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국경 너머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지요. 그러는 형씨는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보아하니 혼자의 몸으로 돌아다니시는 것 같은데 담력이 꽤나 좋은가 봅니다.”
“하하, 그건 피차일반인 것 같구려. 여인과 단 둘이 이런 사막을 지난다는 게 보통사람의 담력으론 힘든 일이지요. 혹시 곤히 자고 있는 저 여인도 일행이십니까? 아니면 단둘이 밤도망이라도 치는 중인지...?”
“아닙니다. 그저 인연이 닿아 동행하는 중이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농을 던진 것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런데 깜짝 놀라시는 걸 보니 더 의심이 가기는 합니다.”
“하하, 실없는 소린 그만하시고 어쩐 일로 예까지 오신 것입니까?”
“그게 사람을 하나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하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통에 영 찾기가 쉽지 않군요.”
“누군지 몰라도 형씨께 큰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나저나 형씨처럼 무서운 사람이 직접 찾으러 다니신다니 그 사람 팔자도 무척 사납군요. 도대체 무슨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후후, 사막 가운데에서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살짝 귀띔을 해드리지요. 글쎄 이 녀석이 제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의 순정을 짓밟은 것도 모자라 몸까지 덮쳐놓고 나 몰라라 도망을 쳤다지 뭡니까. 그래서 오빠 된 도리로써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직접 찾아 나선 것이지요. 잡히면 세상 살기가 호락호락 하지 않음을 직접 깨닫게 해주려고 말입니다.”
“음, 정말 나쁜 놈이군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저도 나서서 그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고 싶군요. 도대체 그 자의 이름이 뭐랍니까?”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양보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나저나 국경 넘어서 고작 한다는 짓이 여자와 함께 도피 행각이라니...늘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비담.”
모닥불에 비친 사내의 얼굴이 스산하게 빛났다. 비담은 사내의 반응을 익히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태도로 불을 뒤적이며 물었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더라도 이유나 이름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귀는 장식용이 아니지 않은가? 다 들어놓고 이제와 발을 빼시려고? 뭐 정 궁금하다면 천마의 후예정도로 해두지. 됐는가?”
“천마신교에서 나왔습니까? 이거 실례가 많았군요. 서희의 오라버니 되십니까?”
“보기보다 영 맹탕은 아니로군. 준비됐는가?”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빙소저가 곤히 잠들어 있어서 이곳은 좀 그렇고 나중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소저가 깬 후에 말입니다.”
“잠든 여인이 신경 쓰이나 본데 너무 걱정하지 말게.”
“후후, 제가 괜한 걱정을 하였군요. 그럼 자리를 옮기시죠.”
흑천대 스물을 향해 전음을 날린 구인철이 유유히 비담과 함께 구릉너머로 사라졌다.
메마른 모래바람의 스쳐 지나가는 구릉 위, 비담은 평온한 얼굴로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제 구차한 변명을 듣고 싸우자 하면 안 되겠지요?”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게요. 살짝 기대를 한 제가 어리석었죠. 끝까지 가는 겁니까?”
“능력이 된다면.”
“하지만 서희를 생각하자니 그럴 수가 없겠네요. 어디 몇 군데 부러지셔도 저는 책임 못 집니다.”
“대관절 그런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타고난 능력이니 전들 어쩌겠습니까?”
“후후,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하압!”
짧은 기합성과 함께 비담의 몸이 구인철을 향해 튕겨져 나갔다. 초장부터 끝장을 보려는지 살벌한 기세로 달려드는 비담이었다. 무인은 오로지 칼로써 대화를 나눈다고 했던가. 천생 무골인 구인철의 입가에 정체불명의 미소가 맺히며 달려오는 비담을 향해 그대로 일 검을 내리그었다.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솜씨였다.
비담은 달려오는 힘을 역이용하여 몸을 비틀었고, 그대로 검을 피함과 동시에 구인철의 허리를 향해 돌려차기를 하였다.
구인철은 익히 예상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내리 긋던 검의 방향을 살짝 옆으로 비틀어 비담의 허리를 쓸어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비담은 해맑게 웃으며 천근추를 사용해 그대로 내리꽂힘과 동시에 휘두르던 발의 궤적을 구인철의 다리 쪽으로 바꾸었다.
