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꼭 말해야 하는가?”
“원하시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마음에 두고 계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솔직히 그녀가 마음에 드네. 처음 보는 순간부터 호감이 생겼고, 하루 종일 업고 오면서 그 마음이 더욱 애틋해지더군. 업고 달리는 내내 ‘행여 손에 쥐면 부서질 것 같은 한없이 나약한 그녀의 몸과 마음을 내가 평생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떠나지를 않더군. 자네에게 그녀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것만은 사실이라네.”
“그럼 그것이 단순히 소저에 대한 동정심은 아닐까요? 정녕 좋아하는 감정이 맞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이런 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금에 와선 중요하지 않다네. 그것이 동정심의 발로이건 정말 애틋한 호감이건 이제는 상관없다네. 그저 내 검을 구경하며 밝게 빛나던 눈동자, 조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다리를 주무르던 그 손길,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걱정스레 짓던 표정들을 마주하며 내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콩닥콩닥 뛰었고, 그녀를 가슴에 꽉 끌어안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네.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미칠 것 같으이. 혹시 이런 감정이 말로만 듣던 ‘사랑’이라는 것인가?”
“헤헤,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고약하지만 아름다운 녀석이지요.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시네요. 확 끌어안고 싶은 본능을 참아낸다는 것이 보통의 수양으론 어림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저는 그게 잘 안 되서 충동적으로 서희를 훔쳤는데 말입니다.”
“거짓말하지 말게. 비록 하루였지만 자네를 파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어. 자네는 충동적으로 훔친 것이 아니라 이미 서희의 마음과 교감을 이루었기에 그리 행동한 것이야. 일방적인 강요가 아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행동에 옮긴 것이지.”
“형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만약 서희의 마음을 제가 오해한 것이라면 상처만 주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후후, 소문만 무성했을 때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더니만, 이리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점점 마음에 드는 구석만 보이는군. 나 역시 그것 때문에 처음엔 자네를 미워하고 쫓아다녔던 것이라네. 무엇이든 소통이 중요한 법인데 그것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우겨넣고 관철시키려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행동이니까. 아니, 그런 놈들은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지.
그래서 처음엔 자네가 서희의 몸과 마음을 너무 성급히 취하고, 무책임하게 떠났다 오해했었네. 하지만 나중에 서희가 보낸 편지를 읽고 둘의 사랑이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었지.”
“저, 정말이요? 서희가 훌쩍 떠난 저를 원망하지 않던가요?”
“원래 서희의 성격이라면 분명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네. 하지만 웬일인지 서희는 자네를 곧 찾을 수 있겠다는 내 편지에 ‘고마워요, 오라버니.’라는 답장을 보내왔더군. 그래서 깨달았지. 서희가 자네를 많이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는 성급했던 것이 아니라 확신했기 때문에 그리도 저돌적이고 과감하게 사랑을 나누고 밀어붙였던 것이지.”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형님.”
“동생이 행복하다는데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마음에 두지 말게. 그나저나 정말 부러운 능력이군. 어찌하면 자네처럼 여인의 마음을 빨리 읽어낼 수 있는가? 혹시 그 색공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하하하, 이럴 때 보면 형님의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말입니다. 어찌 빙소저의 마음은 못 읽어내시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러니 나도 이리 답답한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덥석 끌어안을 용기라도 생길 텐데 혹시나 오해하여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은 아닌지 무서워 아무것도 못하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후후, 알겠습니다. 당사자가 아니라 감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제가 빙소저의 마음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형님에 대한 마음을 말이지요.”
“고맙네. 자네는 멋진 동생이야. 정말 적진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던 중 아군을 만난 기쁨만큼이나 힘이 되는군.”
“그만 일어나시죠. 조금 시일이 걸리겠지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한 우물만 파다보면 감로수 같은 물이 콸콸 쏟아져 형님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드릴 것입니다. 물론 얼마나 파 내려가면 되는지는 제가 가르쳐 드릴 거구요.”
“자네만 믿겠네.”
“참, 중요한 걸 깜빡 잊었네요.”
“뭔가?”
“콸콸 솟아나오는 물을 달게 마시는 방법 말입니다. 기껏 우물을 열심히 파놓고 넘치는 물을 바라만보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물을 마시는 방법? 그게 뭔가?”
