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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154)

49화

비담은 약효로 인해 내공이 순간적으로 증가하였음을 간파하고 요리조리 칼을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분명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거지같은 저놈의 약효도 떨어질 것이고, 그에 따른 대가도 치르게 될 것이었다.

비담의 예상은 적중했다. 궁주를 비롯한 친위대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호오, 약발이 떨어지는 모양이구나. 정말 엿 같은 지금의 상황이 끝날 기미가 보여. 후후, 네년들이 약에 의지해 나를 잡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날뛰었는데 이거 애석해서 어쩌나.’ 

일각이란 시간이 속절없이 흐를 무렵, 여인들은 정말 죽기 살기로 비담에게 덤볐으나, 그의 그림자조차 밟을 수가 없었다. 애가 타는 여인들을 지켜보며 비담은 이제 완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느긋하게 여인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검을 든 여인들의 동공이 풀리며 하나 둘 바닥에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궁주가 쓰러지는 것을 끝으로 대전은 다시 잠잠해졌다. 비담은 강신귀공을 거두고 쓰러진 여인들에게 다가가 발로 툭툭 건드려보았다. 하지만 잠재력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 사용한 여인들은 비담이 건드려도 인사불성이었다.

“칼 들고 설치는 일곱 미친년들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람. 그래도 지은 죄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비담은 멍하게 서있는 여인들을 향해 두 팔을 으쓱 들어올렸다.

“이분들 어찌해야 될까요? 아무래도 제 권한 밖의 일인 것 같은데...”

비담이 쓰러진 여인들을 향해 툭툭 발길질을 할 때부터 심기가 불편했던 빙궁의 여인들이 이내 다가와 쓰러진 궁주와 그녀의 친위대를 둘러업고 안으로 사라졌다. 비담은 자신을 보는 여인들의 눈이 곱지 않자 그만 민망해져 빙루의 주위만 뱅뱅 맴돌았다.

“궁에 드리워진 위기를 거둬주셔서 고맙습니다. 허나 더 이상 궁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그만 떠나주십시오. 궁주를 비롯한 친위대의 처결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여인들의 차가운 응대에도 비담은 일이 이 정도에서 무마된 것에 감사하였다. 궁주가 련이라는 단체와 어떤 연관이 있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이제 저들의 몫이었기에 비담은 미련 없이 떠나기로 하였다.

“알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헌데 화류선은 어찌하면 좋을는지...?”

“후후, 당연히 가져가셔야죠. 그것 때문에 오셨으니까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공자님께서 화류선을 호락호락 뽑아 가시면 왠지 저희들로써는 손해 보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키지가 않는군요. 설사 설후 궁주님과 초하련 궁주님의 유지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고 지켜온 세월이 만만치 않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능력껏 뽑아 가시고 더불어 빙회석의 함정도 돌파하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이 준비한 작은 성의라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리하시겠습니까?”

“저야 상관없지만 나중에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궁주가 저리된 마당에 련이라는 단체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에게 작은 성의를 보이려다 나중에 더 큰 화를 당하실까 염려가 되는군요.”

“호호,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군요. 저희들도 생각이 있어 그러는 것입니다. 빙회석의 함정이 지닌 진짜 무서움은 외부와의 단절입니다. 저희들은 더 이상 외부와 교류하지 않겠습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궁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더러운 흙탕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은 사양하고 싶군요. 차라리 자체적으로 정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오. 공자님께서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로 나가는 순간 빙회석은 떨어져 내릴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그럼 지금 당장 화류선을 뽑아 궁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부탁인가요?”

“궁이 폐쇄된다고 하니 더더욱 망설일 수 없어 주제넘게 부탁을 드리는 것이니 이점 양해 해주십시오. 빙루 아가씨를 치료하며 그녀와 약속을 하였습니다. 궁의 일이 해결되면 함께 나가기로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빙루 아가씨와 함께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암암리에 대표가 된 여인이 빙루를 돌아보았다.

“이자의 말이 사실인가요?”

빙루는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빙궁의 일원으로써 궁주를 대신해 당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마을사람들이 몰살을 당한 일에 대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하고, 또 미안합니다. 빙루.”

여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빙루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 궁의 여인들 역시 무릎을 꿇더니 거듭 사죄의 말을 하였다. 빙루는 여인들의 진심어린 사과에 마음 한 켠 바위처럼 단단히 자리 잡았던 슬픔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뺨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에 빙루는 그날의 아픔을 흘려보내며 그녀들을 용서하기로 하였다. 비담은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이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비담은 용기를 내어 자신과 동침을 했던 여인에 대해 말을 꺼냈다.

“저 역시 무공을 잃은 여인께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가 그녀를 책임졌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는지요?” 

“당신이 그녀를 찾아가 사죄를 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빙궁의 여인인 그녀를 음탕한 당신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저희들이 알아서 보살필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완고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에 비담은 한 발 물러서기로 하였다.

“그럼 그녀에게 직접 의사를 물어보시는 것은...”

“싫습니다.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용서를 구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비담은 잔뜩 풀이 죽어 자신과 교합을 했던 여인의 처소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써 사죄를 하였다. 무공을 회복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말에 여인은 크게 낙담하였고, 더 이상 비담을 상대해주지도 않았다. 비담이 성심을 다해 용서를 구했으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비담은 꼬박 사흘의 시간을 여인의 문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였고, 마침내 여인은 비담을 용서해 주었다.

“그만 일어나세요.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어차피 폐인이 될 확률이 높았다 생각하니 무공을 잃은 대신 평범한 삶을 선물 받았다 여기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집착을 내려놓으니 원망과 미움도 한결 사라지고 편안해 졌네요. 그러니 더 이상 저에게 마음 쓰지 마시고, 공자님의 길을 가세요. 저는 이곳에 남아 제게 주어진 또 다른 삶을 살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어 드리지요.”

돌아서는 여인을 바라보며 비담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온몸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며 깨달은 비담이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법. 비담은 여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을 떨구었다.

다음 날.

비담의 부탁대로 빙궁의 여인들은 추위에 대비하여 빙루를 완전무장 시켜 궁 밖으로 먼저 내보냈고, 비담에게 반 시진(1시간)의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빙회석의 함정은 정확히 반 시진 후에 발동될 것이라는 말만 남긴 채, 여인들은 유유히 염천에서 사라졌다. 그 안에 화류선을 뽑아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인 셈이었다.

염천의 중앙에 위치한 조그만 섬.

그 위에 올라선 비담은 은은한 빛을 뿜는 부채, 화류선과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성숙의 시간을 보낸 터라 감회가 남달랐다.

“휴우, 형님? 드디어 화류선이 제 손에 들어오는군요.”

‘고생 많았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어서 서두르는 게 좋겠어.’

고개를 끄덕인 비담이 부채를 쥐고 강하게 뽑아 올렸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부채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내공과 귀기를 쥐어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엥? 형님. 부채가 전혀 뽑히지를 않아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혹시 아세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 번 힘 좀 써보게.’

비담이 심기일전하여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보았으나 역시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점점 다급해지는 마음에 비담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였다. 그런데 허둥대던 비담의 눈에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바로 염천의 수위가 눈에 띠게 낮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내 눈에도 물이 없어지는 것 같구나. 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빨리 부채를 뽑아야지.’

“자, 잠깐만요. 저기 뭐라 글자가 적혀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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