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54)

70화

인철과 비담은 비릿하게 웃으며 돌진하는 스물다섯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난전.

협소한 공간에서 살벌하기 그지없는 공방을 주고받으며 어우러지길 반 시진. 현경의 무위를 지닌 비담과 인철의 공격에 귀풍대 전원은 하나둘 제압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애초 청년 둘을 가볍게 요리하고 도주하겠다는 거창한 꿈은 물 건너 간지 오래였다.

이제 위척 주위에 남은 무사는 달랑 다섯. 모두들 차가운 지붕에 몸을 누인 채 꼴사납게 쓰러져있었다. 위척은 두 청년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윗줄임을 간파하고 참담한 심정에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실력자들이 나왔단 말인가. 그저 단순히 세가 내에 침투하여 이간질과 더불어 상잔시키는 것이 목적인 우리들의 힘만으로 막기엔 역부족인 자들이다. 만약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모든 사실을 발설한다면 무림전복지계에 대한 단서를 줄 뿐만 아니라 련에 막대한 피해가 생길 것이다. 이미 련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마당에 무엇이 아깝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뒷걸음치던 위척이 모종의 결심으로 얼굴을 굳힌 후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세가에 침투한 목적과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은 자신을 포함해 다섯.

분전하여 싸우다 힘에 부쳐 상황이 여의치 않을 시엔 자결하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무장한 위척이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전음을 보낸 후 그대로 몸을 날렸다.

두려움에 떨던 위척이 물불 안 가리고 덤비자 비담은 수비 위주로 전략을 바꾸었다. 어떻게든 세가와 연결된 끈 하나쯤은 남겨둬야 했기에 제압하기로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 일변도로 덤비던 위척의 내력이 바닥나고, 급기야 비담의 부채가 자신의 마혈을 향해 파고들자 눈을 질끈 감은 위척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금니의 공간을 파고 심어두었던 독단을 깨문 것이다.

맹독이 그의 식도를 타고 순식간에 넘어갔고, 얼굴의 시커멓게 변한 위척이 비릿하게 웃으며 모로 쓰러졌다. 이미 제압당해 쓰러져 있던 수하들 역시 위척이 쓰러짐과 동시에 자신의 어금니를 깨물어 자결해 버렸다.

이와 같은 정황을 사전에 알지 못했던 인철과 비담은 순간 당황하였고, 이제 지붕위엔 쓰러져 신음만 흘리는 귀풍대 스물과 시커멓게 변한 싸늘한 주검 다섯 구만 남게 되었다.

“이, 이런 젠장!”

“우리가 너무 안일했군. 설마 독단을 삼켜 자결할 줄이야. 고도로 훈련되고 세뇌당한 자들이 틀림없다.”

“그럼 련이라는 단체가 어딜 말하는지 짐작이 되는군요.”

서로 눈을 맞춘 둘의 입이 동시에 열리며 하나의 단체명이 똑같이 튀어나왔다.

“사! 도! 련!”

“그런데 뭔가 찝찝한 것이 영 개운치가 않네요. 빙궁의 일도 그렇게 오정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곳 남궁세가의 일도 그렇고. 막주님이 정신을 차리면 더 명확히 밝혀지겠으나 분명 어둠에 숨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체계적이고 은밀하게 말이지요.”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정사대전을 일으킨 것으로도 모자라 또 뭔가를 꾸며 무림을 피로 물들이려 한단 말인가. 결코 이번 일을 좌시해서는 안 되네. 당장 그놈들을 찾아가 요절을 내버리세. 어서!” 

정사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흑천맹을 떠올리며 울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는 인철이었다. 비담은 당장 몸을 날리려는 인철을 서둘러 제지한 후 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저 역시 형님 말대로 그런 녀석들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허나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만 가지고 따지기엔 너무 빈약하고 위험합니다. 자칫 저들의 경계심만 높이는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이미 빙궁은 봉문에 들어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남궁세가에 침투한 저놈들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끓어버렸습니다. 우선은 전혀 모른 척 적들을 안심시킨 연후에 조금씩 차분하게 접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 하지만 극악무도한 그자들을 방치했다가 무림에 어떤 혈겁이 닥칠지 장담할 수 없다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작전상 잠시 후퇴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우선은 우리가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것이 급선무이고, 그런 연후에 은밀히 저들의 계획을 차근차근 분쇄해 나가면 됩니다. 알게 모르게 우연을 가장해서 조금씩 말입니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사도련을 너무 우습게 봐서는 안 되네. 그렇게 호락호락 무너질 자들이 아닐세. 아마도 지금은 정사대전 때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그 세가 불어나 있을 것이고, 더불어 련주인 구지신마 극현도 역시 머리가 비상한 자일세.”

