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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154)

40화

궁 안에 들어온 궁주는 비담에게 자리를 권하더니 손수 시원한 냉차를 대접하였다.

“공자님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한치한’이라는 말처럼 이곳의 여인들은 모두 냉차를 즐겨 마신답니다. 외부의 환경이 워낙 춥고 매섭다보니 몸은 항상 그에 대항하기 위해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거든요. 그로인해 가끔 냉차로 그러한 기운을 보듬어 주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욕정 또한 다스리는 효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는 동안 공자님께서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금남의 구역이라 밤은 길고도 외로운 법이지요.”

노골적인 궁주의 시선을 회피하며 잔을 건네받은 비담이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아! 시원한 맛이 일품이군요. 재료가 뭡니까?”

“‘한로정빙수’라는 물에 단맛을 내는 감청잎을 띄우면 냉차가 완성됩니다. 장기간 복용하면 약간의 내공증진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한잔 더 드시지요.”

달달한 맛에 반한 비담이 넙죽 한잔을 더 받아 마셨다. ‘한로정빙수’는 열천에서 흘러나온 물이 차가운 대지에 닿으며 생긴 ‘한로정’이라는 우물의 물이었다. 음한지기를 보하는 성질이 있어 이곳의 여인들에겐 꼭 필요한 물이기도 하였고, 각종 암석의 성분까지 녹아 있어 상질의 약수로 평가받는 물이었다. 냉차를 마시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궁주인 나소희가 빙궁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사를 꺼내었다.

“공자님께서는 길천이라는 분이 300년 전 빙궁에 어떤 은혜를 내리셨는지 무척 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궁금하죠. 도대체 그분께서 화끈하게 처리했다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일을 설명하기 위해선 빙궁의 내력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빠르겠군요. 빙궁의 근간이 되는 심법은 음한지기를 극대화하여 탄생한 ‘빙백신공’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성보다 음기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는 여성이 이 신공을 익혔고 여기에 북해라는 지리적 여건이 더해지면서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지요.

하지만 신공을 통해 강력한 힘을 얻은 대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빙궁의 여인들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잃는 것이었지요. 남성과 합궁을 하면 신공의 근간이 되었던 순음지기가 깨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처녀성을 간직한 채 평생을 무공에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300년 전, 도색성 길천이란 분과 당시 빙궁의 궁주셨던 빙백검(氷白劍) 설후라는 분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셨습니다. 당시 설후궁주님께서는 관례에 따라 정기적으로 10년에 한 번씩 대륙을 떠돌며 고아가 된 여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무림에 출도하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길천이란 분에게 처녀성을 잃고 구음절맥에 걸린 여자아이 하나만 대동한 채 궁으로 돌아오시고 말았습니다.”

“서, 설마? 처녀성을 잃고 돌아오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빙백검 설후께서는 그 때의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한 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모두 버리셨다고 합니다. 궁주로서 면목도 없었고 빙백신공이 깨어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바로 뒷장에는 길천이란 분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지극한 쾌락을 안겨주어 고맙다는 모순된 표현도 적혀있습니다.

그러다 구음절맥으로 인해 천재성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짧은 생만을 허락받은 초하련이란 아이를 우연히 거두게 되셨고, 그 아이에게 연민을 느끼신 설후께서는 남은 생을 모두 바치기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자신이 처녀성을 잃은 순간 목숨을 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녀를 돌보기 위해서라고 기록하셨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궁으로 돌아와 하련이를 돌보며 1년이란 시간을 보낸 설후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빙백신공은 깨졌던 것이 아니라 더욱 높은 경지로 올라서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길천이란 분과 동침을 하셨던 기연이 1년이 지나 나타난 것입니다. 포기했던 희망이 다시 되살아나자 설후께서는 당장 길천이란 분을 수소문하셨지요. 아무리 머리를 쓰고 연구를 해보셔도 도통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기에 당사자를 찾으시기로 마음을 바꾸신 것이지요. 그리고 구음절맥에 걸려 생의 불꽃이 희미하게 꺼져가는 초하련에게 돌파구를 제시해줄 사람도 그분밖에 없다고 여기셨기에 사활을 걸고 도색성 길천을 찾으셨습니다.” 

“저기 궁주님? 중간에 말씀을 끊어 죄송하지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네요. 혹시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그 여자아이가 250년 전 빙궁이 낳은 천하제일검, 검의 여제라 칭송받았던 설산검후(雪散劍后) 초하련 여협은 아니시겠죠?”