아슬아슬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검을 피한 비담이 자신의 하체를 향해 다리를 뻗어오자 구인철은 힘껏 한 바퀴 뒤로 돌아 발길질을 피함과 동시에 비담의 정수리를 향해 자연스럽게 검을 꽂아 넣었다.
영활한 뱀처럼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비담은 자신의 머리를 다리 사이로 파묻으며 피했고, 동시에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전갈처럼 다리를 뒤로 꺾어 올렸다. 아직 공중에 머무르고 있던 구인철은 자신의 명치를 향해 다가오는 비담의 발끝을 검병을 이용하여 내리찍었고, 비담은 검병을 피해 다리를 접어버림과 동시에 그 탄력을 이용하여 다시 몸을 일으켰다.
설명은 길었으나 실상 이 모든 과정이 불과 수초 사이에 주고받았던 공방이었고, 비담이나 구인철 모두 일련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지켜보았다면 그저 흥에 겨워 비무를 하는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휴우, 이걸로 탐색전은 마무리하죠. 그럼 본 경기를 시작해 볼까요?”
“따분하군.”
“정말요? 저는 신나 죽을 지경인데 형님은 따분해 죽을 뻔 하셨다니 이해가 안 되네요.”
“누가 자네의 형님이지?”
“서희 오라버니라면서요?”
“그래서?”
“그럼 당연히 형님이란 호칭밖에 없지 않습니까? 형님께서도 살갑게 매제라 불러주시면 더욱 좋구요.”
“난 누구처럼 낯이 두껍지 못할뿐더러 자네를 아직 인정하지 않았네. 오늘 자네가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조금 고려해보도록 하지.”
“뭐 간단해서 좋네요. 그럼 무조건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거죠? 꼭 형님을 이기지 않아도 되는 거죠? 남아일언?”
“중천금.”
“일구이언?”
“이부지자.”
“좋습니다. 그럼 갑니다.”
“후후, 악몽도 즐기다보면 때론 약이 되는 법.”
“헤헤, 이제 보니 타고난 자신감은 형님께서 더 출중하신데요. 타압!”
화류선을 꺼내든 비담이 제1초식인 ‘주화은극(姝花隱棘:아름다운 꽃이 가시를 숨기다)’을 펼쳤다. 크게 펼쳐진 부채는 일종의 미끼였고, 숨겨진 진짜 가시는 화류선이 접혀졌을 때 생기는 몸통 부분이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펼쳐진 부채에 현혹되면 가시에 찔리고 마는 법.
화려하게 펼쳐졌던 부채가 구인철의 지근거리에서 접히며 무서운 속도로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주화은극’의 한 수는 천마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구인철에게 통하지 않았다. 구인철 수준의 무인에게 현혹이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으니까.
부채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던 구인철의 눈이 부채가 접힘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반짝 빛나며 그대로 힘의 중심이 되는 부채의 살 부분을 갈라버렸다. 비담은 자신의 초식이 너무나 쉽게 깨졌으나 마치 당연한 일인 듯 실실 웃으며 바로 제2초식인 ‘횡초봉화(橫草奉花:가로로 누운 풀들이 꽃을 받들다)’를 시전 하였다.
좌에서 우로 거칠게 휘둘러지던 부채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직각으로 곧추 세워지며 구인철의 안면을 향해 솟아올랐다. 구인철은 흔들리는 부채의 움직임을 따라 그대로 칼의 단면을 비스듬히 세워 부채를 위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담은 위로 솟아 오른 화류선을 순간적으로 정지시킨 후 바로 제3초식인 ‘수화폭류(垂花暴流:사납게 드리워진 폭포가 꽃을 삼키며 내리꽂히다)’를 시전 하여 그대로 내리꽂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부채의 연환초식으로 인해 구인철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지며 드디어 10초식으로 이루어진 ‘천마심검(天魔心劍)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구인철은 ‘천마심검’의 제1초식인 ‘혈세도래(血世到來)’를 시전 하여 내리꽂히는 사나운 폭포를 향해 맹렬히 검을 회전시켰다.
핏빛의 강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사납게 흘러내리던 폭포의 흐름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비담은 강기로 인해 자신의 선기가 흩어지자 멀찌감치 떨어지며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