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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54)

54화

“하하, 이제야 형님의 밑천을 보여주시는군요. 그나저나 너무 쉽게 받아내시니 이거 손발이 근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우리 더 해요.”

“후후, 언제든 들어오너라. 그런데 정말 훌륭한 선법을 익혔구나. 부채를 무기로 사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정도의 초식을 만들어낸 자라면 보통사람이 아닐 터.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고 우선은 서로의 무기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지?”

“두말하면 입 아프죠. 전반부의 3개 초식은 ‘강(强)’의 묘리를 바탕으로 파생된 것입니다. 중반부 3개 초식은 뭐에서 나왔을지 감상해 보십시오. 헤헤, 갑니다.”

호기롭게 외친 비담이 구인철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비담의 동작과 속도는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느려졌으며, 부채 역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둘려졌다.

마치 수면 위에 동동 떠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부드러움의 묘리를 가득 담고 있는 제4초식 ‘연상용부(淵上蓉浮)’였다. 외관상 앞서 강하게만 들어오던 부채의 공격과 달리 부드럽고 유약해보일 정도로 천천히 휘둘러지는 부채의 모습에 구인철은 더욱 신중하게 맞섰다.

무의 길을 걷는 자로써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렇듯 침착한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비담의 부채는 구인철이 전개한 천마심검 제2초식 ‘광폭참(狂暴斬)’의 사나운 파도 위를 타고 조금씩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광폭참’의 힘에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검기에 의존해 둥둥 떠오는 비담의 부채를 보며 구인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구인철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한 기분과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하하, 서희의 일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은 형, 동생 사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구나. 이토록 호쾌하게 어우러져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자, 이번엔 내 차례다.”

“하하, 늘 호적수는 있는 법이지요. 저는 처음부터 형님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얼마든지 들어오십시오.” 

살벌하기 그지없는 결투였으나 그 싸움의 한복판에서 둘은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보였다.

구인철은 기다렸다는 듯 제3초식 ‘난겁홍염(亂劫紅焰)’을 펼쳤고, 검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줄기줄기 뜨거운 화염을 뿜어내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화염을 피하기 위해 비담은 훌쩍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불길이 계속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비담은 제3초식을 강하게 전개하여 불길을 반으로 가름과 동시에 5,6초식을 연달아 펼쳤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담과 구인철의 결투는 결국 반시진이 지나서야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선법과 검법의 초식이 각각 두 개씩 남은 상황에서 서로 선을 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 것이다.

작정하고 목숨을 취하려 덤빈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피를 봐야 끝날 상황이었기에 마지막 비장의 수는 아껴두기로 한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둘이 싸워 누군가 크게 다친다면 나중에 서희를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가 둘의 합의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비담이 꾸벅 인사를 하였다. 구인철 역시 한바탕 땀을 쏟아서인지 비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밝게 웃어주었다.

저 정도 실력과 배포를 지닌 사내라면 결코 자신의 여동생에게 그런 몹쓸 짓만 하고 떠났을 리가 없다. 뭔가 사정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엔 누구나 무공을 배우지만 자신과 같은 현경의 경지에 들기 위해선 무공을 뛰어 넘어 무도(武道)의 길을 걸어야만 가능했다. 무도의 길을 걷기 위해선 그만한 마음의 그릇이 갖춰져야만 가능한 법. 그런 그릇을 지닌 자가 탐욕에 찌들어 동생을 겁탈했을 리 없다 철썩 같이 믿는 구인철이었다.

‘나는 십 분지 팔의 실력만 사용했다. 천마 할아버님의 무공을 팔성이나 쓰고서야 저놈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 만약 저놈이 자신의 능력 중 둘 이상을 숨긴 채 나와 겨루었다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이고, 녀석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밑천을 모두 퍼부은 것이라면 내 실력이 더 월등히 앞선다. 하지만 젊다는 사실을 감안 했을 때 보통의 수양과 수련을 쌓은 게 아닐 터. 도대체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났을까. 그리고 서희와는 어찌 인연이 닿았던 것일까. 후후, 정말 비밀도 많고 구미가 당기는 녀석이야.

뭐 실력이나 세부적인 사항들은 같이 지내다보면 차차 밝혀질 것이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고, 그와는 별개로 손윗사람으로써 당연히 기선제압은 해주어야겠지.’

속으론 연신 감탄성을 발하면서도 그런 속내와는 달리 구인철은 뚱한 표정으로 비담을 대했다.