“후후, 그거는 말이나 책보다는 시청각교육이 최고니까 조금 더 기다리셨다가 낙양에 가서 해결하지요. 제가 좋은 곳으로 한 번 모시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뭐,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기대하고 있겠네.”
비담은 털옷이나 부여잡고 품평을 늘어놓은 인철의 행동을 꼬집으려던 애초의 마음을 접고, 차근차근 접근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인철이 마교에 몸을 담고 있어 거칠게 물불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덤빌 거라는 편견은 깨어진지 오래였다. 인철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공명정대하다는 정파의 사내들에 비견해도 하나 꿀릴 것 없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본능에만 충실하여 그것을 해소하는 무뢰배도 아니었으며, 무조건 폭력으로만 해결하려는 무뇌아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냉철한 판단과 포용력 있는 인품으로 진실이나 사건의 이면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애쓰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나 표현에 서툴고 어설픈 면이 많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경에 이르는 무위를 얻기 위한 과정에서 생긴 사소한 부작용일 뿐이었다. 비담은 그리 믿고 있었다. 단순한 부작용일 거라고, 이제는 자신이 나섰으니 형님은 밤을 지배하는 제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개구리는 더 높게 도약하기 위해 몸을 움츠린다 하였던가. 그날 밤 야산에서 비담과 대화를 나눈 이후 낙양으로 향하는 이틀 동안 인철은 별다른 행동 없이 얌전히 빙루만 업고 달렸다. 은근 매일 밤마다 기대를 했던 까망이들도 적지 않게 실망하여 이제는 그냥 마음을 비웠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 빙루 역시 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였다.
낙양에 도착한 비담은 우선 적당한 객잔에 짐을 풀고, 취선루부터 찾아갔다. 만약 이성보에게 무슨 일이 생겨 취선루가 문을 닫은 것이라면 단서를 찾기에 가장 용이한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찾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막 취선루에 도착한 비담은 예상과 달리 버젓이 영업을 하는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어라? 형님 말로는 분명 문을 닫고 영업을 중단했다고 하였는데.”
비담은 걱정과 달리 취선루가 예전 모습대로 영업을 하고 있자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기쁜 마음에 이성보를 만나기 위해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성큼 들어선 비담을 맞이한 것은 취선루주 이성보가 아닌 선화였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비담을 향해 선화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근황과 안부를 물었다.
“몸 성히 잘 다녀오셨는지요?”
“막주는 어디가고 당신이 여기 있는 것입니까?”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안 그래도 공자님께서 루를 방문하시면 전하라는 루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비담은 선화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아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듣기로 하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루주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루주님께서는 공자님이 낙양을 떠나던 날 루의 문을 닫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지요. 아마도 오정회의 분노를 피하고, 은공께도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러한 결정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를 조용히 지내고 계시다가 안휘성에 있는 흑막의 조직원으로부터 급한 전갈을 받으시더니 바로 남궁세가를 향해 떠나셨지요. 워낙 급하게 떠나신지라 자세한 내막은 여쭤보지 못했고, 다만 공자님께서 혹여 루를 방문하실 수도 있으니 문을 다시 열고 영업을 재개하라는 말씀만 하셨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제게 전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얼굴도 수심이 가득한데 혹시 루주께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사실 공자님께 전하라는 말씀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방문을 하시면 불편함이 없도록 잘 모시고, 루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루주님의 말씀대로 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군요. 그런데 어찌 그리도 표정이 어두운 것입니까?”
“사실 루주님께서 남궁세가로 떠나신지 정확히 열흘이 지났습니다. 떠나신 며칠 뒤, 세가에 무사히 잠입하셨다는 편지가 오고, 어제 위험하지만 꼭 알아야할 정보가 있다며 좀 더 깊숙이 접근하시겠다는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주위의 이목과 감시가 심해 약간 부담이 되기는 하나 반드시 알아봐야할 정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막주님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은연중 표정에 드러났나 봅니다. 괜히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기에 그토록 위험한 곳에 잠입을 하셨는지 무척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군요. 아무튼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막주님 정도의 잠입술과 은둔술이면 들키지 않을 것이고, 설사 걸렸다 하더라도 세가에서 몸 하나 빼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막주님의 말씀대로 이곳에 머물며 기다리면 되겠군요.”
“공자님의 말씀을 들으니 한결 안심이 되네요. 고맙습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모실 것이니 어려워 마시고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