“하하, 그걸 잘 아시는 분께서 방금 혼자 뛰쳐나가려 했던 것입니까?”

“흠흠, 그거야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그런 거지 가다가 중간에 멈췄을 것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사도련은 우리 흑천맹과 불공대천의 원수가 아니던가. 그나저나 그럼 효과적으로 저들을 막아낼 방법이 있는가?”

“편 가르기를 해야지요.”

“편 가르기?”

“사도련이 저만큼 세를 불리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당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겠지요? 그들을 찾아가 사도련의 음모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반사도련연맹 가입에 가부를 결정하겠지요. 저 역시 서희가 겪었을 고초를 생각해 나서는 것이니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자네의 말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허나 그들이 과연 우리의 말을 믿겠는가?”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사도련에 대한 경각심은 갖겠지요. 그러다보면 시간을 벌 수 있고, 그동안 우리는 차근차근 저들의 음모를 각개격파하면 되는 것이지요.”

“알았네. 자네 말대로 천천히 일을 진행해보세. 그럼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막주님께서 깨어날 동안 형님은 우선 흑천맹에 가셔서 이와 같은 정황을 알리고, 대비를 해주십시오. 분명 대륙 전역에 저들의 눈과 귀가 있을 것이니 가급적이면 믿을 수 있는 소수정예로 계획을 짜고 방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막주님의 정보력을 이용하여 대책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그럼 남궁세가를 벗어나는 대로 바로 흑천맹으로 떠나겠네.”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들의 이목이 아직 세가 내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저와 함께 낙양으로 가시지요. 그런 연후에 흑천맹으로 가시는 것이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

“하하, 자네의 말에 따르겠네. 그건 그렇고 이제 보니 자네의 지략도 보통이 아니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주는 자네가 곁에 있으니 아주 든든한 걸.”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럼 검황 어르신이 계신 곳으로 가시지요. 참, 검황 어르신께는 일단 함구해 주십시오. 아직은 시기상조이니 형님과 저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시간 전음을 나눈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신색으로 검황이 있는 연못가로 돌아갔다.

때마침 검황 남궁헌수도 집안단속이 끝났는지 다가오는 둘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래,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는가?”

“그게 반만 해결된 듯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스물다섯 모두 제압은 하였으나 불미스럽게도 요주의 인물 다섯이 자결을 하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남궁세가를 암중 조정한 인물인 것 같은데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거 중요한 단서가 사라져서 어쩌죠?”

“어쩔 수 없지. 일이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 것에 감사하는 수밖에. 그럼 나머지 스물은 지붕위에 쓰러져 있는가?”

“네, 어르신. 혼절한 상태로 쓰러져 있을 것입니다. 다만 자결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참, 집안단속은 잘 마무리 하셨는지요?”

“그럭저럭 마무리되었네. 몸에 요상한 문신을 새긴 녀석들을 모두 추려내어 면벽수행 3년을 하라 일렀으니 더 이상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걸세. 참, 언제 떠날 것인가?”

“이리 소란을 피워 놓아 식솔들이 저를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으니 되도록 빨리 떠나야지요. 함께 가실 것입니까?”

“당연한 소릴 뭐 하러 입 아프게 떠드나. 행선지는 어디인가?”

“낙양입니다.”

“낙양이라...좋은 곳이지. 그럼 어서 출발하세.”

“그러죠.”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현탁이 한사코 가주의 전용마차를 내어주겠다 하였으나, 남궁헌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집안단속이나 신경 쓰라고 면박까지 주었다.

남궁현탁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볼멘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딸인 남궁소미에게 할아버님을 잘 모시라는 당부로 배웅인사를 대신하였고, 세가의 공용마차에 환자인 이성보만 태운 채 일행은 낙양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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