“자네가 나와 대등하게 싸웠다고 해서 서희의 배필로 인정한 것은 아니니 아직 감격하기엔 이르네. 그리고 사실 서희가 눈물 질질 짜는 꼴을 볼 수 없어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니 너무 의기양양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에게 자네의 현재 상태는 딱 ‘계륵(鷄肋)’이니 알아서 처신 잘하게. 버리거나 남 주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덥석 먹자니 왠지 찜찜하고.

그래서 많이 미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앞으로 자네와 함께 다니며 더 지켜보기로 결정을 내렸네. 그러니 실망시키지 말고 최선을 다해 증명하고 채우도록 노력하게나.”

“예? 저를 따라 오시겠다고요?”

함께 다닌다는 말에 비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바탕 몸으로 진하게 대화를 나누면 적당히 인정해주고 물러갈 것이라 여겼는데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비담은 어떻게 해서라도 처갓집의 입김을 피하기 위해 입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왜? 무슨 불만 있는가?”

“불만은 없습니다. 저도 형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지요. 하지만 스무 명이나 되는 떨거지들 죄다 끌고 오시면 저도 번잡해서 싫습니다. 그리고 함께 다니는 빙소저도 시커먼 사내들이 우글거리면 불편할테고.”

“떨거지들? 감히 믿음직스러운 내 부하들을 보고 떨거지라 했는가?”

“다 합쳐도 모시는 대장 하나 감당 못하는 부하들이니 떨거지고 짐이지요.”

“그럼 자네는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은가?”

“저렇게 큰 소리로 부스럭거리는데 어찌 신경이 안 쓰입니까? 최소한 사생활 보호는 해주셔야죠.”

비담의 손가락이 맹렬히 구릉 옆을 가리켰다. 둘의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은신해 있던 흑천대 막내의 얼굴이 그 순간 똥빛으로 물들었다. 계급이 깡패라는 옛말처럼 닦달하는 선배들의 등쌀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둘의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막내는 현란하게 싸우던 둘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또렷이 떠올라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막내의 판단 기준에 의거 저기 서있는 둘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구인철은 비담의 노림수가 눈에 훤했기에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주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앞으로 주의를 주겠네. 그러면 되겠지? 그리고 자네도 무조건 내 부하들을 귀찮게 여기지만 말고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뭘 말입니까?”

“자네의 여정이 어찌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보아하니 무공을 전혀 모르는 평범한 소저던데 한 사람이 지키는 것보다 스무 명이 항상 지키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보통 사이도 아니라면서 왜 굳이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으려 하는가?”

“그, 그거야...그리고 보통 사이가 아니란 말은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냥 인연이 닿아 동행한다고만 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형님.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닌 것이지 정색하기는. 알았네, 더 이상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네.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겠네.”

“에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두리뭉실하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언제 승낙을 하였다고...?”

“아, 방금 자네가 저 여인과 인연이 닿아 동행하는 거라며? 그럼 자네와 나의 인연도 보통이 아니니 당연히 동행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말이 틀렸나?”

“우글우글 냄새나는 남자들과 연약한 한 명의 여자를 비교하시면 곤란하지요.”

“그래서 더더욱 동행을 하겠다는 것이야. 혹시 서희 몰래 딴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감시를 하겠다는데 뭔 말이 그리도 많은가? 확, 그냥 서희한테 가서 모두 까발릴까? 정말 그러길 바란다면 원대로 해주지.”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구인철을 바라보며 비담은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그냥 겸허히 수용하기로 하였다.

‘그래, 형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이참에 함께 다니며 내가 서희를 두고 절대 딴 짓을 안 한다는 것도 직접 증명하고, 앞으로 형님으로 모셔야할 분이니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내게는 좋은 일이지. 그리고 낙양까지 가는 길에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머리수가 많으면 더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알겠습니다. 형님 뜻대로 저와 함께 가시지요. 대신 형님 부하들은 알아서 잘 단속시켜 주세요. 여차하여 정신교육 시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잘 생각했네. 앞으로 잘 지내자고.”

구인철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비담의 손을 덥석 잡은 다음 맹렬히 흔들었다. 그리고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입가에 맺힌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후후, 봉은 녀석이 아니라 서희가 잡았던 거였구나. 이 녀석이라면 완고하신 아버지께서도 서희의 배필로 무조건 승낙하실 거야.’

화끈한 결투가 끝나고 다시 모닥불 앞에 앉은 인철이 비담의 신상명세와 살아온 내력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비담은 이제 한식구나 다름없는 형님이었기에 모든 사실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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