식통이라 자부하는 내가 그깟 흑막에 대한 정보도 모를까봐?”

“정말이요? 정말 영감이 흑막이란 단체를 알고 있소?”

“당연하지. 근데 거기는 의뢰비가 꽤 비싼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의뢰인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부탁하시오. 나 역시 정보를 취급하니까.”

“하지만 행색을 보아하니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소만...”

“클클클, 소협이 불쌍한 거지에게 음식을 적선하였으니 특별히 알려드리리다. 뭐 무림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림에는 개방이라는 거지들의 단체가 있소. 혹시 들어보셨소?”

“에이 나를 뭐로 보고 그러시오. 내가 무림과는 연관이 없어도 천하의 개방을 모르겠소? 당연히 들어보았죠.”

“그럼 얘기가 수월하게 풀리겠군. 내가 바로 개방의 낙양분타를 맡고 있는 취풍개 오삼이오. 이제 정체를 알았으니 내 말을 믿으시겠소?”

“아! 개방의 영웅이셨군요. 그것도 모르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진즉 말씀을 하셨다면 그리 타박을 하지 않고 음식을 드리는 건데 말입니다. 당연히 개방의 정보력이라면 거래할 만하지요. 정말 흑막이란 단체보다 저렴합니까?”

“물론이오. 거기는 워낙에 소수정예로 움직이다보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소. 그에 비하면 우리 개방은 천하에 널린 게 거지 아니오. 그래서 저렴하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오.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말만 하시오. 내 한 시진 안에 공자 앞에 떡하니 내어 놓으리다. 가격은 그때 가서 흥정을 하면 될 것이니 우선 말부터 해보시오.”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신뢰가 가는군요. 그럼 제가 원하는 정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화류선’이라는 부채의 행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누구의 손에 그 부채가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부채의 행방쯤이야 누워서 떡먹기지. 좋소. 내 다녀오리다. 여기서 꼼짝 말고 조금만 기다리시오.”

“알겠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소.”

취풍개 오삼은 남은 음식들을 바리바리 챙겨서 휑하니 주점 밖으로 사라졌다. 비담은 느긋한 마음으로 별난 거지영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한 시진 후.

비담이 차를 마시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을 무렵. 사라졌던 취풍개 오삼이 다시 주점에 나타났다. 어깨가 축 쳐진 것이 아마도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비담은 짐짓 모른 채 자신의 정보를 구해왔는지 물었다.

“오! 역시 개방의 영웅들은 시간을 잘 지키는군요. 정확히 한 시진 만에 이렇게 돌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원하던 정보는 구해오셨습니까?”

“그, 그게...아무리 애를 써도 화류선이란 부채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소. 지급으로 개방의 본타가 있는 개봉에도 전서구를 띄웠지만 모르겠다는 답신만 왔다오. 대관절 그 부채가 무엇이오? 정말 있기는 한 거요?”

“하하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세를 진 어른께서 애타게 찾으셔서 당연히 있는 줄 알았는데. 할 수 없지요. 그래도 애쓰셨습니다.”

“휴우, 미안하오. 곧 찾을 것처럼 큰소리를 뻥뻥 쳐놨는데 면목이 없소이다. 내가 거지생활 50년에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오. 내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는 하지만 음식까지 얻어먹은 마당에 이대로 손을 놓기도 찝찝하고. 흑막에 대한 정보라도 드리리까?”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아니요. 내가 거지이기는 해도 염치는 알고 있다오. 괜히 소협의 시간만 뺏고 음식만 축냈으니 무료로 가르쳐 드리리다. 낙양대로를 따라 쭉 가다보면 ‘취선루’라는 주루가 보일 것이오. 그곳에 들어가면 1층에 큰 도박장이 있을 거요. 어떤 도박을 해도 상관없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시오.”

“그게 무엇입니까?”

“도박을 하면서 돈을 엄청 잃든가, 아니면 엄청 따시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들이 곧 상부에 연통을 넣어 ‘선화’라는 기녀를 데리고 올 것이오. 그럼 공자께서 그녀와 도박을 하면 되는 것이오. 그때 한마디만 건네면 곧 공자가 묵고 있는 숙소로 그쪽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소?”

“조금 복잡하기는 해도 똑똑히 기억해두었습니다. 그럼 ‘선화’라는 기녀에게 어떤 말을 건네면 되오?”

“선화를 만나거든 이대로 말하시오. ‘은은히 비치는 속옷의 색이 검정색인 모양인데 아주 잘 어울립니다.’라고 말하면 알아서 흑막이랑 연결이 될 거요.”

“꼭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

“그게 암어니 어쩔 수가 없소. 대신 속옷을 가지고 놀린 파렴치한으로 몰려 따귀는 한 대 감수해야 할 거요. 아시겠소?”

“휴우,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어쩔 수가 없죠. 아무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미안하오. 부디 흑막에서는 원하는 정보를 얻길 바라겠소. 그럼 바빠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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