“호호, 공자님의 예상이 맞습니다. 바로 검 하나로 천하를 오시하고 발아래 두셨던 검의 여제, 빙궁의 전설 설산검후 초하련 궁주님이 바로 구음절맥에 걸렸던 그 여자아이랍니다.”

“헉!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 여자아이는 분명 구음절맥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고...”

“훗날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설후께서는 3년이란 세월동안 강호를 이 잡듯 샅샅이 뒤진 끝에 드디어 길천이란 분을 찾아내셨고, 갖은 협박과 회유를 통해 그분을 빙궁으로 모셔오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빙회석이 발동될 뻔 했었다는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무,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후님께서는 당시 그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하련이의 구음절맥을 깔끔히 치료하면 자신의 처녀성을 앗아갔던 지난날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준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만약 치료하지 못하면...”

“만약 치료하지 못하면...?”

“처녀성에 대한 대가로 이곳에서 평생을 자신과 함께 지내던가 아니면 빙회석의 함정을 통과하고 빠져나가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그분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신 후 구음절맥에 걸린 초하련 궁주님과 100일간 동침을 하며 화끈하게 해결하셨지요. 구음절맥의 천형에서 벗어난 초하련 궁주께서는 천하제일검이 되셨고요.”

“흐음! 그저 놀라울 뿐이군요. 그럼 저를 그토록 환대하셨던 이유가...?”

“맞습니다. 저를 포함한 빙궁의 여인 100명은 오로지 그분의 후인이 오시길 학수고대하며 수백 년 동안 화류선을 보관해왔습니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지 마침 구음절맥에 걸린 여자아이 하나가 빙궁에 머물고 있습니다. 300년 전의 일이 똑같이 되풀이된 셈이지요. 부디 은공의 후인께서는 다시 한 번 저희들께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간절함과 열망이 가득한 궁주의 눈빛을 대해며 비담은 난감해지고 말았다. 부채 값이 만만치 않게 책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휴우, 형님과 우선 상의를 한 연후에 결정해야 되겠군.’

“궁주님께서 갑자기 그렇게 부탁하시니 당황스럽네요. 잠시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 드려야지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르셔도 상관없으니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하십시오. 다만...”

“다만...?”

“다만 부채가 보관되어 있는 장소가 ‘열천’이기에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으실 거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나중에 가보시면 자연히 아실 것입니다. 혹여 100명이 여인이 나체로 온천욕을 즐기고 있다하여 당황하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호호.”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궁주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방을 나갔다.

“100명의 여성이 나체로? 그것도 온천욕을?”

상상하는 순간 비담의 동공이 멍하게 풀려버렸다. 그리고 이내 함지박만한 미소가 입가에 매달렸다. 부채 값이 과할 정도로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흐뭇한 상상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비담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강신귀공을 운용하였다.

“형님? 300년 전 빙궁에 어마어마한 은혜를 베푸셨네요. 이곳에 오는 열흘 동안 오지말자며 극구 말리셨던 이유가 이거였습니까? 형님의 파란만장했던 색사가 들통날까봐?”

침통한 표정의 길천이 화를 주체하지 못한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늘 장난기 다분한 말투와 행동들은 모두 사라진지 오래였다. 비담도 길천의 돌변한 모습에 놀리는 것을 멈추고 진지하게 임했다.

“그게 아니다. 저 망할 년이 지금 너를 속이고 있는 거야. 니미럴 것들. 어째 만나는 것들마다 하나같이 기록정신이 투철하냐. 설마 했는데 정말로 몽땅 기록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거기에 빙궁의 년들은 날조까지 해놨어.”

“예? 날조요? 그럼 궁주가 말한 내용이 모두 거짓이란 말입니까?”

“거짓은 아니다. 단지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손을 봐둔 거지.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고 역사는 항상 승자의 몫이지 않느냐.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말을 안했다만 지들 위주로 기록을 해놓고 고쳐놓은 거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휴우,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이상 숨기겠느냐. 담아? 나를 믿지?”

“물론이지요. 제가 형님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는단 말입니까?”

“그래, 고맙다. 사실 설후라는 년의 처녀성을 내가 따 먹은 게 아니라 그년이 내 총각딱지를 강제로 떼어간 거야. 이해가 되냐? 망할 년이 얼마나 내 앞에서 꼬리를 치던지 아주 죽겠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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